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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자들아 나에게 오라(연중 14주일, 최도미닉 신부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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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14주)/ 즈가9:9-12, 로마7:15-15, 마태11:16-19,25-30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자들아 나에게 오라

한국의 헬렌 켈러라고 하는 송명희 시인은 “자신의 장애는 죽고 싶을 정도로 자신이 견디기 힘든 짐”이었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 짐을 내려놓고 나니 오히려 그 장애는 축복이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쓴 시가 바로 “나”입니다.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않으나, 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 나 남이 못 본 것을 보았고 남이 보지 못한 음성 들었고,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이처럼 사람은 누구나 질 수 밖에 없는 인생의 짐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짐이 때로는 우리의 삶을 무겁게 짓누르는 무거운 짐이지만, 그 짐을 내려놓으면 축복이 되기도 합니다.

 

살다 보면 우리를 무겁게 하는 짐이 얼마나 많습니까? 병이 들어 아프니 그것이 짐이요, 바라던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니 짐이고,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을 하니 짐이고, 하던 일이 실패하니 그것이 짐입니다. 그런데 짐 중에 가장 무거운 짐은 아무래도 죽음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때문에 인생은 고행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런 어려움이 어디 개인만 있겠습니까? 우리가 사는 세상도, 국가에도 있게 마련입니다.

 

지금 우리는 엄청난 시련을 겪고 있지 않습니까? 세월호 사건 이후로 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 깊은 병은 우리 모두를 힘들게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무거운 짐을 어떻게 풀어야할지 모두들 갈팡질팡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주님은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자들아 다 나에게 오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빈말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정말 우리를 편히 쉬게 하시고 싶어서, 평화를 주고 싶어서 하신 말씀입니다.

오늘 제1독서, 제2독서의 말씀은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고 있는 국가와 개인을 향해 “나에게 오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 하신 말씀입니다.

 

“사로잡힌 너희를 물 없는 굴에서 건져 내리라”(즈가9:11) 하십니다. 물 없는 굴 상상해보십시오. 깜깜한 어둠도 힘든데 물까지 없으니 이것이야말로 업친데 덮친 격입니다. 이것이 지금 이스라엘이 겪고 있는 무거운 짐입니다. 이런 고통 속에 허덕이는 이스라엘을, 나라를 잃고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겠다는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육체의 법 앞에서 꼼짝 못하고 있는 인간, 그래서 “비참한 인간”이라고 선언 할 수밖에 없는 나를 그 무거운 육체의 법에서 해방시켜 주십니다.

 

“누가 이 육체의 죽음에서 나를 구해 줄 것입니까? 고맙게도 하느님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구해 주십니다.”

 

이 선언은 그냥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실 은총의 선언입니다. 그것이 국가가 되었던, 가정이 되었던, 직장이 되었던, 내가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이웃이 되었던, 아니면 개인이 되었던 주님은 우리가 질 수 밖에 없는 무거운 짐을 풀어주십니다. 이게 믿음이 주는 축복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이란 딴 게 아닙니다. 주님이 나에게 주기를 원하시는 이 축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우리를 짓누르는 인생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 세 가지 원칙을 주셨습니다. 이렇게만 하십시오. 무거운 사슬을 끓어 버릴 수 있습니다. 해방 될 수 있습니다. 치유될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행복할 수 있습니다.

 

먼저 주님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라고 하셨습니다.

성서의 큰 주제가 있습니다. 주님이 나를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이 부르심을 듣고 그분께로 가는 것이 모든 축복의 첫걸음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당신을 만날 수 있는 세 가지 보물을 주셨는데, 그것은 말씀과 기도와 바로 이 성전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아버지,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 라고 하셨습니다.

 

왜, 똑똑한 자는 안 될까요? 왜 철들은 어린아이가 아니라 철부지 어린아이라고 하셨을까요? 철이 들고, 똑똑해지면 자기주장이 강해지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말씀과 기도, 성전이 없어도 얼마든지 주님을 만날 수 있다고, 얼마든지 행복하고, 축복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닙니다. 이것을 통하지 않고는 주님을 만날 길이 없습니다.

나만 장군은 문둥병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고 산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수가 있었습니까? 요르단 강에서 7번 목욕을 했기 때입니다.

여러분 이 요르단 강은 어디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요르단 강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이스라엘에 가면 있습니까? 아닙니다. 바로 주님이 주시는 세 가지 보물입니다. 말씀과 기도, 그리고 이 성전이 요르단 강입니다.

 

시편 1편을 보십시오. “야훼께서 주신 법을 낙으로 삼아 밤낮으로 그 법을 되새기는 사람, 그에게 안 될 일이 무엇이랴! 냇가에 심어진 나무 같아서 그 잎사귀가 시들지 아니하고 제 철 따라 열매 맺으리!”

말씀과 기도가 주는 축복이 얼마나 놀랍고 큰지 시편기자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말씀과 기도는 하느님이 주시는 축복의 젖줄입니다.

 

그리고 이 성전은 주님의 눈과 마음이 있는 곳입니다. 천국의 열쇠가 있는 곳입니다. 여기서 풀면 하늘에서 풀리고 여기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입니다. 그러므로 한나처럼 이 성전에 머물며 기도하십시오. 주님은 성전에서 기도하던 한나의 아픔을 들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 교인들이 이 성전을 이용하지 않습니다.

 

다윗처럼 “주님 전 계신 곳 어찌 이리 아름다운지요, 세상에서 천일을 사는 것보다 주님 전에 하루를 머무는 것이 나에게는 더 큰 기쁨입니다!” 라고 노래하며 이 성전을 사모해 보십시오. 하느님의 이끄심과 치유하심이 늘 다윗처럼 임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저를 포함해서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우리 모두에게 애원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나에게 오라는 말씀입니다. 지금 뭐가 뭔지 몰라도 좋습니다. 깨달음이 없어도 좋습니다. 일곱 번 목욕을 하다보면 그 진리를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어린아이처럼 믿고 따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안타까운 사람이 있습니다. 무거운 짐을 지고 자기 고집대로, 유다처럼 주님을 떠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세상이 덜어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이런 사람은 결국 주님께로부터 아무것도 받을 수 없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합니다.

두 번째로 주님은 “내 멍에를 메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멍에”, 우리의 영혼에 안식을 주고, 우리의 인생에 평화를 주는 멍에, 곧 예수님의 마음, 예수님의 인격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우선 온유한 마음을 품어보십시오.

온유한 마음, 사랑의 마음입니다. 내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남을 굴복시키려는 강하고 딱딱한 마음이 아니라 내 자신을 내려놓고 상대방을 보는 부드러운 마음, 배려하는 마음입니다. 더 많은 것을 움켜쥐려는 욕심이 아니라, 기꺼이 내 것을 나눌 수 있는 사랑의 마음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의 아내를 선택하기 위해 고향으로 종을 보냈습니다. 종은 어떻게 색시감을 고를 것인지 참으로 난감한 일이었습니다. 종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이제 저 마을로 들어가서 물을 달라고 청하겠습니다. 그래서 나에게 물을 주고 낙타에게도 물을 주는 사람을 이삭의 색시 감으로 삼겠습니다.”

 

여기서 어떤 마음이 느껴지십니까? 하느님의 축복을 받을 마음이 느껴지십니까?

세상 사람들은 무엇을 보고 판단하겠습니까? 솔직하게 가문이나 미모를 보지 않겠습니까? 그가 갖고 있는 지식, 재물은 얼마나 갖고 있는지 봐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런 마음이 우리를 얼마나 무겁게 하고, 어둡게 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물을 달라고 청했을 때 나에게 뿐만 아니라 낙타에게 물을 주는 처녀의 마음” 우리가 찾아야할 마음입니다. 여러분은 이 마음이 보이십니까? 바로 온유한 마음입니다.

비록 이방인이지만 목마른 나그네에게 물 한잔 건넬 수 있는 마음, 청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하찮은 낙타까지도 볼 수 있는 배려하는 마음, 바로 이런 마음이 온유한 마음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이런 마음을 갖게 되기를 원십니다. 이런 마음이 우리의 무거운 짐을 가볍게 합니다.

 

또 하나가 있지요. 바로 겸손한 마음입니다.

“이 시대를 무엇에 비길 수 있으랴? 마치 장터에서 아이들이 편 갈라 앉아 서로 소리 지르며 ‘우리가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을 추지 않았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았다’하며 노는 것과 같구나.”

정말 놀고 있지요. 도무지 남의 이야기는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남의 입장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피를 불면 춤을 춰야하고, 내가 곡을 하면 가슴을 쳐야지 왜 안치는 거야? 라고 합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무엇을 상실했나요. 겸손을 상실했습니다. 내 주장만 말하지 남의 입장은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되면 소통이 되지 않습니다.

정말 이 시대를 보는 것 같습니다. 어느 누구도 입장을 바꾸어서 생각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왜 내 뜻대로 하지 않는 거야!”라고 하는 사람은 많아도, “네가 그 상황에서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겠구나!”라고 이해해 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정치가 그렇습니다. 교육이 그렇습니다. 노사가 그렇습니다. 왜 이렇게 갈등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서로 배려하는 마음이 있다면 금방 그 해결점을 찾을 수 있는데 너무나 먼 길을 돌고 있습니다. 저는 종교가 이 역할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모두가 좀 겸손해 졌으면 합니다.

 

우리는 서로가 좀 더 넓은 마음을 가졌으면 합니다. 그게 개인이 되었던 아니면 국가가 되었던 자기의 뜻이 관철될 때까지 싸우겠다면 멍에만 점점 무거워 집니다.

대통령이 통일 대박이라 했습니다. 정말 대박을 만들려면 유연해야 합니다. 배려해야 합니다. 이렇게 할 수만 있다면 남과 북이 갖고 있는 그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수 있을 것입니다.

 

3초의 여유란 글이 있습니다. “엘리베이터를 타서 ‘닫기’를 누르기 전에 3초만 기다리자. 지금 누군가가 급하게 오고 있을지도 모른다. 친구와 헤어질 때 고개를 돌리지 말고 3초만 더 바라보자. 혹시 녀석이 가다가 뒤돌아봤을 때 웃어 줄 수 있도록. 그녀가 화가 나서 소나기처럼 퍼부어도 3초만 미소 짓고 들어주자. 그녀가 저녁엔 넉넉한 웃음으로 한 잔 술을 부어 줄지 모른다.”

우리가 좀 더 다른 사람에 대하여 온유하고 배려할 수 있는 겸손이 있다면 내 인생의 짐이 얼마나 가벼워질까? 지금 이 세상이 겪고 있는 이 고통과 아픔이 얼마나 가벼워질까? 내 가정이 얼마나 행복할까? 생각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주님은 “내 멍에”를 메는 것으로 이루었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그 다음 말씀이 중요합니다. “나에게서 배워라.”고 하십니다.

정말 배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평생 배워야 합니다. 공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덕을 좋아하되 배움을 좋아하지 않으면 그 페단은 사람들에게 우롱당하는 것이고, .. 강함을 좋아하되 배움을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단은 망령되게 행동하는 것이다.”(논어중에서)

아무리 뜻이 좋아도 배우지 않으면 안된다는 말입니다. 집안을 치웠으면 이제 그 집안을 채워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쫓은 마귀는 더 흉악한 마귀 일곱을 데리고 옵니다. 이처럼 우리는 죽을 때까지 배워야 합니다.

 

지금 우리 성공회의 문제가 뭘까요? 다 좋습니다. 그런데 배우려 하지 않습니다. 잔치를 벌려놓고 아무리 초청해도 오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멍에를 벗고 싶다면 이제 배워야 합니다.

 

이제 마무리 하겠습니다. 지금 내 가정에, 내 마음에 무거운 짐이 있습니까? “누가 이 죽음의 육체에서 나를 구해주실 것입니까?” 오직 예수 이십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보여주신 이 십자가의 사랑을 철부지 어린아이처럼 믿고 신뢰하고 그대로 실천해 가십시오. 그리고 내 자신의 십자가의 진리로 단련시켜 보십시오. 정말 놀라운 축복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이 축복의 선물을 우리 모두가 누리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