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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을 복되게 하라(부활 6주일, 최도미닉신부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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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6주. 가정주일) /창세2:18-25, 에페6:1-4, 루가6:43-45

가정을 복되게 하라

 

이어령씨는 가정에 대하여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세상은 사막처럼 되어 가고 있습니다. 콘크리트의 그 거대한 사막에서 낙타가 쉴 수 있는 것은, 그리고 녹지가 될 수 있는 것은 다름 아닌 가정입니다. 이것이 흔들리면 사회전체, 국가 존립이 위태하게 됩니다.”라고 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세상에서 가정만큼 소중한 곳은 없습니다. 인간은 가정에서 태어나 가정에서 죽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기초적인 인성도 바로 이 가정에서 형성됩니다. 뿐만아니라 가정은 지치고 힘든 몸이 안식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가정은 인간을 존재케 하는 근원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가정이 심각한 위험에 빠져 있다는 것입니다. 급격한 이혼 증가와 사회적인 환경변화는 가정을 급속도로 해체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시대에 이 가정을 지키고 복되게 해야 하는 것은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소명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언제나 기뻐하셨습니다. 그런데 보기에 좋지 않았다는 말이 딱 한군데 나옵니다. 바로 혼자 있는 아담의 모습입니다. 이런 아담에게 거들 짝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바로 가정을 주신 것입니다.

이때 비로소 아담은 기뻐하며 이렇게 노래를 불렀습니다.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에덴동산이 어떤 곳입니까? 천국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런 에덴동산에 산다할지라도 온전한 가정을 이루지 못한 인간에게는 기쁨이 될 수가 없습니다. 행복이 될 수 없습니다. 이게 인간의 본질입니다.

아무리 문명이 발전해서 편리해지고 풍요로워 졌다고 해도 가정을 지키지 못한다면 그것은 위기요, 비극이요, 불행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에덴에서 아담이 불렀던 그 행복의 노래가 우리 가정에서 흘러나오게 해야 합니다.

 

창세기를 보면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 가는 비밀을 말해주는 열쇠가 있습니다. 바로 “알몸이면서도 서로 부끄러운 줄을 몰랐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아주 짧은 말씀 속에는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 가는 주춧돌과 같은 비밀이 들어있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주신 알몸의 비밀이 어떤 것인지 함께 찾아보고자 합니다.

 

첫째,알몸이 되었다는 것은 하느님 앞에 섰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 어떤 모습으로 섭니까? 알몸으로 섭니다. 하느님 앞에 선 아담과 하와의 모습은 알몸이었습니다. 이 때 인간은 참으로 행복했습니다. 그러므로 알몸이란 말은 하느님 앞에 선 존재라는 뜻입니다.

건강한 가정이 되는 비결은 하느님 앞에서는 것입니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의 가정의 위기가 어디에서 온다고 생각하십니까? 바로 하느님 앞에 서기를 꺼려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앞에 서기 보다는 돈과 권력과 명예 앞에 서려고 합니다. 그래서 불행해 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월호 참사를 보면서 권력과 돈 앞에 선 인간의 모습이 얼마나 추한지 보고 느꼈습니다. 겉으로 보는 돈과 권력은 화려하고 좋아보였습니다. 그러나 그 속을 들여다보니 정말 더럽고 추한 모습이었습니다.

 

창세기 1장을 보면 인간은 여섯째 날에 창조되었습니다. 사람이 눈을 뜨고 맞이한 첫 번째 날은 바로 안식일이었습니다. 인간은 일을 먼저 한 것이 아니라 안식하는 것이 먼저였습니다. 달력을 보십시오. 월요일부터 시작하나요. 아닙니다. 주일부터 시작합니다. 안식은 하느님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안식하고 그 다음에 다른 일들을 시작한 것입니다. 바로 안식을 기억하고 출발하는 것이 축복의 근본입니다.

이처럼 하느님은 먼저 안식을 주시고, 이 안식을 통해 나머지 6일의 삶을 살아가도록 하셨습니다. 이게 허물어지게 될 때 가정은 불행하게 됩니다. 하느님은 이 안식을 통해 복을 주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가정에 새겨두십시오. 마음 속에 심고 또 심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합니다. 사무엘이나, 다윗, 요셉과 같은 사람을 조상이라 부르지 않은 이유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가정교육에 성공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에게 이 안식의 교육을 철저히 시킨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얻게 된 것은 100세였습니다. 100세 때 갖게 된 아들, 얼마나 소중합니까? 그런데 하느님은 이 아들을 번제물로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하느님을 아는 아들로 양육하라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과 종들과 함께 이삭을 번제의 제물로 바치기 위해 모리앗 산을 향해 갑니다. 이 때 아브라함은 장작을 그 어린 이삭이 지고 가게 합니다.

 

제가 군에 갈 때입니다. 어머님은 작은 보따리를 버스 타는 곳까지 들고 가시셨습니다. 아무리 달라고 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게 어머니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이제 곧 제물이 되어 죽어야 하는 이삭입니다. 그런데 이삭에게 그 무거운 장작을 지고가게 합니다. 저 같았으면 차마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겁니다. 저는 왜 아브라함은 이삭에게 그 짐을 지게 하였을까요? 생각해 보았습니다. 안식을 가르치기 위함입니다.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을 경외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내 생명 다하는 날까지 마음속에 깊이 간직해야할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앞에 서 있는 가정, 축복 받는 가정, 행복한 가정입니다.

오늘 시편 말씀입니다. “야훼께서 집을 세워 주지 아니하시면 집짓는 자들의 수고가 헛되며 야훼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일이다. 이른 새벽에 일찍 일어나는 것도 밤늦게 잠자리에 드는 것도, 먹으려고 애쓰는 것도 다 헛되고 헛되니 야훼께서는 사랑하시는 자에게 잘 때에도 배불리신다.”

그렇습니다. 참된 행복, 하느님을 알고, 그분과 동행하는 삶을 으뜸으로 여기는 가정은 축복된 가정입니다. 잘 때에도 배불리십니다. 비록 잘 때 나는 일하지 않겠습니다. 하느님은 나의 행복을 위해 일합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둘째, 가정을 행복하게 하는 힘은 사랑입니다.

성경을 보면 인간은 불량품입니다. 다른 모든 피조물은 만드신 후에는 모두 다 보기에 좋아하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아니었습니다. 보기에 좋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다시 수선을 하신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 아담이 혼자 있는 모습이 보기에 좋지 않으셨다는 말은 생활이 불편해서가 아닙니다. 아담이 하느님의 성품을 닮아서 사랑으로 창조되었는데, 아담에게 사랑할 대상이 없어서 보기에 좋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인간은 서로 사랑해야할 대성을 잃을 때, 관계를 잃게 되면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때문에 아담과 함께 있어야할 거둘 짝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가정을 만들어 주셨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가정을 만들 때 아담의 몸에서 갈비뼈를 빼서 만드셨습니다. 왜 하느님은 다른 흙을 취하여 만들지 않으시고 아담의 갈비뼈를 취하셨을까요? 가정은 아담이 자신의 갈비뼈를 내 준 것처럼 서로가 서로를 내 줄 수 있을 때만 행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우리 조상은 그토록 집요하게 자식들에게 덤을 가르치셨는가? 봅니다.

 

이처럼 사랑이란 자신의 유익이 아니라 상대방의 유익을 위해 자신을 줄 수 있는 것, 바로 사랑입니다. 자신을 주지 않고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있다면 예수님께서 구지 십자가에서 죽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이처럼 줌으로서 기뻐하는 관계, 섬김으로 기뻐하는 관계가 바로 사랑입니다.

 

저는 하얀 나비가 배추꽃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면 신기합니다. 그런데 한 때는 먹고 먹히는 관계였을 것입니다. 한쪽은 먹어야하고, 한쪽은 먹혀야 했습니다. 이때 배추와 배추벌레는 아름다운 관계는 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나비가 되고 나면 더 이상 배추 잎을 먹지 않습니다. 오히려 배추꽃에 앉아 배추꽃이 주는 꿀을 따먹고, 나비는 배추꽃의 수정을 돕습니다. 이렇게 서로가 주는 관계가 됩니다. 이렇게 서로가 줄 수 있는 관계가 되면 조화를 이룰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관계를 돕는 배필, 거둘 짝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축복된 가정을 만드는 비결은 내가 중심이 되는 가정이 아니라 언제나 남에 대한 배려가 있는 가정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과 생각을 점점 더 넓혀 가는 가정입니다. 이렇게 아담과 하와가 서로 사랑하는 관계였을 때 그들은 알몸이면서도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저는 가정을 사랑의 공동체로 만들어가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옷을 입지 말아야 합니다.

알몸이란 옷을 입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언제 옷을 입습니까? 하느님과 같은 사람이 되려는 욕심에 사로잡혀 있었을 때, 그들은 하느님과의 약속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고 말았습니다. 가장 높은 자가 되려는 마음, 섬기는 것이 아니라 섬김을 받으려는 마음, 이런 마음을 가질 때 사탄이 유혹합니다.

 

흔히 “옷”하면 그 사람의 신분을 말해줍니다. 어떤 옷을 입느냐에 따라 높아지기도 하고 낮아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가정에서 누가 높은지 낮은지 따지기 시작하면 그 가정은 행복할 수 없는 가정입니다.

예전에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북어하고 여자는 때려야 말을 듣는다고 말입니다. 얼마나 무식한 말입니까? 이것은 불행하자는 이야기입니다. 결혼한 부부들이 기 싸움을 합니다. 초반에 잡지 않으면 고생한다나요, 그러다가 이혼합니다. 이렇게 기 싸움을 하다가 10쌍 중 1쌍이 신혼여행을 하다가 헤어진다고 합니다.

 

가정은 옷을 입는 곳이 아닙니다. 세속적인 권위가 생기기 되면 절대로 행복할 수 없는 곳이 가정입니다.

 

저는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을 들으며 자라났습니다. 그런데 그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말이 조금은 이해가 될 것 같습니다. 가정은 힘으로 되는 곳이 아니거든요. 힘이 센 부모가 꺾입니다. 왜 꺾입니까? 아직 이해하지 못하는 자식을 위해 자신의 생각을 꺾는 것이지요. 그러나 압니다. 결국 자식이 그 부모의 마음을 이해하게 될 것이라는 아십니다. 자신을 줌으로써, 자신이 낮아짐으로서 행복한 곳 바로 가정입니다.

다음으로 비밀을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대체적으로 가정의 불화가 시작되는 것은 감춤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뭔가 감추기 시작하면 이미 가정의 행복이 깨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아예 감출만한 일을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비밀이 많은 가정 치고 행복한 가정을 보지 못했습니다.

 

죄의 속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행위를 감추는 것입니다. 사랑의 행위는 왼손이 하는 것을 오른 손이 모르게 함으로 축복을 받지만, 죄는 감춤으로 우리를 저주받게 합니다. 가정은 비밀이 없어야 행복해 집니다. 그래야 유혹에 빠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드러났을 때 부끄러움운 일은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교우 여러분 가정을 행복하게 하게 하십시오. 이것은 주님의 지상 명령입니다. 만약에 돈이나 명예가 가정을 불행하게 만든다면 아낌없이 버려야 합니다. 만약 나의 잘못된 생활 습관이 가정을 불행하게 만든다면 자신의 삶을 가차 없이 바꾸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가정은 지상에 세워 주신 에덴이기 때문입니다. 가정을 해치는 행위는 곧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의 범죄와 같습니다.

 

교회가 십자가의 진리가 선포하는 곳이라면 가정은 그 진리를 보여주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을 지키십시오. 가정은 하느님께서 인간이 미리 누릴 수 있도록 주신 에덴입니다. 그러므로 에덴을 지키는 성도는 영원한 에덴을 선물로 받게 될 것입니다. 가정을 복되게 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