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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지도자]윗분이 잘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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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분이 잘해야

박태식 신부(성공회 장애인센터 ‘함께사는세상’ 원장

그들이 말하는 것은 다 지켜라. 하지만 그들의 행실은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무거운 짐을 꾸려 남의 어깨에 메워주고 자기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이 하는 일은 모두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마태 23,3-5)

아빠의 화장실

이 달엔 영화 이야기로 글을 시작해 보겠다.

El baño del Papa (2007)

자전거를 타고 벌판을 힘차게 달리는 사람들! 그들은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에게 물을 권한다. 멀리서 바라보면 상당히 목가적인 풍경이지만, 가까이 다가서보면 실은 구식 자전거에 무거운 짐을 싣고 땀을 뻘뻘 흘리며 가는 사람들이다. 건강이 아니라 오로지 먹고살기 위해 자전거 페달을 밟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그들 중 하나가 <아빠의 화장실>(세자르 샬론/엔리케 페르난데스 감독, 극영화, 브라질/프랑스/우루과이, 2007년, 98분)의 주인공 비토이다. 얼마나 페달을 밟아댔는지 무릎에 관절염이 생겼을 정도이다.

브라질과 우루과이의 접경 마을인 멜로는 이렇다 할 기간산업이 없는 곳이다. 그저 브라질에서 물건을 떼와 마을에 공급하는 게 최소한의 생계수단인데 그나마 이들을 등쳐먹는 존재들이 도처에 깔려있다. 떼어올 물건 목록을 건네주는 상점주인, 국경초소의 군인들, 자전거에 실은 하찮은 짐을 검사한답시고 수시로 그들을 쫓아오는 국경수비대, 그리고 교회가 있다.

1988년 우루과이를 방문한 교황이 멜로를 방문한다는 계획이 발표되자 마을은 들뜨기 시작했다. 교황을 보려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 테고 그들을 상대로 돈벌이를 단단히 할 수 있으리라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모두들 큰 빚을 내어 그날을 대비했는데 우리들의 주인공 비토는 기발한 꾀를 짜낸다. 도시에서 오시는 점잖은 분들을 위해 고급 유로 화장실을 만들어놓아 돈방석에 올라앉는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그날을 위해 부산하게 준비했고, 특히 비토의 노력은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결과는 대 실패! 교황은 “나는 중요한 메시지를 갖고 이 작은 마을에 왔습니다. 서로 사랑하시오.”라는 연설만 남긴 채 표표히 사라졌고, 10만 명이 찾으리라는 기대와 달리 방문객은 고작 8천명에 불과했다. 게다가 그들 중 상당수는 정부쪽 인사들과 공식수행원과 보도진이었다. 교황과 그 일행이 한바탕 난리를 피우고 떠난 자리엔 처참하게 찢겨진 임시천막들과 땅위에 나뒹구는 음식뿐이었다.

그들은 말만 한다.

예수님은 위선자를 유난히 싫어했다. 그래서 기도를 할 때도 골방에 들어가서 홀로 할 것이며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는 명령을 했을 정도이다(마태 6,1-6). 사실 겉과 속이 같아지려면 자신의 종교 행동을 철저히 감추어 마땅하다. 본래의 ‘나’는 오직 하느님만 아시고 그분과 진솔하게 만나는 자리엔 제 삼자가 낄 틈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시의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하는 행동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은 남에게 보이려 성구갑을 크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어뜨린다. 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는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는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23,5-13). 예수님은 선언한다. 위선자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

예수님은 모두 일곱 번에 걸쳐 율사들과 바리사이를 통렬하게 비판한다(마태 23장, 심판설교). 거기에서 거론되는 종교지도자들의 죄목은 그 종류도 다양하다. 자신들도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주제에 남을 하늘나라로 인도하겠다고 나서며, 개종자라곤 겨우 한사람 만들어 놓고 나서 그 사람마저 지독하게 타락시키며, 제단의 주인이 하느님인지 제물인지 구별을 못하며, 정의와 자비는 뒤로 한 채 그저 십일조 문구에 따라 퀴미논이나 한 톨 한 톨 세는데 시간을 낭비하며, 겉은 멀쩡하지만 속은 착취와 탐욕으로 가득 차 있고, 그들의 위선과 불법은 썩어가는 시신을 곱게 치장하는 회칠한 무덤 같으며, 잘되면 자기 공로로 삼고 못되면 조상 탓으로 돌리며 책임전가하기에 바쁘다.

위선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가차 없는 비판. 아마 당시 이런 저주의 말을 직격탄으로 맞았던 종교지도자들은 화가 머리끝까지 차올라 김이 폴폴 났을지 모른다. 심판설교를 읽어볼 때 예수님은 결코 말을 돌려하시지 않는 분이라는 사실이 선명해진다. 하느님과 마음이 직통하는 분이었으니만치 거칠 것 없는 표현도 서슴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말과 행동이 다르면 그만큼 대가를 치러 마땅한 법이다.

어른답지 않은 말과 행동

요즘 우리나라 가톨릭교회가 뒤숭숭하다. 4대강 개발을 반대하는 입장을 밝힌 한국 가톨릭 주교회의의 결정에 추기경이 번복에 가까운 발언을 했고 이것이 국내 최다부수를 자랑하는 일간지에 실리면서부터이다. 이에 분개한 원로 신부들이 나서 추기경에게 대주교직에서 퇴진할 것을 요구했고, 그에 대한 홍보국장 신부의 해명이 있은 후에 급기야 예의 그 일간지에 “교구장을 공개적으로 비방하고 함부로 퇴진을 요구한 사제들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라는 공개질의서가 실렸다. 이름 하여 ‘뜻을 같이한 평신도 일동’의 질의서인데 정치인과 법조인과 의료계 인사와 언론인과 전직 장관까지 망라한 사뭇 거대한 조직이었다. 추기경의 한마디가 이렇게 큰 파장을 일으킬 줄 몰랐다. 아무튼 공식기구에서 결정된 사항을, 그 결정에 참여한 구성원 한 분이 번복한 데서 사건이 시작된 것은 분명하다. 무책임한 행동이다.  

사실 이런 경우는 가톨릭만 해당되는 게 아니다. 개신교의 어른들도 무책임한 행동을 하기는 마찬가지다. 강남 최대 규모의 교회에서 과거 담임목사를 추종하던 목사들이 현 담임 목사의 방에 찾아들어가 주먹다짐을 한 사건이 터졌다. 이유는 과거 담임목사 편이라고 하여 현 담임목사가 자신들에게 인사 불이익을 주었다는 것이었다. 서로 치고받는 과정에서 현 담임목사의 얼굴뼈가 부서졌는데 이를 두고 서로 상대 탓이라며 책임전가를 하고 있다. 얻어맞은 게 아니라 몸싸움을 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바닥에 얼굴을 찧었대나 어쨌대나. 사실 개신교계에서 이런 일이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이번 사건이 터진 교회가 갖고 있는 명성과 위상을 볼 때 같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부끄러울 수밖에 없다. 도대체 그 교회가 어떤 교회인가? 현직 대통령을 배출한 교회가 아니던가!

우리들의 종교 지도자들은 쉬지 않고 실망을 안겨준다. 원인은 단 하나, 말과 행동이 이율배반적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이런 분들은 교회의 어른으로 받들어 모시는 게 점점 힘들어지고 있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겠다. <아빠의 화장실>은 1988년 우루과이에서 실제 있었던 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었다. 당시 우루과이를 국빈 방문한 교황은 브라질과 접경도시인 ‘멜로’에 들려 연설을 하겠다는 계획이 발표했다. 추측컨대 우루과이에서도 가장 형편없는 마을 방문을 통해 소외자들에 대한 교황의 각별한 관심을 부각시켜보려는 의도에서였을 것이다. 그런데 교황의 공식적인 방문행사 뒤로는 단지 멜로의 주민들의 자괴감만 쓸쓸히 마을을 떠돌아 다녔을 뿐이다. 사실 그렇게 된 데는 교황 방문 전부터 TV에서 ‘현장보도’를 한답시고 제멋대로 마을사람들의 허파에 바람을 넣은 탓도 있으니, 언론의 책임도 없지는 않다. 아니 한 걸음 더 나아가 언론도 멜로 마을 사람들은 등쳐먹은 존재로 볼 수 있다.

<아빠의 화장실>에서 펼쳐놓은 문제의식이 너무 광범위하다 보니 영화를 보고나서 수습하기가 힘들었다. 영화는 남아메리카 민중의 삶을 알 수 있는 기회였고, 마지막 남은 동전 한 닢까지 수탈하는 지배자의 추악한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어떤 시련에도 굴하지 않는 우루과이의 정신을 상징하는 비토의 부인 카르멘과, 꿈을 접고 냉정한 삶을 인정하는 딸 실비아의 모습에서 우루과이 민중의 힘을 만났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교훈은 국경수비대장의 값싼 동정을 거부한 비토였다. “무릎 꿇고 살기보다 서서 죽겠다.”라고 한 체 게바라가 떠오르는 대목이었다.  

종교의 진정한 역할은 무엇인가? 힘들고 지친 사람들을 위로해 주고 그들 스스로 존중할 수 있게 도와주어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 교황이라는 분이 권위만 앞세운 채 폼만 잡고 사라졌으니…….. 비토가 교황 연설을 중계하는 TV 화면에 술잔을 던질 만도 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맘이 괴로웠다. 일종의 직업의식이라고나 할까. <아빠의 화장실>을 보면서 오늘날 교회의 문제점이 총체적으로 드러나는 듯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칸느, 산 세바스티안, 상파울로 국제영화제에서 수상했지만 유독 우리나라에선 별로 주목 받지 못했다. 아쉬운 일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어른

우리에게는 어떤 어른이 필요할까? 진부하기도 하고 답도 자명해서 자칫 싱거운 질문일 수 있다. 그러나 어느 때보다 우리 시대에 이 질문은 절실하다.

현대인은 무릇 권력과 지위를 앞세우는 지도자엔 저항감을 느낀다. 그보다는 오히려 무엇이든 지도자의 언행을 이성적으로 수긍할 수 있어야 동기가 부여된다. 지금은 비록 고압적인 자세의 종교지도자들이 한국 교회에서 판을 치고 있으나, 한 계단 내려와 이성에 호소하는 설득이 힘을 얻는 날이 반드시 오고야 말 것이다. 우리는 그 때를 미리 대비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얼마 전에 읽은 이야기 하나를 소개한다.

시골 마을에 사는 어느 젊은 아버지가 집에 돌아와 아내가 해주는 식사를 기다리며 아들과 놀기 시작했다. 아들을 무등 태워 집안을 이리저리 다니던 아버지가 아들에게 대들보까지 손이 닿으면 잡아보라고 시켰다. 대들보를 손에 쥔 아들은 신이 나서 소리쳤다. “엄마 내가 아빠보다 훨씬 커요, 이것 봐요, 아빠는 대들보를 못 잡는데 나는 대들보를 잡았어요.” 그 때 아버지가 아들에게 대들보를 꼭 잡으라고 한 후 천천히 몸을 빼냈다. 아들은 대들보에 매달린 채 겁에 질려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자신을 받쳐주던 지지대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느낌이 있는 이야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