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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교회 9월 15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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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9월 1일 일본 도쿄 등 관동지역에 강도 7.9의 대지진이 발생해 9만여명이 사망하고 4만여명이 행방불명되는 참사가 일어나자 일본 내 민심은 극도로 흉흉해지고 사회 불안은 극심해졌습니다. 이에 일본 정부는 ‘조선인이 방화와 약탈, 폭동을 일삼는다’는 유언비어를 유포시킨 뒤 이를 빌미로 계엄령을 선포했습니다. 유언비어를 믿은 일본인들은 관동지역에 3,689개의 자경단을 조직해 무려 6,066명의 한국인을 학살했습니다. 일본 측 책자에도 2,534명이 학살된 것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일본인들은 한국인인지 분간하기 위해 일본어를 말하게 한 뒤 발음이 서툰 사람을 무조건 살해했다고 합니다.

일본인들에 의해서 자행된 끔찍한 일들에 관한 글을 읽게 되면 우리는 분노하고 일본인들을 증오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먼저 우리 안에 있는 증오와 두려움과 그 결과에 대해서 깊이 묵상함으로 제대로 바라보지 않는다면, 우리 안에 깊이 자리하고 있는 상처를 잊어버리고 치유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역사는 시대를 거쳐 계속해서 반복될 뿐입니다. 때로는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고, 때로는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위치의 변화는 있을 수 있지만 끔찍한 폭력과 상처는 치유되지 않고 계속해서 반복이 됩니다. 아니 오히려 더 큰 폭력과 문제로 돌아옵니다. 일본의 군국주의에 의해서 자행된 일들은 아직도 우리의 삶 한 가운데 있습니다. 잊혀진 상처는 치유될 수 없고 더 큰 문제로 날마다 우리에게 돌아옵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는 어두움과 약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것을 너무 크게 의식해서 스스로 무가치하다고 생각하는 무력감 속에 살아갑니다. 반면 어떤 이들은 자기 안에 있는 것들을 무시하고 그로 인해 생기는 더 큰 어두움을 외부의 약한 이들에게 전가시킵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러한 현상을 “희생양”이라고 표현합니다. 관동 대지진이 일어나자 많은 이들은 공포와 증오를 전가할 희생양이 필요했습니다. 설명할 수 없는 큰 고통 앞에서 그들은 스스로 그것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 책임을 지고 희생당할 존재가 필요했고, 일본사회에서 가장 약한 집단인 조선인들이 희생을 당했습니다. 오늘날 일어나는 많은 사회 문제들 역시 비슷한 과정을 통해 폭력으로 나타납니다. 9.11사건으로 인한 전쟁들… 정치권에서 계속 반복되는 이념논쟁… 매일 뉴스에 등장하는 끔찍한 범죄들… 학교에서 일어나는 많은 폭력문제들… 국가과 국가, 집단과 집단 그리고 개인과 개인 사이에 벌어지는 이 끔찍한 일들의 중심에는 두려움과 외로움 그리고 그로 인한 증오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본질을 바라보고 깊이 생각하지 않는 우리의 삶의 자세가 이러한 현상을 더 더욱 악화시킵니다. 

설교를 준비하며 오늘 성경의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의 시선을 깊이 묵상했습니다. 그들은 죄인들과 어울리는 예수님이 못마땅하기만 합니다. 예수님의 행동이 그들을 불편하게 하고 그들을 분노하게 하며, 그들의 증오를 표출하게 하였습니다.

그들의 시선은 판단하고 정죄하고 분리합니다. 많은 이들을 공포로 몰아가며 무력감 속에서 그들이 정한 사회질서(법)에 복종하게 합니다. 그러한 사회질서 안에서 죄인으로 또는 가치 없는 사람으로 낙인찍힌 이들은 무력감 속에 자신과 자신의 삶을 저주하며 살아갑니다. 이러한 사회에서 예수님은 새로운 시선으로 사람들을 바라보십니다. 모든 사람은 다 하느님의 자녀이며, 소중하고, 사랑받고 치유받아 완전함에 이르는 놀랍고도 유일한 존재라는 편견 없는 시선으로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 앞에서는 죄인도 없고, 성인도 없고, 모두가 다 하느님의 자녀일 뿐입니다. 예수님의 시선은 수용하고 용서하며 하나가 되게 합니다.

세상의 기준과 시선으로 볼 때, 한 마리의 양보다는 99마리의 양이 더 중요합니다. 더 중요한 것을 내버려 두고 덜 중요한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서는 일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기준과 시선으로 보면 99마리의 양처럼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도 중요합니다. 단 한사람의 영혼이 온 우주만큼 소중합니다. 예수님의 행동은 이러한 가치를 표현하시는 일입니다.

“너희가 정죄하고 희생시키는 저 한 영혼도 중요하다. 나는 그들을 결코 버리지도 포기하지도 않는다. 그들도 하느님의 자녀이며 하늘나라에 참여할 이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을 받아들이고 함께 잔치에 참여하며 기뻐하지 못하는 너희들은 스스로 자리를 박차고 하느님 나라를 나가게 되는 것이다. 이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너희 마음 속의 들보를 깨달아라. 너희의 분노 속에 있는 죄악을 깨달아 돌이켜야 한다. 교만의 자리에서 내려와 다시 하느님 앞에서 사랑을 배우라!”

여러 가지 이유로 잃어버린 한 영혼을 되찾을 때, 놀라운 잔치가 열립니다. 스스로 벗어날 수 없는 무력감 속에서 스스로를 저주하며 살아가는 한 생명이 변화되어 자신의 존귀함을 되찾고 하느님께서 지으시고 허락하신 자신의 본연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일이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회복시키신 일입니다. 이 잔치가 바로 구원의 잔치이며 축복의 잔치입니다.

많은 예언자들이 본 야훼의 날이 바로 이 잔치의 날입니다. 독사와 어린이가 장난을 치고, 사자와 어린양이 함께 놀며, 주님의 영이 모든 사람에게 내려 진정한 자유와 기쁨을 누리는 날이며, 각 사람 한 명 한 명으로 인해 하느님께서 기쁨을 못 이기시고 춤을 추시는 날입니다. 모든 억압과 재앙 그리고 고통에서 해방되는 해방의 날이며, 하느님의 통치가 완전하게 이루어지는 구원의 날입니다.

우리는 그 날을 소극적으로 가만히 앉아 기다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적극적으로 그 날을 바라보며 우리의 삶 가운데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며 하느님의 나라를 이 땅에 이루어가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하신 것처럼 우리들도 죄인들의 친구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 그들과 깊은 친교를 나누게 되기를 원합니다. 그로 인해 그들도 그리고 우리도 치유되고 회복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먼저 우리 자신 안에 있는 어둠과 상처를 주님 앞에 내어 놓아야 합니다. 내 안의 두려움과 증오를 바라보지 못하면 우리의 삶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우리의 어둠을 인정하고 하느님 앞에 겸손함으로 나아가는 일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배운 일들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성인이 되는 것은 자기가 죄인보다 낫다고 믿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도 그들 가운데 하나이고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자비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토마스 머튼)

오늘 말씀을 통해 모든 사람들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을 보게 되기를 바랍니다. 바로 “나”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의 음성을 듣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느님의 자비로 우리의 어둠 한 가운데 생명의 빛이 비추기를 소망합니다. 하느님의 자비로 우리의 깨어진 관계들이 회복되기를 기원합니다. 하느님의 자비로 하느님의 평화가, 하느님의 기쁨이 우리의 삶에 가득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