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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주교직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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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교직의 역사

박태식 신부(성공회 장애인센터 ‘함께사는세상’ 원장)

신약성서에는 다양한 직분들이 등장한다. 우선 바울로 친서에서 직분의 범주에 넣을 수 있는 것들로는 사도(아포스톨로스: 로마 1,1외 다수), 봉사자(디아코노스: 로마 16,1; 필립 1,1), 예언자(프로페테스: 1고린 12,28), 교사(디다스칼로스: 1고린 12,28), 감독(에피스코포스: 필립 1,1) 등이 있고, 바울로 학파의 작품인 사목서간에는 감독, 원로(프레스뷰테로스), 봉사자(이상 1티모 3-5장), 율법선생(노모디다스칼로스: 1티모 1,7)이 등장한다. 그 외에도 편지에 마치 직분처럼 묘사된 명칭들이 나오기는 하나 그 직분이 정확하게 직제에 포함되었는지, 아직 학계에서 확실한 입장이 취해지지 않은 것들도 있다.

Patriarch's basilica, Aquileia. Frescos ( 12th century ):Saint Peter is consecrating Hermagoras as bishop in the presence of saint Mark.
Patriarch’s basilica, Aquileia. Frescos ( 12th century )

바울로의 편지들을 제외한 신약성서 작품들에도 직분들이 나온다. 사도(사도 1,6 외 다수), 봉사자(사도 6,1-7), 감독(사도 20,28), 원로(사도 20,17; 야고 5,14; 2요한 1,1; 3요한 1,1.9; 1베드 5,1), 예언자(마태 23,34), 현자(소포스: 마태 23,34), 율사(그라마튜스[1]: 마태 13,51;23,34) 등이다. 바울로의 편지들과 비교해보면 사도, 예언자, 봉사자, 감독, 원로는 겹치는 명칭들인데, 이를 통해 그 직분들이 1세기 교회에서 널리 통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중에서 오늘날 ‘주교’에 해당하는 직분은 ‘감독’(에피스코포스)이다.

고대 헬라 세계에서 ‘에피스코포스’는 ‘감독자’, ‘관찰자’라는 뜻을 가진다. 이 말이 행정용어로 쓰인 예로, 우선 기원전 4-5세기 경 도시국가 아테네로부터 아테네 동맹의 도시들에 파견된 감독관이 있다. 그는 아테네 시민들에 의해 선출되었고, 동맹도시들이 아테네와의 동맹규약을 잘 지키는 지 감시하는 임무를 띠고 있었다. 그에게는 상당한 법적 권리가 주어졌다고 한다. 로마시대에 들어 에피스코포스는 특히 정부의 공공건물이 운영되는 것을 감시하는 직책이었다고 한다. 아테네의 에피스코포스와 마찬가지로 감독관의 임무를 수행했음을 알 수 있다.

신약성서에 에피스코포스는 모두 다섯 번 나오는데(필립 1,1; 사도 20,28; 1디모 3,2; 디도 1,7; 1베드 2,25), 그중에서 주교직과 직접 연관된 세 본문을 제시해 보겠다.

“그리스도의 종들인 바울로와 디모테오가 필립피에 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모든 성도들과 감독들과 봉사자들에게 씁니다.”(필립 1,1)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과 모든 양떼를 돌보십시오. 성령께서 여러분을 양떼의 감독으로 세우셔서 당신의 피로 세우신 하느님의 교회를 돌보게 하셨습니다.”(사도 20,28)

“이 말은 확실합니다. 어떤 이가 감독직을 맡고 싶다면 그는 훌륭한 일을 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감독자는 비난받을 것이 없고 한 여자의 남편으로서 건전하고 분별력 있고 단정하고 손님 대접을 잘 하고 가르칠 능력이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주정뱅이나 싸움질 잘 하는 사람이어서는 안 되고 오히려 양보할 줄 알고 다투지 않고 돈에 대한 욕심이 없어야 합니다. 자기 가정을 잘 다스리고 언제나 위엄 있게 자녀들을 순종시키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자기 가정도 잘 돌보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하느님의 교회를 돌볼 수 있겠습니까? 새로 입교한 사람도 안 됩니다. 교만해져서 악마의 단죄 선고에 떨어질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비난을 받지 않고 악마의 올가미에 걸리지 않도록 바깥사람들에게도 좋은 평판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1디모 3,2)

세 본문을 통해 ‘에피스코포스’는 그리스도교가 탄생했던 1세기부터 교회에서 널리 사용되었던 호칭임을 알 수 있다. 비록 사도 바울로는 감독이라는 직분을 거론만 했을 뿐 그 직무나 권위에 대해 이렇다 할 언급이 없다. 하지만 그의 후학이 쓴 디모테오 전서는 감독의 확실한 입지를 보여준다. 말하자면, 디모테오 전서에는 바울로의 이상이 수용된 구체적인 교회상이 담겨있다는 뜻이겠다. 그런 까닭에 디모테오 전서는 후서와 디도서와 더불어 흔히 ‘사목서간’으로 불린다. 특히, 1세기 교회의 직제와 직무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보여주기에 ‘초기 가톨릭주의’[2]를 반영하는 책으로 평가를 내린다. 본문에서 보았듯이 디모테오 교회에서는 감독 선발에 대해 뚜렷한 입장을 갖고 있었다. 이는 혹, 그만큼 감독선출에 시행착오를 겪었다는 뜻은 아닐까?

1세기 교회에 다양한 직분들이 있었고, 그들을 구성원으로 하여 직제가 이루어져 있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본 대로 1세기 교회 전체를 관통하는 통일된 체계는 없었다. 이를테면 오늘날의 ‘주교-사제-부제’와 같이 세계 어느 가톨릭교회에서나 통하는 확립된 직제를 발견할 수 없다는 뜻이다. ‘주교-사제-부제’라는 직제는 엄격하게 말해, 신약성서에서보다는 사도시대 교부들의 작품에서 그 성립근거를 찾을 수 있다.

110년경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스가 체포되어 로마로 끌려가던 중에 스미르나 지방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쓴 <스미르나서>에서는 교회 지도자로서 주교의 권위를 분명하게 드러난다.

“여러분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를 따르듯이 감독(=주교)을 따르고, 사도를 따르듯이 원로단(=사제)을 따르고, 하느님의 계명을 섬기듯이 봉사자(=부제)들을 섬기시오. 어느 누구든 감독을 제쳐두고 교회와 관계되는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감독이 드리는 감사례(성찬례), 혹은 감독이 위임한 사람이 드리는 감사례만 유효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신 곳에 가톨릭교회가 있듯이, 감독이 나타나는 곳에 공동체가 있어야 합니다. 주교를 제쳐두고 세례를 주거나 애찬을 행하지 마십시오. 주교가 인정하는 것은 하느님께서도 인정하시므로 여러분이 하는 모든 일은 확실하고 적법하게 됩니다.”(이냐시오스, <일곱 편지> 스미르나서 8,1-2, 박미경 역주, 분도 2000)[3]

<스미르나서> 외에도 주교직과 관련해서는 100년경에 시리아 지역에서 교리서로 씌어진 <디다케>와 로마의 히폴리투스(170-236)가 집필한 <사도전승>이 중요하다.

“여러분은 자신들을 위해 감독들과 봉사자들을 선출하여 주님께 합당하고 온순하고, 돈을 좋아하지 않고, 진실하며 인정된 사람을 선출하시오. 그들이 여러분에게 예언자들과 교사들의 직무를 수행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그들을 무시하지 마시오. 그들은 예언자들과 교사들과 함께, 여러분의 존경을 받는 이들이기 때문입니다.”(<디다케> 15.1-2, 정양모역주, 분도 1993)

“감독자(=주교)들은 온 백성(=회중)에 의해(ab omni populo) 선출되어 세워질 것이다. 모든 이의 동의를 얻어 그의 이름이 발표되면, 주일에 백성은 장로단과 그곳에 참석한 감독자들과 함께 모일 것이다. 모든 (감독자들은) 한 마음이 되어 그분 위에 안수하고 장로단(=사제)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참석만 할 것이다.”(히폴리투스, <사도전승> 2.1, 이형우 역주, 분도 1994)

The earliest portrait of Saint Augustine in a 6th century fresco, Lateran, Rome.
The earliest portrait of Saint Augustine in a 6th century fresco, Lateran, Rome.

위의 두 문헌에서 보았듯이 최초의 주교들은 회중에 의해 선출되었다. 그러나 4세기에 접어들어 동로마제국의 황제들이 교회의 수호자임을 자처하면서 종종 자신이 맘에 드는 인물을 주교로 임명하는 일이 많아졌다. 특히, 총대교구좌(sedes patriarchalis)[4]가 설립되어 있던 대도시에서는 그런 일이 빈번했다고 한다. 그에 비해 로마의 총대주교좌[5]는 ‘회중의 동의에 의한 선출’과 ‘주교 축성’이라는 두 가지 전통이 잘 유지되었는데 신성로마제국이 출현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다시 말해, 봉건 형태의 교회가 등장하자 주교의 선임 과정에 황제가 적극적으로 개입하게 된 것이다.[6] 그 후로 한 세기 이상 큰 혼란을 겪었던 주교선임 문제는 교황 갈리스토 2세(1119-1124)와 황제 하인리히 5세(1106-1125) 사이에 맺어진 ‘보름스 조약’(1122)에 의해 일단락되었다. 주교선임에 황제가 간여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또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사실은 이 당시에 등장한 교회법령집에서 주교선임의 권한이 주교좌 의전 사제단에 맡겨짐으로써 다른 사제들과 평신도들의 참여가 불가능해졌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마저도 13세기부터 교황이 주교선임의 권리를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의전 사제단의 참여기회가 줄어들었고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에서는 마침내 의전 사제단의 권리마저 폐지하여 오로지 교황만 주교 선출과 임명의 권한을 갖게 되었다(옛 <교회법전> 329.2).[7]

성공회는 1534년 11월 3일의 <수장령>(Act of Royal Supremacy)에 따라 영국 국왕이 영국 교회의 유일한 수장으로 선언되었고 이로써 로마 가톨릭 교회의 교황권에서 독립하게 되었다. 사실 이는 1534년 7월에 헨리 8세[8]와 앤 불린과 토마스 크렌머가 교황에게 파문당한 직후의 일이니 아이러니한 점이 있다. 영국교회의 교계제도를 확립시키는 데는 엘리자베스 1세 여왕(1558-1603)의 결단이 중요했다. 여왕은 가톨릭과 개신교의 대립을 원치 않았고 양쪽 극단세력을 배제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포함할 수 있도록 1571년에 예식과 교리가 정리되었다(‘39개조’).

성공회는 사도 계승(successio apostolica)[9]을 유지하며 주교는 사제들 중에서 나온다. 가톨릭에서 독립한 이후 영국교회는 관습에 따라 내각수상의 제청으로 국왕이 주교를 임명한다. 영국 이외의 성공회는 교구 의회에서 선출된 사제를 관구장이 승인하면 관구장과 두 명 이상의 주교가 안수해서 주교로 세운다.

“주교는 특히 그의 교구에서 사도로서, 수석 사제로서, 목자로서, 그리스도와 교회를 대표한다. 또 온 교회의 믿음과 일치와 규율을 지키고,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한다. 그리고 세상에서의 화해와 교회의 발전을 위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활동하며 그리스도의 사목을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 성직을 부여한다.”(<성공회기도서>, 대한성공회 출판부 2004, 780쪽)

  1. ^ 이 경우는 유다교의 율사와 구별해 특별히 “하늘나라의 교육을 받은 율사”라 부른다.
  2. ^ 케제만 등 개신교 학자들이 주장하는 개념으로, 기존의 가톨릭교회 전통과 구별된다는 의미에서 신약성서 시대의 가톨릭주의를 가리킨다.  
  3. ^ 조금 더 읽어보자. “이제 우리는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아직은 하느님께 돌아갈 시간이 있습니다. 하느님을 알아 뵙고 주교를 인정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주교를 공경하는 사람을 영예롭게 해주실 것입니다. 무슨 일이든 주교를 제쳐두고 행하는 사람은 악마에게 봉사하는 사람입니다.”(스미르나서 9,1)
  4. ^ 이탈리아는 로마에, 북 아프리카는 카르타고에, 시리아는 안티오키아에, 그리고 이집트는 알렉산드리아에 총대주교좌가 있었다. “수도의 대주교들은 자신들의 관구에 대해, 예컨대 주교의 선거나 규율 면에서 일종의 감독권을 행사하였다. 또한 그들은 선출된 사람을 확인하고, 주교로 축성하고, 수도 관구회의를 소집하고 주재했으며 주교의 재판에 대한 항소심을 했다.”(A. 프란쯘, <세계교회사>, 최석우 번역, 분도 2001, 126쪽)
  5. ^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330년에 수도를 ‘구 로마’에서 ‘신 로마’(콘스탄티노플)로 옮기면서 신학 논쟁과 갈등의 중심까지 덩달아 동방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동방교회가 소모적인 논쟁에 오랫동안 휘말리면서 기력이 절로 쇠하는 사이 로마교회는 안정을 구축한 상태에서 서방세계에 세력을 확대해 나갈 수 있었다. 적의 불행이 나의 행복을 선사해준 것이다. 그래서 칼케돈 공의회(451년)를 개최할 때쯤에는 누구도 로마 총대주교의 독주를 막을 수 없었던 것이다. 오늘날 가톨릭을 특히 로마-가톨릭(Roman Catholic)이라 부르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요즘도 교황직을 정의할 때 ‘로마 교구의 교구장 주교이며, 그리스도의 대리자이며, 베드로의 후계자이며, 서방 교회 최고의 사제이며, 총대주교이며, 이탈리아의 수석 대주교이며, 바티칸 시국의 원수元首이며, 세계 주교단의 단장이며, 현세 교회를 통괄하는 최고 사목자’라는 장문의 수식어가 붙는다. 어떤 경로로 교황직이 자리 잡았는지 잘 보여주는 호칭이다.
  6. ^ 이후로는 주교의 위상이 극적으로 높아졌다. 주교는 봉건영주로서 상당한 세력을 가진 귀족 집안에서 나왔고 농노의 자식들 중 몇 명을 골라 간단한 미사 진행 절차만 교육시켜 사제로 임명했다고 한다. 주교들은 교회 내에서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았고 상당한 재력을 소유했으며 이와 더불어 문화적,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종교적인 정보들을 독점한 인물들로 자리 잡게 된다. 말하자면 주교와 사제의 지위는 하늘과 땅 차이였던 것이다. 요즘 상황과 비교할 때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7. ^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여기에서 한 걸음 물러나 “주교들을 임명하고 세우는 것이 관할 교회 권위의 고유한 권한이며 그 자체로 배타적인 특권임을 선언한다.”는 항목을 채택했다(<교회법전> 377.1) 이를 통해 교황청과 각 해당 국가가 맺는 조약에 따라 ‘주교 선출’과 ‘교황 추인’이라는 이중 절차가 가능해졌다. 여기 해당되는 교회는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 교회이다.
  8. ^ 헨리 8세는 친 로마적인 성향을 가졌던 인물로 1521년에 루터를 반대해 7성사를 변호한 바 있다. 그 덕분에 교황에 의해 ‘신앙의 옹호자’(Defensor fidei)로 불리기까지 했다.
  9. ^ “주교 직무는 교회 공동체의 시대환경과 필요에 따라 임의로 설정되어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부터 설정된 사도의 임무를 계승하는 것에 그 목적이 있다. 그리스도가 사도들에게 맡긴 복음 선포의 사명은 세말까지 지속될 것이라는 주님의 약속을 통해 주교들은 사도들의 후계자로서 정통성을 보유하며 복음 선포 사명의 본질을 잃어버리지 말고 흐트러짐 없이 수행해야 한다.”(<가톨릭대사전> 10, 한국교회사연구소 2004, 779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