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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라(성탄자정, 최도미닉 신부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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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자정미사)/ 이사9:1-6, 디도2:11-14, 루가2:1-14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라

 

오늘 본문의 말씀은 밤을 새워 가며 양떼를 지키는 목동들에게 천사들이 메시아의 탄생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천사는 목동에게 말하기를 그 메사아를 알아보는 표가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표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라고 했습니다.

 

“포대기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가 어둠 속을 헤매는 사람들, 캄캄한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비치는 빛을 알아보는 표징이요, “불경건한 생활과 세속적인 욕심을 버리게 되고 이 세상에서 정신을 차리고 바르고 경건하게 살게 하는”힘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밤은 천사가 말한 대로 우리들은 다함께 목동이 되어 구원의 징표가 되는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찾아가 보는 성탄 전야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오늘 성찬례를 시작되기 전에 말구유 축복식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목동들처럼 구유에 누어있는 아기예수를 경배했습니다. 여러분은 구유에 누어있는 아기를 볼 때 무엇이 느껴지십니까? 그저 인형으로 만든 예수를 본 것으로 끝나셨습니까? 아니면 이 구유를 통해 뭔가 찡한 것이 느껴지실 것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과 함께 뭔가 찡한 것을 느낄 수 있는 이 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선, 구유에 누어있는 아기를 보면 우리들의 몰인정이 느껴집니다.

루가복음 2장 7절 에 있는 말씀을 보면 “여관에는 그들이 머물 방이 없었기 때문에 아기는 포대기 싸여서 말구유에 눕혔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아기가 포대기에 싸여서 구유에 눕혀진 이유를 여관을 비워 두지 못한 우리의 이기적이고 몰인정한 마음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빈방이 있습니까?”라는 제목의 연극을 본 기억이 납니다. 어느 날 밤중에 만삭이 된 여인과 한 남자가 문을 두드립니다. 여관 주인이 문을 열자 남편과 여인은 애원합니다. 지금 곧 아기를 낳을 것 같으니 방을 좀 달라고 말입니다. 이 때 주인은 “빈방이 없다!”고 하며 여인과 남자를 내쫓아야 합니다. 이게 대본입니다. 그런데 이 주인 역을 맡았던 ‘덕구’라는 아이가 별안간 빈방이 있다고 소리칩니다. 이 일로 인해 연극을 망쳐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덕구는 관중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정말 방을 주고 싶었을 뿐입니다”

비록 연극 속에 배역이었지만 방을 주고 싶어 했던 이 순수한 마음이 우리 안에 살아 있을 때, 우리 마음의 어둠은 밝아지리라 생각합니다.

 

성경은 당시에 방이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방이 없었을까요! 없었다면 그것은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모두가 내 중심에서 보았기 때문에 그들에게 내어 줄 방이 없었던 것입니다. 만약 만삭이 된 여인, 빈방을 구하지 못해 애가 타는 여인의 입장에서 보았더라면 주인은 자신의 방이라도 내어 주었을 것입니다. 또 손님 중에서라도 자기의 방을 내어 주었을 것입니다.

성서의 모든 기적은 남을 배려하는 마음에서 시작합니다. 사렙다 여인의 기적을 보십시오. 어떻게 해서 가뭄과 기근이 해소됩니까? 어떻게 오천 명이 먹고도 12광주리나 남는 기적이 일어납니까? 내가 아니라 남을 생각할 때입니다. 지금 내가 먹어야할 마지막 음식을 광야를 걸어온 지치고 지친 나그네에게 음식을 주었을 때 일어났습니다. 내가 먹어야할 오병 이어를 이웃을 위해 기꺼이 주님 앞에 내 놓았을 때 일어났습니다.

저는 우리 사회가 이랬으면 좋겠습니다. 정말 가난한 이웃에게 자신의 빈방을 내어줄 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천사는 목동에게 말합니다. “구유에 누어있는 아기”를 보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구유에 누워있는 이 아기의 모습에서 무엇이 보이십니까? 지금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배려해 주지 못하는 내 자신의 삶을 볼 수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방을 기꺼이 주님께 드릴 수 있습니다.

둘째, 만왕의 왕이신 주님께서 구유의 누어있는 모습을 통해 우리는 가장 미천한 자리로 내려오신 하느님의 사랑, 하느님의 겸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평화를 가져다 줄 메시아는 다윗 왕 같은 능력의 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만왕의 왕이신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화려한 왕궁이 아니라 가장 미천한 말구유에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가장 낮은 자리로 오신 것입니다. 이처럼 진정한 평화는 낮은 곳을 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에서 시작합니다. 남보다 더 높은 곳, 더 많은 것을 가지려는 순간 우리의 마음을 황량한 겨울이 되고 맙니다.

 

묘하지요. 우리 민족은 정으로 사는 민족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정을 나누는 법을 가르쳤습니다. 정은 많은 것을 가질 때 생기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을 기꺼이 낮출 수 있을 때, 그리고 기꺼이 나눌 수 있을 때 생깁니다. 그래서 덤을 가르쳤습니다. 손해 보며 사는 법을 가르쳤고, 나누며 사는 법을 가르쳤습니다.

 

어느 잡지에 “별 아래, 겨울밤”이란 특집기사를 보았습니다. 성탄과 참으로 어울리는 제목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마치 말구유를 비추는 별빛처럼 생각되었습니다.

 

“겨울철에 아랫목을 찾는 건 꽁꽁 언 몸을 녹이는 온기 때문이지요. 함께 나누는 정은 꼭 아랫목의 온기와 같습니다. 굴곡진 생으로 얼어붙은 마음을 스르르 녹게 만드니까요. 따뜻한 정이 있는 겨울은 더 이상 춥지 않습니다.”

 

어떻습니까? 예수 마음이 느껴지십니까?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스스로 낮아질 수 있는 마음, “하느님께는 영광을 드리는 마음이요, 땅에는 평화를 만드는 마음입니다.”

스스로 낮아지는 마음, 이 마음을 잃었을 때 그 세상은 가장 비참하게 될 것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일등만 최고로 여기는 마음이 아니라 꼴찌에게도 갈채를 보낼 수 있는 따뜻한 마음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정으로 평화를 원한다면 왕궁을 아니라 그 시대에 가장 아파하고 소외된 이웃의 자리에 서야합니다. 일등을 축하하는 마음뿐만 아니라 꼴지를 품에 안아 줄 수 있는 따뜻함이 있는 세상을 만들어 가야합니다.

 

셋째, 먹이통입니다.

규유는 먹이통입니다. 그런데 그 안에 평화의 왕이신 아기가 뉘어 있습니다. 당신 자신이 먹이가 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진정한 평화는 자신을 줌으로서 이루어집니다. 이 세상에 자기를 주지 않고 되는 일이라고는 없습니다.

왜 아픔이 생기고 미워하고 싸움이 일어납니까? 줌으로서 얻으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든 생명의 이치는 줌으로서 삽니다. 생명과 죽음의 차이가 있습니다. 죽음은 가지려 하는 것이라면 생명은 주는 것입니다. 받고 주는 것이 죽음이요, 이기적인 마음이라면 주고받는 것은 생명이요 사랑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이치는 줌으로서 생명을 얻습니다. 줌이 없는 생명이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평화는 바로 이 생명을 통해 찾아옵니다.

 

성탄의 신비는 주는 자에게서만 가치가 있지, 가지려는 자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헤롯에게 성탄이 무슨 의미가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예수님이 태어날 장소와 때를 잘 알고 있는 율법학자들에게 성탄이 무슨 의미가 있었겠습니까?

자기를 줄 수 없었던 여관 주인에게 성탄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자기를 줄 수 있었던 목동과 동방박사에게만 성탄은 경배의 시간이 되는 것이요, 양을 보호하기 위해 잠을 자야할 것을 기꺼이 포기했던 목동들만이 그 기쁨을 맛보는 순간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자정 미사를 드려왔습니다. 그것은 밤이 되야 별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별을 보고 경배했던 목동과 동방박사가 되자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 이 밤은 우리가 목동과 동방박사가 되어 “구유에 태어난 아기”를 보기 위해 가야합니다. 그래서 참된 구원의 징표요, 생명의 징표인 말구유에 놓인 어린 아기를 묵상하는 이 시간이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