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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남의 기쁨(사순 2주일, 최도미닉 신부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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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 2주일)/ 창세12:1-4, 로마4:1-5,13-17, 요한3:1-17,

거듭남의 기쁨

 

농부가 열심히 일을 하면 당연히 얻는 축복이 있습니다. 바로 열매입니다. 이것은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실한 믿음에는 반드시 하느님이 주시는 축복의 선물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로를 빌립보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일어나는 축복의 선물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힘을 얻습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위안을 받습니까? 성령의 감화로 서로 사귀는 일이 있습니까? 서로 애정을 나누며 동정하고 있습니까?”

주님은 우리의 믿음을 통하여 힘을 주십니다. 격려해 주시고 위로해 주고 치유해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을 사랑으로 충만하게 해 주셔서 우리 모두를 사랑으로 서로 하나가 되게 해주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아버지의 영광을 확신하게 해 줍니다. 이것을 우리는 구원의 확신이라고 합니다. 만약에 우리가 이런 기쁨을 누리려면 니고데모의 한계를 극복해야 한다고 오늘 말씀은 우리를 가르쳐 주십니다.

 

희랍 신화를 보면 오만 때문에 신으로부터 저주를 받아 끝없는 굶주림과 갈증의 지옥에 떨어진 탄타로스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물을 마시려고 허리를 굽히면 물은 금새 땅 밑으로 빨려 들어가고, 또 과실을 따먹으려고 하면 바람에 날려서 높이 올라가 버립니다. 때문에 과실과 물을 눈앞에 두고도 영원히 먹지 못하고 굶주림과 갈증에 시달려야만 했습니다.

이 탄타로스는 오만함과 무지함 때문에 눈앞에 보이는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갈등하며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어쩌면 니고데모가 그런 사람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그는 예수에 대하여 알 만큼은 아는 사람이요, 그만한 신앙도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른 사람들이 예수를 만났을 때 느꼈던 그 어떤 기쁨도 변화도 맛보지 못했습니다.

사도 바울로는 예수를 만난 기쁨을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지금의 이 은총을 누리게 되었고 또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할 희망을 안고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기뻐하고 있다”(로마5:2)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런 기쁨이 있습니까? 우리는 왜 이런 기쁨이 없을까요? 왜 믿음 안에서 소망을 보지 못할까요? 왜 주님과 교제하는 깊은 감동을 느끼지 못하는 것일까요? 왜 고난과 역경 속에서 주님이 주시는 위로를 경험하지 못하고, 치유함을 얻지 못하는 것일까요? 왜 구원에 대한 확신이 서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거듭난 삶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니고데모를 통해 거듭난 삶에 이르는 길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첫째, 신앙은 지식이 아니라 마음으로 깨달아야 합니다.

신영복 교수님은 “인생의 가장 먼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이라고 했습니다. “냉철한 머리보다 따뜻한 가슴이 그만큼 더 어렵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가슴에서 다시 발까지 가는 것이야 말로 참 깨달음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니고데모는 예수님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보자 “선생님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요한3:2)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고백은 베드로와 똑같은 고백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이 고백을 했을 때처럼 주님은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주셨던 반석이라는 이름도, 하늘의 열쇠도 주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새로 나지 아니하면 아무도 하늘나라를 볼 수 없다” 고 말씀하셨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베드로와 니고데모는 어떤 차이가 있는 걸까요?

베드는 믿음으로 받아들였지만 니고데모는 지식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신앙은 지식이 아닙니다. 신앙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느껴야합니다. 때문에 바울로는 마음으로 깨달은 것을 입으로 고백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게 믿음입니다. 다시 말하면 마음으로 느끼고 그것을 다시 발까지 가야합니다. 자신이 느낀 바를 삶을 통해 실현해 가야 합니다. 이게 거듭난 삶입니다. 그런데 니고데모에게는 이런 삶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에 대하여 잘 알고 있습니다. 그분은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셨고 부활하셨다는 것을 다 압니다. 그런데 뭐가 문제입니까? 마음으로 확신하지 못하는 게 문제요, 그 믿음을 입으로 고백하지 못하는 게 문제입니다.

신앙은 예수님에 대하여 아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모습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로의 고백처럼 “주님은 내 안에 사시고, 나도 주님 안에 삽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합니다. 주님은 당신을 머리로 알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느끼고 입으로 고백하기를 원하십니다.

둘째, 떳떳하지 못한 삶은 버려야 합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를 찾아 왔을 때는 어둠 짙은 밤이었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이렇게 밤에 은밀하게 찾아온 사람은 없습니다. 유독 니고데모만이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이 말은 아직 니고데모는 어둠 속에 있다는 말입니다. 자신의 어두운 행실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때문에 주님은 니고데모에게는 “새로 나지 아니하면” 이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니고데모가 아직 어둠 속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혹시 예수를 믿고 있으면서 마음에 가책을 받을 만한 일들을 감추며 행동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자신의 어두운 행실을 버리지 못하고 지금 예수를 만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렇다면 그런 사람은 하늘나라를 볼 수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어느 때 어느 장소에서든지 주님의 자녀로서 떳떳해야 합니다.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고 사람들이 하느님을 찬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진리를 따라 사는 사람은 빛이 있는 데로 나간다.”라고 하셨습니다. 어둠 속에서 주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빛 속에서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셋째, 자기를 버려야 합니다.

니고데모가 몰래 예수를 만나고자 했던 것은 다른 사람, 특히 동료들의 눈을 인식해서 입니다. 그 당시 산해드린은 예수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만약 예수를 만나고 있다는 사실을 동료들이 안다면 지금 누리고 있는 지위와 명성과 신분이 위태로울 수 있습니다. 때문에 니고데모는 지금 자기가 누리고 있는 신분, 명예와 권세를 침해당하지 않는 선에서 예수를 만나고 싶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지금 우리의 모습인지 모르겠습니다. 내 시간, 내 기쁨이 먼저입니다. 이것이 침해 되지 않는 선에서 교회에 나오려합니다. 그 이상은 없습니까? 참으로 2% 부족한 믿음입니다.

 

지금 주님은 니고데모에게 거듭나라고 하신 것은 자기를 버려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나를 포기하지 않고, 내가 손해를 보지 않고 믿을 수 있는 믿음이란 없다는 말씀입니다.

베드로는 배와 그물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고향을 버려야 했고, 부모와 형제를 떠나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도 주님을 만나고 부터 세상이 주었던 부귀와 권세와 명예도 다 버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이 버리니까? 하느님은 다른 땅을 주셨습니다. 다른 민족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한번 있다가 사라질 축복이 아니라 함께 누릴 수 있는 영원한 축복을 내려 주신 것입니다.

주님을 말씀하십니다. 구리뱀이 모세의 손에 높이 들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높이 들려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겠다는 말씀입니다. 왜 죽으려 하셨습니까? 자신이 죽지 않는 한,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보라는 말은 내 자신이 죽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믿음이란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그리스도처럼 내 자신을 죽일 수 있는 믿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나라는 말은 죽으라는 말입니다. 죽지 않고 어떻게 거듭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니고데모는 버리지 않았습니다. 자기의 것을 다 누리면서 주님을 만나고 싶었던 것입니다. 버리지 않는 한 하늘나라의 기쁨은 없습니다. 이게 신앙입니다.

“주님을 믿는다.”라는 말은 나를 부정한다는 말이요, 내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겠다는 말합니다. 그런데 니고데모는 바로 이런 현실 앞에 주저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자신을 버리는 것에 대하여 주저하지 마십시오. 주저하는 자에게 독생자의 영광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넷째, 변화하라는 말입니다.

변화한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저는 오징어젓을 좋아합니다. 젓이 되려면 변화해야 합니다. 그런데 변화에는 썩는 것이 있고, 발효하는 게 있습니다. 주님은 변화하되 썩는 변화가 아니라 맛을 내는 발효가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썩지 않고 발효가 되려면 적당한 소금이 필요합니다. 이처럼 우리의 삶이 변화되려면 “물과 성령”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무엇으로 회개합니까? 무엇으로 변화합니까? 바로 말씀과 기도입니다. 변화하되 내 성질대로 변화해서야 되겠습니까? 세상이 요구하는 대로, 내 성질대로 변화하는 것은 발효가 아니라 썩는 것입니다. 발효를 위해 소금이 필요하듯이 우리의 삶이 변화되려면 말씀과 기도 안에 잠겨야합니다.

 

사도 바울로는 에페소에서 성령의 칼은 곧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라는 말은 하느님의 말씀과 기도를 의지해서 변화하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니고데모는 주님이 변화하라는 말에 이렇게 말합니다. “다 자란 사람이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까?” 몰라서 이렇게 대답했을까요? 아닙니다. 니고데모는 변화되기를 거부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아무리 성경을 읽고, 아무리 미사에 참석해도 우리의 삶이 변화되지 않는 다면, 우리의 삶이 세상 쪽으로 향해 가고 있다면 주께서 아무리 은총을 내려 주고 싶어도 줄 수가 없습니다.

초대교회에 처음 성령이 내렸을 때 “사람들은 술 취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변화되었다는 말입니다. 너무나 엄청나게 변해서 사람들은 마치 술에 취한 사람들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을 시작하기 전이나 신앙생활을 시작한 후나, 신앙의 연륜이 깊어져도 내 삶에 변화가 없다면 그 신앙은 죽은 신앙입니다. 차라리 차든지 뜨겁든지 해야 합니다. 미지근한 것은 뱉어버리겠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말씀과 기도에 안에서 자신의 삶을 변화시켜 가야한다는 말씀입니다. 지금 내 삶이 변화되고 있습니까? 말씀과 기도 속에서 주님을 찾고, 주님을 닮아 조금씩 변화해야 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성화의 과정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성도의 삶은 성화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이 말씀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 충격에서 그는 참된 길을 발견합니다. 결국 니고데모는 자신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지신의 명예와 지위를 지키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변화된 모습으로 아리마태 요셉과 함께 예수님의 시신을 모셔 장례를 치르는 영광을 얻게 됩니다.

 

우리는 더 이상 탄다로스와 같은 신앙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영광과 은혜를 눈앞에 두고도 얻지 못하는 탄타로스가 아니라 내 오만과 욕심을 내려놓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서 마침내 하늘의 영광을 차지한 니고데모와 같은 믿음을 통해 부활 승리하시는 믿음의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