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말씀과 신앙나눔 가해 대림 3주일 설교문 (양지우부제, 노원나눔교회)

가해 대림 3주일 설교문 (양지우부제, 노원나눔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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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하느님,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우리를 사랑으로 지켜 주시나이다. 비오니, 연약한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닫힌 눈을 열어 주시어 기쁜 마음으로 영광을 찬송하게 하소서.

이사 35;1-10
시편 146;5-10
야고 5;7-10
마태 11;2-11

그런데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감옥에서 전해 듣고 제자들을 예수께 보내어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바로 선생님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하겠읍니까?” 하고 묻게 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가 듣고 본 대로 요한에게 가서 알려라. 소경이 보고 절름발이가 제대로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하여진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사람은 행복하다.” 요한의 제자들이 물러 간 뒤에 예수께서 군중에게 요한을 두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무엇을 보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아니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냐?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은 왕궁에 있다. 그렇다면 너희는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예언자냐? 그렇다! 그런데 사실은 예언자보다 더 훌륭한 사람을 보았다. 성서에, ‘너보다 앞서 내 사자를 보내니 그가 네 갈 길을 미리 닦아 놓으리라’ 하신 말씀은 바로 이 사람을 가리킨 것이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일찌기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었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이라도 그 사람보다는 크다.”

<농부가 봄비를 기다리듯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 전합니다.

#1.

다시, 기다림의 계절입니다. 메시아의 탄생을 간절히 바라던 선조들의 마음과 삶의 리듬을 우리 것으로 삼는 날들입니다. 그 기다림이 어떤 뜻을 담고 있었는지, 어떤 것이었는지 곱씹어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기다리는지, 그리고 어떻게 기다리는지 말입니다.

우리, 그리스도교인들보다 더 간절히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는 요즘입니다. <크리스마스의 해방>이라는 책을 적은 리처드 호슬리(Richard Horsley)는 책에서 이렇게 한탄합니다. “세계 전체 자원의 70%를 소비하는 미국에서 추수감사절과 성탄절 사이, 4주 동안, 한해에 팔리는 모든 상품의 40%가 팔린다.” 그리스도의 탄생은 일종의 “대목”, 장사가 잘 되는 시기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사라지고, ‘기쁨과 희망, 그리고 구매’만이 남곤 합니다. 본래 뜻이 꺾여버린 이 상황은 꽤 오래되었지요. 그들에게 크리스마스의 본 뜻을 되살려 알리는 일은 부질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하물며 그에 대한 기다림을 설명한다니, 불가능해 보입니다.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인 우리가, 본래 뜻을 살려내 우리의 생활로 가져가는 일 말입니다. 그래서 물어야 합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가. 우리는 무엇을 기다리는가.”

#2.

크리스마스의 3일 뒤부터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12월 28일이 무슨 날인지 아십니까. 전통을 중시하는 그리스도교의 교회들은 이 날을 “죄 없는 어린이들의 순교일”로 지킵니다. 예수 탄생 당시 이스라엘을 지배하던 헤로데 왕은 자신이 아닌 또 다른 “유대인의 왕”이 태어났다는 동방박사들의 말을 듣고 분개합니다. 그리고 극도로 불안해집니다. 그는 왕위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정적들을 철저하게 제거한 경험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번에도 여지없이 그 잔인함을 뿜어냅니다.

예수의 탄생 무렵에 “베들레헴과 그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를 모조리 죽여(마태오 2:16)” 버리라고 명령합니다. 생때같은 그 아이들, 부모의 품 안에 안겨 가장 행복한 시기를 보냈어야 할 그 아이들을 온갖 방법으로 죽였습니다. 베들레헴은 부모들의 비탄과 절망의 울부짖음으로 차 넘쳤습니다. 그 여파로 예수의 아버지인 요셉은 이집트로 피난합니다.

그런 시대였습니다. 크리스마스는 그런 아픔을 품고 있습니다. 출생마저도 저주가 될 수 있는 그런 잔혹한 시절이었습니다. 그래서, 지난 주 복음서를 통해 들으셨던 세례 요한의 저주가 힘을 받습니다. “(오시는 그 분은) 알곡을 모아 곳간에 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다.” 그가 전한 이 외침은 사람들의 입소문을 타고 더욱 퍼져나갑니다. 세례자 요한이 화에 가득 차 선포하는 이 저주는 세상의 정의와 새로운 나라의 탄생을 당겨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서 속의 세례 요한은 다릅니다. 그는 헤로데의 부정을 비난하고 감옥에 갇혀 있는데, 지난주와 사뭇 다른 태도로 예수님께 묻고 있습니다. 지난주에 예수님에 대한 확신을 드러내 보였다면, 오늘은 불안에 떨며 질문하고 있습니다. 3절에서 그는, “오시기로 되어있는 분이 바로 선생님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하겠습니까?”

#3.

무엇이 당찼던 세례 요한의 기다림을 흔들어 놓았을까요. 바로 예수님의 모습이 요한이 기다렸던, 아니 기대했던 메시아의 모습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새로운 나라, 하느님께서 통치하시는 나라를 펼쳐 보이실 메시아의 모습을 이미 마음속에 품고 있었습니다. 죄 없는 아이들을 죽이고, 힘과 무기, 계략과 술수로 세상을 지배하는 세력들을 “꺼지지 않는 불”로 태워 버리시리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병자들과 세리, 몸을 팔던 여인들, 소위 ‘죄인’이라 불리던 이들과 어울리셨습니다. 그리고 함께 먹고 마셨습니다. 힘 있는 자들이 아니라, 힘없는 자들 곁에 계셨습니다. 한 줌에 무너질 것 만 같던 “소경, 절름발이, 나병환자, 귀머거리, 가난한 사람들”과 어울리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요한의 기대를 배반했습니다. 요한과 그의 제자들은 기대가 꺾이자 당황하기 시작했습니다. 감옥 안에 갇힌 그는, 불안했습니다. 심지어 헤로데 왕의 심문과 괴롭힘이 강해질수록, 인내심은 옅어졌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태중에서 만나 뛰었던 세례 요한은 이전까지 자신의 태도를 던져버리고, 묻는 겁니다.

세례 요한은 마지막 예언자요, 선지자로 불립니다. 분명히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한 사람으로서도 그렇지만, 우리가 이 기다림의 계절에 품게 될 질문을 먼저 던지고 있기 때문에도 그렇습니다. 구원은 나약한 모습으로 옵니다. 교회는 한 줌도 되지 않을 힘없는 이들에게 열려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은 그러한 모습의 교회를 비웃습니다. “당신은 정말 우리가 기다리던 그 사람입니까.”

#4.

그는 기존의 질서가 뒤집힌 ‘하느님 나라’, 마태오 복음에서는 ‘하늘 나라’라고 일컫는 세상을 기대했는지도 모릅니다. 메시아는 새로운 세상을 여는 새로운 “왕”이자, 새로운 “힘”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자는 말구유에 누인 “피난민의 아이”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전하셨던 하느님 나라는 자라나는 “씨앗”과 같습니다. 그것은 “모든 씨앗 중에서 가장 작은 것이지만 싹이 트고 자라나면 어느 푸성귀보다도 커져서 공중의 새들이 날아와 그 가지에 깃들일 만큼 큰 나무”(마 13:32)로 자라날 씨앗과 같습니다.

우리에게는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그저 가만히, 주저앉아 있는 기다림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물을 주시고, 빛을 비추시고, 거름을 주시는 그 거룩한 시간에 대한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이 기다림의 계절에, 역설적이게도 ‘기대가 무너지는 경험’이 필요한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주님을 “기다린다”고 말하면서도, 우리의 기대가, 우리의 소원이 이뤄질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기다린다”는 말은 자주, “기대한다”는 말과 뒤섞여서, 무엇이 본래 뜻인지 알아차리지도 못할 만큼 혼동되고는 합니다.

우리의 기다림은 나의 뜻이, 나의 기대가 성취되기를 향하지 않습니다. 기다린다는 말은 오히려 나의 뜻이 꺾이고, 하느님의 뜻이 나를 변화시키기를 바란다는 매우 수동적인, 수용적인 뜻이 담겨 있습니다. 마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요한의 기대를 꺾어버린 것처럼, 우리의 기대는 꺾여야 합니다. 그 후에 새로운 차원의 기다림을 시작해야 합니다.

#5.

우리는 언제 한 아이가 성장했다는 걸 확인할 수 있게 되나요. 제 경험에 비추어 보면, 크리스마스를 맞이한 아이의 태도를 지켜보면 됩니다. 아이는 크리스마스가 다가올수록 마음이 부풉니다. 아이들이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다린다고 말하기는 민망하고, 부모님께서 아끼고 아끼다 전해주시는 선물 때문이지요. 2주, 혹은 1주 전에 부모님은 물으십니다. “어떤 선물이 좋아? 착하게 말 잘 들으면 산타 할아버지께서 가져다주실 수도 있어.” 강아지에서부터 게임기, 만화책 등 온갖 선물 목록이 등장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아이는 더 이상 받고 싶은 선물 목록을 내놓지 않습니다. 기대하는 선물의 이름들이 사라지고, 곁에 있는 사람들, 특히 부모님이 애쓰며 살아가시는 그 모습, 세상의 모든 것일 것만 같았던 그 분의 나약한 어깨와 왜소한 등을 알아보는 순간이 옵니다. 그 순간, 아이는 어른이 됩니다.

우리의 기다림도 이와 같지 않을까요. 내 희망과 요구, 기대가 멈추고 나를 위해 다가오시는 하느님, 그리고 언제나 곁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정직하게 바라보게 되는 순간이 오면 우리는 그 때부터 진정한 ‘기다림’을 시작하게 됩니다. 이를 위해서 내 욕심이 나 자신을 삼켜버리지 않도록 스스로를 단단히 붙들고, 살펴야만 합니다.

그래서 2독서, 야고보의 편지에 담긴 비유는 큰 힘이 됩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참고 기다리십시오. 농부는 땅이 귀중한 소출을 낼 때까지는 끈기 있게 가을비와 봄비를 기다립니다. 여러분도 참고 기다리며 마음을 굳게 하십시오. 주님께서 오실 날이 가까이 왔습니다.”

여러분의 기다림에, 언제나 주님께서 동행하시기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