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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로를 넘어 은총으로 가는 신앙(연중 30주일, 최도미닉 신부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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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0. 27(연중30주) / 요엘2:12-13, 3:1-5, 2디모4:6-8,16-18, 루가18:9-14

    공로를 넘어 은총으로 가는 신앙

 

사람은 누구나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욕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 다는 것은 참으로 좋은 일이요 기쁜 일입니다. 저도 가끔 “신부님, 설교 은혜 받았습니다.”하면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정말 이런 칭찬은 참으로 큰 힘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로 부터 인정받고 존경 받는 일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하느님으로 부터 인정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은혜는 그 중심에 하느님이 계십니다. 이런 사람은 기도할 때도 선행을 할 때도 언제나 하느님께 영광을 드립니다. 때문에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 손이 몰라도 기쁨이 넘칩니다. 남을 의식하기 보다는 하느님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공로는 그 중심에 자신이 있습니다. 내가 인정받으려 하고, 내가 존경받으려 합니다. 때문에 하느님보다는 사람에게 인정을 받으려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이 다 내 마음 같지 않습니다. 나는 인정받고 싶고, 칭찬받고 싶은데 때로는 냉냉한 반응이 오기도 하고, 질투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때문에 좋을 일을 하고도 낙심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합니다. 때문에 은총은 한결같지만 공로신앙은 상황이 좋을 때는 문제가 없겠지만 상황이 나빠지면 곧 시험에 빠지게 됩니다. 때문에 바른 믿음은 사람들로 부터 존경을 받기 보다는 하느님께 인정받은 믿음이되야 합니다. 그렇다면 공로신앙을 넘어 은총의 세계로 갈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바리사이파 사람과 세리가 성전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성전을 향하고 있는 바리사이파 사람의 믿음은 참은 놀랄만한 믿음이었습니다. 그들은 열심히 기도했고, 경건했으며 안식일과 십일조 규정도 철저하게 지켰습니다. 이정도면 누가 봐도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고 인정 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믿음이 좋은 사람으로 인정해 주지 않으셨습니다.

아무리 맛이 있는 음식이라도 변질 되면 그 음식은 오히려 해가 되는 것처럼 아무리 열심과 열정을 갖고 신실한 신앙생활을 한다 할지라도 그 믿음을 변질시키는 독이 있습니다. 이 독을 피해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주님으로부터 “올바른 믿음”이라고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주님께 인정받는 믿음의 길, 은총으로 가는 길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선 그들은 “자기네만 옳은 줄 믿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저는 다른 사람과는 달리 욕심이 많거나 부정직하거나 음탕하지 않습니다.”

정말 믿음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은 욕심이 없어야 하고, 부정직하거나 음탕하지 말아야 합니다. 신앙을 갖고 산다고 하면서 욕심이 많거나, 정직하지 못하거나, 음탕하다면 그런 믿음은 병든 믿음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정직했습니다. 욕심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음탕하지도 않았습니다. 얼마나 신실한 믿음입니까? 얼마나 존경받을 만한 믿음입니까? 그런데 이런 믿음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이들을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해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자네만 옳은 줄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믿음만이 정당하고 다른 사람의 믿음은 잘못되었다고 정죄하였습니다. 이게 문제였습니다.

 

사도바울이 에페소에 있을 때 고린도교회가 분열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바울로파라고 했고, 또 어떤 사람은 아폴로파라고 했고, 또 어떤 사람은 베드로파 혹은 그리스도파라고 했습니다. 아마 각자가 받은 은혜가 달랐던 것 같습니다. 아마 아폴로파는 말씀의 감동을 주장했을 것이고, 베드로파는 교회의 전통을 주장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파는 성령 체험을 중시했을 것이고, 바울로파는 열려진 신앙을 중시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모두가 자기가 받은 은혜만이 그리스도가 주신 은혜라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때문에 다른 사람의 신앙에 대하여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되니까 교회 안에 분열이 일어난 것입니다. 자기만 옳다고 여겼던 강한 신앙의 확신들이 오히려 주님의 빛을 가리는 격이 되고 만 것입니다.

자기만이 옳다고 믿는 것만큼 공동체에 해가 되는 것은 없습니다. 교회 일을 하면서 가장 위험한 것은 내가 하는 일만이 가장 중요하고 다른 일은 하찮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누가 봐도 바리사이파 사람의 믿음이 훌륭합니다. 그러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보기에는 비록 유치한 모습이지만 그래도 세리의 믿음도 귀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한번은 주일학교 한 어린이가 물었습니다.

신부님,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주무시나요. 힘들게?“

얼마나 어이가 없습니까?

그러나 그런 물음조차 존경해야 합니다. 그래서 말했습니다. “글세, 나도 모르겠는걸, 네가 예수님께 여쭈어 보고 나에게 말해줄래”

얼마 후 어린이가 찾아왔습니다.

“신부님,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에서 주무시는 줄 알았습니다. 그건 너무 졸려서 그런거예요. 나도 졸리면 아무데서나 자거든요!”

 

그렇습니다. 그 표현이 유치할지 모르지만 그 어린이의 마음에는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너무나 피곤해 하시는 예수님으로 보았던 것 아닐까요. 내 말이 옳다면 남의 말도 옳다고 여길 수 있는 열려진 마음이 필요합니다. 내 입장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처지에서 볼 수 있는 열려진 마음만이 하느님께 인정받을 수 있는 신앙으로 우리를 인도해 줍니다.

 

다음으로 “남을 업신여기는 사람”이라 고했습니다.

두 사람이 성전으로 향해 갑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세리였습니다. 그는 감히 하늘을 우러러 보지 못했습니다. 사실 세리는 사람들에게 많은 세금을 거두어 아픔을 준 사람입니다. 때문에 미움을 사기도 하고, 죄인으로 낙인찍힌 사람입니다.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성전을 찾아와 저 구석에서 머리를 들지 못하고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반면에 바리사이파 사람은 보라는 듯이 서서 기도하였습니다. 이렇게 당당하게 기도하는 모습은 참으로 칭찬할 만한 일입니다. 또 “저는 욕심이 많거나 부정직하거나 음탕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고, 일주일에 두 번씩 단식하고 수입의 십분의 일을 바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믿음은 우리가 본받아야할 믿음이요, 존경할 만한 믿음입니다.

 

그런데 외적으로 보면 조금도 탓할 것이 없는 이 바리사이파 사람을 주님은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으셨습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는 마음입니다.

아마 이 바리사이파 사람은 세리를 보는 순간 “나쁜 놈, 죄인인 주제에 이 거룩한 성전에 나오다니”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편견을 갖고 내 생각이라는 잣대로 남을 보고 판단하게 되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사람을 정죄하게 되고 무시하게 됩니다. 바로 이런 마음은 이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영광을 가리는 장애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울로는 우리가 천사의 말을 하고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을 가졌다 할지라도, 내 재산을 전부 남에게 나누어주고, 남을 위하여 불속에 뛰어든다 하더라도 교만하거나 남을 업신여긴다면 그것은 울리는 징과 요란한 괭가리에 불과다고 했습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신앙의 행위라 할지라도 남을 업신여긴다면 그 아름다운 행위는 드러나지 않고 추하게 됩니다.

특히 선행을 할 때는 더욱더 그렇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나그네를 맞이하다가 천사를 맞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기회가 된다면 선행을 행해야 합니다. 그러나 선행을 베풀 때는 그 빛을 가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김혜자 씨의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는 책을 보면 이런 간증이 있습니다.

“아프리카에 갈 때마다 듣는 주의 사항은 아이들을 껴안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이들을 만지고 나면 얼른 손을 씻어야 합니다. 병균이 옮길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안기는 걸 좋아합니다. 나 또한 그 앙상한 아이들을 안을 때 슬프고도 행복합니다.”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그래 바로 이런 모습이 하느님께 인정받는 선행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내 입장에서 아이들을 보았다면 어떻게 그 더럽고 추한 아이들을 안아줄 수 있겠습니까? 더러운 아이들, 병균이 득실거리는 아이들이라는 편견을 가졌다면 어떻게 안아 줄 수가 있었겠습니까? 내가 아니라 아이들 입장에 설 수 있을 때 그 아이를 안을 수 있고, 미라처럼 비쩍 마르 냄새나는 아이들 안고 기뻐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이 말이 가슴에 다가옵니다. “슬프고도 행복합니다.” 아마 김혜자씨의 슬픔은 가난하다는 이유로 굶주리고 병들어 죽어가야 하는 슬픈 현실입니다. 그렇지만 지금 이 죽고 병들고 굶주리고 죽어가는 이 아이들을 주님의 사랑으로 안을 수 있는 사랑이 행복한 것이 아니겠습니다.

남을 도울 때 내 입장이 아니라 언제나 그 사람 입장에서 도와야 합니다. 아주 겸손하게, 이 도움을 받는 사람이 내가 주는 도움을 받으면서 혹시 마음에 상처는 입지 않을까 조심조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나를 도우셨을 때 그렇게 도우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살과 피를 주면서 이들이 이 음식을 먹고도 “회개하고 선한 사람이 되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이렇게 생각하면서 주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분명히 아셨습니다. 내가 이 거룩한 음식을 먹고도 또 배반하게 될 것을 아셨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자꾸 주셨습니다. 이게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베푸신 사랑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우리의 신앙이 위대하고 놀랍다 하더라도 그것이 내 자랑거리가 되거나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다른 사람을 무시한다면 그 믿음은 사람으로부터는 인정받을지는 몰라도 하느님은 인정해 주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인정받은 믿음이 되야 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주님은 자신을 변화시키기는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세리는 자기의 가슴을 쳤습니다. 남을 보기에 앞서 자신을 본 것입니다. 이는 자신의 공로를 당당하게 자신했던 바리사이파 사람에게서는 찾아 볼 수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감히 하늘을 쳐다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는 자기의 가슴을 치며 “오, 하느님! 죄 많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기도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나는 훌륭하게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정의의 월계관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이 바울의 고백과 바리사이파 사람의 당당함과 다른 점이 뭐냐고 물을지 모릅니다. 같은 말처럼 들리지만 전혀 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전자는 겸손한자의 고백이요, 후자는 교만한자의 자랑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그 신앙의 열매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이 재판정에 섰을 때 그를 따랐던 사람들이 다 그를 떠났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했나요. 자신을 버리고 떠난 그들을 정죄하거나 업신여겼나요. 아닙니다. 엄한 벌을 받지 않도록 기도하지 않습니까? 바로 이것입니다. 비록 내가 원하던 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할지라도 남을 미워하거나 정죄하지 않는 마음이 참된 마음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런 마음을 간직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세리처럼 남이 변화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변화시켜 가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만이 비록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할지라도 남을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믿음이 하느님으로부터 의롭다 함을 인정받을 수 있는 믿음이 될 수 있습니다.

얼마 전 한 교우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신부님, 미사를 드리면서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노래할 때마다 주체할 수 없는 감동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동감하는 말입니다. 세리처럼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고백하십시오. 이 보다 아름다운 기도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의롭다함을 인정받는 믿음, 그것은 바로 세리처럼 심장을 찢고 주님 앞에 내 죄를 겸손하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렇게 주님 앞에 설 수 있는 믿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믿음이 될 때 오늘 요엘의 말씀처럼 주님은 당신의 영을 부어주시고, 꿈을 꾸게 하고, 환상을 보게 하고, 예언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은총을 우리 모두가 누릴 수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