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말씀과 신앙나눔 감사는 축복을 담는 그릇입니다(연중 32주일, 최도미닉 신부 말씀)

감사는 축복을 담는 그릇입니다(연중 32주일, 최도미닉 신부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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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1. 10(연중32주. 추수감사주일)/ 신명8:11-15, 1데살5:16-24, 루가17:11-19

 

감사는 축복을 담는 그릇입니다

얼마 전 “새 시대를 이끌어갈 개혁의 영성”이란 주제로 열린 종교개역 기념 포럼에 참석 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 포럼에서 발제자인 장신대 김은혜 교수는오늘의 세계는 두 가지의 아주 불행한 징조가 보인다고 말했습니다.

지금 세계는 일찍이 누려본 일이 없는 물질의 풍요를 누리면서도 사상 유래 없는 빈부격차로 야기되는 비극과 비인간화와 생태계 파괴로 인해 일어날 재앙이 우리의 미래를 어둡게 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두 어둠은 모두가 잘못된 물질관, 잘못된 감사가 빚어낸 비극이라고 생각합니다.

물질은 언제나 두 개의 얼굴을 갖고 있습니다. 인간이 살아가는데 없어서는 안 될 아주 중요한 것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병들게 하는 원흉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물질을 다스릴 줄 알아야 합니다.

창세기의 노아의 이야기는 세례를 받은 성도의 삶을 연상케 합니다. 아담의 후예들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한 것을 후회하실 정도로 타락했습니다. 그래서 물로 심판하시고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하느님은 새로운 세상에서 풍요롭고 행복하게 살아가도록 물질과 재능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에게 주신 이 축복의 선물을 어떻게 다스리는가에 따라서 복이 되기도 하고, 화가 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노아의 후예들은 아담의 후예처럼 부패하고 타락해서 하느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말았으면 하셨습니다. 노아의 이야기는 세례를 받고 하느님을 향한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거울과 같은 진리를 깨닫게 해줍니다.

노아는 하느님께서 인정한 의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노아가 포도주에 취해서 그만 수치를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포도주는 하느님께서 인간의 행복을 위해 내려주신 축복의 상징입니다. 포도는 하느님께 인간에게 주신 일용할 양식입니다. 이 축복이 없이는 인간은 단 한순간도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리도 또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재능입니다. 술은 재능의 상징입니다. 포도로 술을 만들 수 있는 기술은 인간에게만 주신 특별한 은총입니다. 인간은 이 기술로 문명을 창조했습니다. 그리고 온갖 풍요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노아가 그 술에 취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술에 취한 노아는 자녀들 앞에서 큰 수치를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노아의 실수는 물질이 가진 이중적이 모습을 우리에게 보줍니다. 물질이 때로는 축복의 선물이지만 때로는 우리를 수치스럽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물질을 다스릴 줄 알아야 합니다. 물질의 노예가 아니라 주인이 되어야합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사람들로 하여금 추수감사절을 지키게 한 근본이유입니다.

이스라엘은 모든 결실을 거두어들이고 나면 추수감사절축제를 지켰습니다. 이것을 수장절이라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수장절을 지키게 한 것은 물질을 잘 다스려 모두를 복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물질의 노예가 아니라 물질을 올바로 다스리는 주인이 되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물질의 노예가 아니라 물질을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감사입니다. 우리의 예배가 감사의 축제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느님이 내려주신 모든 축복은 감사로부터 시작합니다. 감사할 줄 아는 삶만이 우리를 물질의 노예가 아니라 주인으로 살게 합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참된 감사의 삶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10명의 나병환자가 있었습니다. 나병환자들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듣고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매달렸습니다. 주님은 이런 나병환자들에게 사제들에게 가서 자신의 몸을 보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나병이 낫게 되면 사제에게 가서 확인을 받아야만 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의 병이 다 치유되었기 때문에 가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믿었고 순종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사제들에게 가는 도중에 나병이 나아 버린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믿음입니까?

사람들은 여기까지만 보고도 참으로 위대한 신앙이다, 축복 받은 사람들이라고 할지모릅니다. 그러나 이 믿음은 위대한 신앙도, 축복도 아니요 또한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할 수 있는 믿음도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직 하느님을 찬양하며 주님께로 돌아와 주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린 이 한 사람에게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이방인이 보여준 감사란 어떤 것입니까? 추수감사절을 드리면서 이 마음을 드려야 하겠습니다.

우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였다고 했습니다.

나병이 나았으니 얼마나 기쁘고 행복했겠습니까? 그 기쁨이 얼마나 큰지는 병들었다 나아본 사람은 다 압니다. 나병환자들은 이 병이 치유되는 순간 지난날 어둡고 힘들었던 시련도 불행도 다 사라졌을 것입니다. 얼마나 기쁘고 복된 일입니까? 그러나 그들의 삶의 환경이 바뀌어 지고 좋아졌다 할지라도 이것이 성서가 말하려고 참된 축복은 아닙니다. 여기까지의 기쁨, 여기까지의 감사는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기쁨이요 감사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기쁨은 그 이후의 기쁨과 감사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참된 기쁨과 감사는 어디에 있습니까? “하느님을 찬양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신명기 8장 11절 말씀을 보면 “배불리 먹고 좋은 집을 짓고 살게 되고, 소 떼 양떼가 불어나고 은과 금이 많아져 너희 재산이 늘어나더라도 행여나 교만한 생각으로 너희 하느님 야훼를 잊는 일이 없도록 하라”

우리가 아무리 하느님의 축복으로 온갖 풍요를 누린다 할지라도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한다면 그것은 다 헛것임을 가르치신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가르침은 병이 나았다 에서 끝맺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아닙니다. 병이 낫고 치유된 기쁨이 아니라 찬양의 차원까지 가야합니다. 사마리아 나병환자가 나병이 치유되고 새로운 삶을 누리기 시작했을 때 기뻐하며 즐거워했던 것에 멈추지 않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였던 것처럼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국 영화배우 멜 깁슨은 2004년 자신이 제작 감독한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로 많은 화재를 남겼습니다. 십자가에서 운명하시기까지 열두 시간 동안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난에 초점을 맞춘 영화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반유대주의를 조장한다는 이유로 유대인이 장악한 할리우드 영화사로부터 외면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굴하지 않고 사재 2천오백만 달러를 투입하여 이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얼마나 깊은 신앙입니까? 그래서 하느님이 축복하셨는지 이 영화는 대박을 터트려 무려 6억 천만 달러의 돈을 벌어드렸습니다. 사람들은 여기까지를 축복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아닙니다. 하느님은 이후의 축복을 원하십니다. 바로 하느님께 찬양을 드리는 축복입니다.

그런데 신문 보도에 의하면 그 돈으로 그가 가장먼저 한 일은 여의도의 두 배정도 되는 남태평양 피지의 마고섬을 개인 휴양지로 1천6백만 달러를 주고 샀다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이런 모습을 보면서 그는 탁월한 흥행사일 수는 있지만 하느님께 영광을 드린 배우는 될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참된 찬양, 나에게 주신 축복과 은혜를 기꺼이 이웃과 함께 나눔으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입니다. 주님이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자신을 바치신 것처럼, 우리도 이웃을 위해 나의 것을 나눌 수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 이것이 주님을 찬양하는 일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세속의 재물로라도 친구를 사귀어라. 그러면 재물이 없어질 때에 너희는 영접을 받을 것이다.”(루가16:9)

이 말씀은 우리에게 주신 재물과 재능을 나누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이 주신 재물과 재능을 나눔으로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이게 참된 감사입니다.

그 다음을 보십시오. 예수께 돌아왔다고 했습니다.

은혜가 은혜로 끝난다면 그것은 의미가 없는 은혜입니다. 참된 은혜, 그것은 삶의 변화에 있습니다. 변화가 없는 감사는 참된 감사가 될 수 없습니다.

추수감사절은 본래 수장절이라고 합니다. 창고에 결실을 쌓는다는 말입니다. 세상에 가라지를 창고에 쌓는 어리석은 사람은 없습니다. 농부가 결실을 거두어 알곡에 창고에 넣고, 쭉정이는 불에 태우는 것처럼 우리의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쭉정이는 뭐고 알곡은 무엇입니까? 양식이 되지 못하는 것이 쭉정이입니다. 이것을 성서는 육정이 빚어내는 열매라고 합니다. 육정이 빚어내는 것 양식이 될 수 없습니다. 육정은 욕심과 이기심에서 나옵니다. 바로 이 욕심과 이기심에서 음행, 우상숭배, 시기, 싸움, 분노가 나오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아무리 많은 축복을 받았다 할지라도 이런 삶을 버리지 못하고 여전히 욕심과 이기심 속에 살아간다면 이것은 참된 감사가 아닙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나병환자를 보십시오. 다른 나병환자들은 세상을 향해 갔지만 그는 은혜를 체험한 순간 예수님을 향해 발길을 돌렸습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아무리 축복을 소나기처럼 받아서 억만금을 헌금으로 바쳐도 바로 이 돌아섬이 없다면 그것은 참된 감사가 아닙니다.

바울로를 보십시오. 그가 육정에 사로잡혔을 때는 예수를 믿는 사람을 박해했습니다. 그러나 그 육정의 비늘이 벗겨졌을 때 그는 새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자신이 그토록 자랑했던 명예도 부귀도 권세도 다 쓰레기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예수님만을 자랑했습니다. 이제는 자신이 중심이 아니라 예수가 중심이 되었습니다. 이게 참된 감사입니다. 때문에 바울로는 성도들을 향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더욱 견고히 하여 넘치는 감사를 하느님께 드리라”고 했습니다. 참된 감사, 그것은 그리스도를 닮아 살아가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돌아서서 그리스도를 향하여 마음을 여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드릴 참된 감사입니다.

 

마지막으로 더 결정적인 행위를 보여줍니다. 주님의 발 앞에 엎드렸다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받은 은혜가 자신의 노력으로 이루어 놓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뜻대로, 의지대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자신이 받은 은혜가 하느님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마리아 나병환자처럼 자신이 받은 축복을 주님의 발아래 두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나에게 필요한 양식이 아니라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나에게 필요한 양식은 아무리 많아도 나눌 수 없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은 콩 한쪽도 나눌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물질과 재능은 나누어져야합니다. 나누어질 때 생명이고, 나눔은 사랑으로 표현이 됩니다. 때문에 주님은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서로 나누기를 원하십니다. 이게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입니다.

우리말에 “주고받는다.”라는 말은 있어도 “받고 준다.”는 말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받고 주는 것”은 죽게 하지만 “주고받는 것”은 생명을 주기 때문입니다.

신명기를 보면 “너희는 알곡을 저장하는 추수감사 축제를 올리면서 아들과 딸, 남종과 여종, 너희가 사는 성문 안에 있는 레위인, 떠돌이, 고아 과부들도 함께 즐기게 해야 한다” 고 하셨습니다.

알곡은 저장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나누라고 주신 것임을 알라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하면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너희 손으로 일하여 거두는 소출에 복을 내려 주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열매가 쌓이면 썩고 부패하고 냄새가 나지만 그 열매가 나누어지면 축복이 되고 생명이 되고 기쁨의 향기가 됩니다. 그러므로 발아래 두라는 말은 나누어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교회위위원회는 이번 추수감사절에는 교회공동체와 이웃과 함께 우리의 결실을 나누기로 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모 르겠습니다.

김지하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밥은 하늘입니다. 하늘을 혼자 못 가지듯이 밥은 서로 나눠 먹는 것. 밥은 하늘입니다.” 그렇습니다. 참된 감사 그것은 서로 나눠 먹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키는 추수감사는 올 한해도 많은 수확을 거두어들이게 하신 것을 감사하는 축제가 아닙니다. 하바국 예언서를 보십시오.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습니다.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없습니다. 외양간에 소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감사했습니다. 이스라엘의 감사축제는 추수할 곡식을 많이 주셨기 때문에 드리는 감사가 아닙니다. 더 많은 물질을 달라고 기원하는 축제가 아니라 이 모든 수확물은 하느님의 것임을 고백하는 감사의 축제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사마리아 나병환자처럼 주님을 찬양하며 주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할 수 있는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고 하신” 이 축복의 말씀이 우리 모두의 축복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멘.

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가 바라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주시나이다. 이제 우리에게

풍성한 은혜를 주시어 추수의 절기를 주셨사오니, 언제나 감사한 마음으로 주님을 찬양하게 하소서.

축문

해마다 추수의 절기를 주시어 은혜로 채워주시는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결실을 하느님께 감사하고, 이웃과 함께 나누며, 보다 충실히 사랑을 실천하게 하시나이다.

성체후 기도

땅에서 오곡백과 거두었으니 하느님께서 베푸신 축복이라 하셨나이다. 이제 우리가 하느님께 감사하고,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고 이웃을 서로 사랑하여 하느님 나라의 썩지 않을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은혜를 내려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