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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종교, 하느님과 동행하는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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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독한 종교, 하느님과 동행하는 신앙

사도 19:1~8 / 시편 68:1~6 / 요한 16:29~33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하나이다. 아멘.

종교는 고독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죽음이라는 한계 상황을 홀로서 맞이하는 인간의 고독은 모든 철학과 종교의 어머니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자신이 시작한 원천에 관하여 물으면서 철학적인 질문을 만들었고, 자기 인생의 마지막 종점에 대한 깊은 성찰과 명상 속에서 종교의 질문을 만들었는지도 모릅니다. 그 시작이 무엇이든, 그 마지막이 어떻든, 한 인간은 본질적인 의미에서 고독한 존재입니다. 이 고독한 인간을 대하는 여러 종교의 태도와 대답은 저마다 다양합니다.

불교는 ‘천상천하유아독존’을 말합니다. 인간의 고독에 관한 뛰어난 통찰입니다. 하늘 아래 땅 위에 오로지 ‘나’만이 존재한다고 합니다. 이때 ‘나’는 한 개인의 ‘나’가 아닙니다. 내가 있어 우주가 있고, 모든 우주가 바로 내 안에 있다는 말입니다. 세상과 우주 전체가 바로 ‘나’인 것을 깨달으라고 초대합니다.

유대교와 이슬람교는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 앞에 홀로 선 인간을 말합니다. 그 인간을 부르신 하느님을 깊이 생각하고, 그 하느님께서 주신 말씀과 계명에 따라 사는 일이 인간의 길이라고 가르칩니다. 인간의 길 앞에 먼저 하느님의 길이 있습니다. 이렇게 주어진 길을 따르면 만사형통하리라는 믿음이 그 안에 들어 있습니다. 다른 길은 없다고 단언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교는 이 고독에 대해서 어떻게 말할까요? 불교와 유대교와 이슬람교가 ‘정적’이고 사변적이라면, 다시 말해서 고독 그 자체를 깊이 파고 들어간다면, 그리스도교는 애초부터 ‘동적’이고 실천적인 면이 강합니다.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은 우리에게 ‘오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은 우리 삶에 ‘관여’하고, 우리 생각에 ‘도전’하고, 우리 삶에 ‘변화’를 가져오고, 우리 삶 속에서 ‘만나시는’ 하느님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믿는 하느님은 우리와 ‘동행’하는 하느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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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은 요한복음에는 고독의 그림자가 짙습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을 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외롭지 않습니다. 하느님이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제자들도 결국에는 고난을 겪을 것입니다. 그러나 희망을 버릴 일은 아닙니다. 그 고난의 세상을 예수님께서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고난을 아시는 예수님, 고난을 겪으신 예수님, 고난을 이기신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동행’하시는 하느님입니다.

그런데 어쩌면 이 동행하시는 하느님은 우리가 진정으로 고독할 때 찾아오시는 분인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가졌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 안에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 친구들이 많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 안에 하느님의 자리는 좁기만 합니다. 스스로 만족하고 하느님 없이 적당히 살다가 어떤 어려움을 당할 때, 배신을 당할 때, 사람은 쉬이 외로움을 느낍니다. 이때 우리는 대부분 허기진 배를 채우듯이, 지금까지 차 있었던 공간을 그 모양 그대로 채울 대체물을 찾습니다. 종교의 신이 그런 대체물이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그 대체물로 찾는 신은 지금까지 자신을 채웠던 어떤 것이지, 참 하느님은 아닙니다. 이미 내 안에 하느님의 자리는 좁아졌기에 크신 하느님을 모실 수 없습니다.

내 필요에 따라, 내 상황에 따라 찾았다가 다시 버리는 신은 참 하느님이 아닙니다. 내 모든 생활을 만족스럽게 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이 생활하게 된 것만도 천만다행이라며 고맙다고 기도드리는 신은 참 하느님이 아닙니다. 아니, 다른 종교의 신은 될지언정, 예수님께서 몸소 모시고 가르치시며 사셨던 하느님은 아닙니다.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은 우리가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못났다면 못난 대로, 실패했다면 실패한 대로, 기뻐한다면 기뻐하는 대로, 행복하다면 행복한 대로, 우리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이시며, 우리 숨을 드나드는 호흡처럼, 우리 몸에 흐르는 피처럼 그렇게 우리와 동행하는 하느님입니다.

이 점에서 보면, 그리스도교는 고독을 해결하기 위한 종교가 아닙니다. 오히려 하느님과 동행하려고 고독해지려는 종교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다가 따돌림당하는 종교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실현을 외치고 몸소 실현하려다가 오해를 받고 욕을 먹고 비난받는 종교입니다. 진실과 정의를 위해 따지고 밝히고 선포하다가 문제아라고 손가락질받는 종교입니다. 이렇게 따돌림당하고 욕을 먹고 손가락질당하며 박해받는 순간에 하느님께서 우리와 동행한다고 믿는 종교입니다. 바로 그 고독 속에서라야, 나 자신이 텅 비어 있을 때라야, 동행하시는 하느님 전체가 내 삶 전체와 동행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하느님의 진실을 외치다가, 하느님의 정의를 실현하다가 오해받고, 욕먹고 따돌림받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인지도 모릅니다. 아니, 그런 공동체여야 합니다. 교회는 이렇게 ‘세상이 말하는 성공의 기준, 행복의 기준’에서 벗어나 스스로 고독한 이들을 다독이고, 그 안에 동행하시는 하느님을 서로 발견하고 격려하는 공동체입니다. 이런 교회 공동체를 통해서라야 하느님을 깊이 생각하고 마음에 모신 사람들의 말과 행동이 이 세상에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이런 고독한 이들이 서로 격려하고 격려받는 공동체를 통해서라야, 세상에 하느님의 진리, 하느님의 정의, 하느님의 나라가 그 숨을 놓지 않고 사람들에게 스며들며 끈질기게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이 교회는 작을 수도 있습니다. 이 교회를 이루는 사람은 소수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인들이 진정으로 고독할 때라야, 동행하시는 하느님을 알고, 정의롭게 고독한 다른 사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고독할 때라야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기셨듯이, 우리도 진정 이 세상을 이길 것입니다.

정의를 위해 일하며 고독해져야 합니다. 평화를 위해 일하며 고독해져야 합니다. 사랑을 위해 일하며 고독해져야 합니다.

그 고독 속에서, 세상을 이기시는 삼위일체 하느님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출처] via media 주낙현 신부의 성공회 이야기 http://viamedia.or.kr/2014/06/02/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