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말씀과 신앙나눔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가 되어(대림 2주일, 최도미닉 신부 말씀)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가 되어(대림 2주일, 최도미닉 신부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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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2주일)/이사11:1-10, 로마15:4-13, 먀태3:1-12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가 되어

모든 종교는 나름대로의 소리를 갖고 있습니다. 이 소리로 잠자고 있는 영혼, 어두운 이 세상을 깨우는 것입니다.

경주에게 가면 성덕대왕 신종이란 종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는 에밀레종이란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종입니다.

이 종에는 애틋한 전설이 있습니다. 신라 경덕왕은 아버지 성덕왕을 기리기 위해 종을 만들게 했습니다. 그래서 종을 만드는 사람은 있는 힘을 다해 정말 아름다운 종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종을 쳐보니 그것은 자신이 원하는 종소리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녹여 또 만들고 또 만들어 보았지만 여전히 종소리는 탁한 소리만 날뿐이었습니다.

 

하루는 기도를 하고 있는데 신령이 나타나 때 묻지 않은 어린 아기를 종을 만들 때 쇳물에 넣으라고 알려주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정말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있는 종이 되어 사람의 영혼을 깨워 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디서 아기를 구한단 말입니까? 그런데 신령은 막 아기를 낳은 가난한 부부가 있다고 알려주었습니다. 그는 부부를 찾아가 이 세상을 맑고 아름답게 만들 수 있는 종을 만드는데 아기를 쇳물에 넣어야 하는데 신령님을 당신의 아기를 넣어야 한다고 일러주었다는 꿈 이야기를 했습니다. 두 부부는 애간장이 끊어지는 아픔을 안고 아기를 내어주었습니다. 그래서 종을 만드는 사람은 막 태어난 아기를 쇳물에 넣었습니다.

마침내 종이 만들어 졌는데 그 소리가 얼마나 아름답고 구슬픈지 마치 아기가 어미를 부르는 소리 같다고 하여 에밀레종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 전설에서 우리 조상들은 무엇을 말하려고 했을까? 참된 소리, 그것은 종에서 나오는 게 아닙니다. 정양모 신부님은 종에 새겨진 조각은 그야말로 신비라고 극찬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종소리가 좋아도, 조각이 아름다워도, 아무리 유명한 사람이 만들었다 할지라도 진실한 종소리는 바로 사람에게서 나온다는 것을 가르친 이야기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종이 사람의 영혼을 깨울 수 있는 것은 크고 아름다운 종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종을 치는 사람들, 그 믿음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 아기를 내어준 부부처럼 나를 내어 줄 수 있는 사랑의 마음으로 살아갈 때, 어린아이처럼 맑고 아름답게 살아가는 신자들을 통해서 나온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모든 종교는 소리를 갖고 있습니다. 그 소리를 통해 인간의 어두운 마음을 깨우고, 죄에서 돌아서게 합니다. 만약 종교가 이런 소리를 내지 못한다면 그 종교는 죽은 종교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영혼을 깨우는 참된 종교는 그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을 통해서 나오는 것이지, 종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화려하고 웅장한 건물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화려하고 웅장한 건물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사랑의 교회가 2천 8백억을 들여 아름다운 교회를 지었다고 합니다. 이런 성전에서 아름다운 소리가 나올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내 자신이 거룩한 성전이 되야 합니다. 내 자신이 나를 죽이고 내 십자가를 질 수 있는 거룩한 성전이 될 때 비로소 아름다운 소리가 나온다는 것을 우리 조상들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을 향해 외치는 우리의 소리가 영혼을 깨워주는 맑은 소리, 생명을 주는 진리의 소리가 되려면 우리가 진실하게 살아가야합니다. 마친 어린아이의 영혼처럼 맑은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내 자신을 내어주는 이타적인 사랑이 되야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철부지 어린아이와 같이 살아야 하늘나라를 가질 수 있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요한은 광야에서 낙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두르고 메뚜기와 들 꿀을 먹으며 사람들에게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외쳤습니다. 400년 동안 들리지 않았던 예언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소리는 정말 에밀레 종소리처럼 맑고 깨끗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광야에서 들려오는 이 소리를 들은 많은 사람들은 자기의 죄를 회개하기 시작했고 세례를 받고 새사람이 되어 거듭난 삶을 살아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사실은 이 소리가 들려지는 그 때부터 주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셨다는 것입니다.

 

마치 이새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나오고 그 뿌리에서 새싹이 돋아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요한의 외침을 듣고 변화하기 시작할 때 구원의 희망이 되시는 주님은 우리에게 다가 오신 것입니다. 이처럼 한 사람의 진실 된 목소리는 세상을 바꾸는 힘이 있습니다. 주님의 평화를 이루어가는 힘이 됩니다. 이 땅에 하느님의 나라가 오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런데 소리는 그 사람의 마음에서 나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마음이 어떤 마음인가에 따라서 그 입에서 나오는 소리가 생명이 되기도 하지만 죽음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가 서로에게 좋은 말을 하며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희망을 주는 말, 용기를 주는 말, 생명을 줄 수 있는 말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늑대가 새끼 양과 어울리고 표범과 숫염소와 함께 뒹굴며 새끼사자와 송아지가 함께 풀을 뜯는 그런 세상, 젖먹이가 독사굴에 장난쳐도 물지 않는 그런 세상을 만들 수 있는 말들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좋은 말을 하려면 바울로의 말씀처럼 나를 비우고 내 마음을 주님의 마음이 채워져야 합니다.

 

혜능이라고 하는 사람이 제자에게 이런 가르침을 주었습다고 합니다.

“사람이 경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경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니, 잘 읽으면 경이 너를 섬기게 될 것이요, 잘못 읽으면 경이 너를 노예처럼 부리게 되리라”

 

그렇습니다. 똑같이 읽어도 어떤 마음으로 읽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요한만큼 성경을 읽지 못해서 죄를 지었겠습니까? 아닙니다. 어떤 마음을 품고 읽느냐? 가 중요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요한처럼 광야의 소리가 되어 잠자는 양심을 깨우고 진리를 잃고 방황하는 이 세대에 빛과 소금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신앙을 갖고 살아가는 이 시대의 소명입니다. 그런데 그 소리는 광야에 머물 수 있을 때 비로소 나오는 소리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요한처럼 광야에 머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광야는 어떤 곳일까요?

먼저 광야는 지식이 아니라 마음으로 세상을 볼 수 있게 하는 곳입니다.

광야에 서면 꽃이 피고 지는 단순한 이치에서 생명이 무엇인지 죽음이 무엇인지를 느낄 수 있습니다. 아 그렇구나! 자신을 버릴 줄 아는 꽃, 자신을 죽일 줄 아는 꽃 그게 살아있는 꽃이고, 자신을 버리지 못하는 꽃, 자신을 죽일 줄 모르는 꽃 그게 죽은 꽃이로구나.

 

여기서는 욕심이 무엇인지 배울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느끼기만 하면 됩니다. 때가 되면 아낌없이 물러 날 줄 알고, 그 아름다움을 기꺼이 포기하고 떠나는 그 모습에서 가난한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아낌없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줍니다. 왜 농심을 천심이라 하겠습니까? 광야에서 터득한 지혜를 갖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광야의 언어는 지식의 언어가 아닙니다. 마음의 언어요, 느낌의 언어입니다. 별을 보면서 왜 아름다운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냥 느끼면 됩니다. 꽃을 보면서 왜 아름다운지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느끼면 되는 것입니다.

“저 별은 나의 별”이라고 해서 그 별이 내 별이 되던가요. 그러면서도 그 별은 내 별이 됩니다. 그리고 저 사람의 별이 되어 주기도 합니다. 여기서 내 것으로 만들어야 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인간의 이심과 욕심이 얼마나 추한 것인가를 느끼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나눔과 섬김이 얼마나 아름다운 삶인지 느끼기만 하면 됩니다.

 

한 스승이 연꽃을 보여주며 꽃을 보고 설명하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은 저마다 “아름답습니다. 예쁩니다. 향기롭습니다.”

서로가 꽃에 대하여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한 제자만이 꽃을 보고 말없이 행복한 웃음을 지었습니다. 그러자 스승은 말합니다.

“지금 웃고 있는 저 학생만이 꽃을 아는 사람”이라고. 우리는 마음으로 느끼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신앙은 지식이 아니라 느낌입니다. 그리고 그 느낌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때문에 말씀은 머리가 아니라 마음으로 느껴야 합니다. “아! 맞아”라고 느끼는 함성이 있을 때만 성경은 성경이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을 지식을 위해 씌어 진 글이 아니라 마음으로 기록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예수에 대한 지식이 아닙니다. 그 지식은 율법입니다. 방향은 가르쳐 줄 수 있지만 가게 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에 관하여 느껴야 합니다. 느껴져야 행동으로 가고, 행동이 되야 습관이 되고, 습관이 되면 인격이 형성되고, 그 인격이 형성 되야 비로소 향기가 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광야는 삶으로 말하는 곳입니다.

주님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가난을 느끼고 싶다면 광야에 서야 합니다. 왜냐하면 광야는 가난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 가난을 살아가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흙을 보십시오. 겸손을 말하던가요. 그저 겸손할 뿐입니다. “겸손은 낮아지는 것이다.”라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냥 낮은 곳에 있을 뿐입니다. 겸손은 모든 것을 감싸 안는 것이라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냥 감싸 안을 뿐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모든 것들이 흙에 뿌리를 두고 살아갑니다. 인간도 동물도 식물도 심지어 하늘을 나는 새들도 이 흙에 뿌리를 두고 살아갑니다.

물도 이 흙의 겸손이 없다면 물은 담아지지 않습니다. 저 바다의 근원도 결국 흙이 있기에 담아집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요한은 이 광야에서 낙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두르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으며 살았습니다. 요한은 가난이 무엇인지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청빈이 무엇인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냥 청빈하게 살고 있을 뿐입니다.

얼마 전 돌아가신 데레사 수녀의 삶을 봅니다. 마지막까지 자신의 삶을 가난한 이웃에게 주었던 사랑을 봅니다. 수녀님은 가난을 설명하지 않았고 겸손을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사랑을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가난을 살아가셨고, 겸손을 살아가셨고, 사랑을 살아가셨습니다.

저는 이런 삶속에 나오는 소리가 얼마나 강하게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있는지를 깨달았습니다. 이런 소리가 바로 이기적인 속성으로 인해 파괴되고 있는 인류를 구원할 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시대를 향해 회개를 외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이런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주님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네가 이 세상을 향해 회개하라고 외칠 수 있겠느냐 ?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들 터인데 네가 이 세상을 향해 회개하라고 외칠 수 있겠느냐? 하고 묻고 계십니다. 늑대가 새끼 양과 어울리고 표범과 숫염소와 함께 뒹굴며 새끼사자와 송아지가 함께 풀을 뜯는 그런 세상, 젖먹이가 독사굴에 장난쳐도 물지 않는 그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 먼저 광야의 소리가 되라고 하십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보십시오. 서로 물고 물어뜯습니다. 그래야 행복하고, 무엇인가를 얻고 성취할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마치 불나비가 불속에 뛰어드는 모습입니다. 이런 세상에 광야의 소리가 되어야 합니다.

 

소리가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닙니다. 사람은 싫든 좋든 소리를 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왕이면 그 소리가 에밀레종과 같은 소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광야에서 외치던 요한의 소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우리는 새롭게 변화되야 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바로 그 시대를 변화시킬 광야의 소리가 되야 하겠습니다. 욕심과 이기심에서 나오는 교만한 소리가 아니라 사랑에서 나오는 생명의 소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욕심과 이기심으로 어두워진 이 세상을 밝게 비추는 생명의 소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 소리가 울려퍼질 때 주님은 우리 가운데 임재하십니다. 임마누엘 하십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