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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물질관(연중 18주일, 최도미닉 신부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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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8. 4(연중 18주일)/ 호세11:1-11, 골로3:1-11, 루가12:13-21

그리스도인의 물질관

 

얼마 전 조선일보에 기제 된 “에이즈도 무섭지만 배고픈 것은 더 무서워요”라는 타이틀의 기사를 보았습니다.

에이즈로 부모를 잃은 15세 캄보디아 소녀의 이야기입니다. 이 소녀는 한 달에 80달러를 벌기 위해 매춘을 합니다.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한 달에 8만원을 벌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거는 겁니다. 그런데 이 일을 하는 이유가 단지 배고픔 때문이라는 기사는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저는 이 기사를 보면서 물질이 가지고 있는 긍정적인 면과 어두운 단면을 보았습니다.

인간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재물처럼 필요한 것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여기서 의식주도 나오고 명예도 권력도 나옵니다. 때문에 이 재물을 얻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사는 현실입니다. 이처럼 재물은 우리의 삶 그 자체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기억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살아가는데 없어는 안 될 절대적으로 필요한 재물지만 때로는 우리의 마음을 가장 어둡게 하기도 하고, 우리의 삶을 불행하게 만들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하느님께서 주신 재물을 잘 다스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적어도 그리스도인들만이라도 이 재물을 올바로 다스릴 줄 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습니다.

노아의 홍수를 보면 하느님은 세상을 물로 심판하고 정화하셨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시대를 시작하십니다. 이 때 아담처럼 우리가 잃지 말아야할 진리를 가르쳐 주십니다. 그것은 물질을 바로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진리입니다. 물질을 바로 다스리지 못하면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고 에덴을 잃을 것처럼, 인류는 축복과 평화를 잃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노아는 참으로 의로운 사람이요, 신앙에 모범이 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신앙이 좋았던 노아가 어느 날 포도주에 취했습니다. 포도주는 단지 술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술은 하느님께서 축복으로 내려주신 열매요, 재물입니다. 그리고 그 포도를 숙성해서 술 만들었으니 이는 인간에게 주신 재능도 포함됩니다.

그런데 노아가 그 포도주에 취한 것입니다. 포도주는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물질과 재능입니다. 인간은 이 능력으로 만물의 영장이 되었습니다. 이 능력으로 과학과 문명을 발전시켰고, 세상을 다스리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물질과 재능에 취한 것입니다.

취했다는 말은 내 의지대로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술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게 됩니다. 취하면 노예가 됩니다. 이 때 그렇게도 믿음이 좋았던 노아마저도 그만 수치를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이게 재물이 가지고 있는 속성입니다.

이처럼 아무리 신앙이 좋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지혜로운 자라 할지라도 재물을 바로 다스리지 못할 때 불행하게 되고, 불의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백성은 모름지기 재물을 잘 다스릴 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40년 동안 만나를 먹으면서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 목적은 아주 단순합니다. 재물에 대한 훈련입니다. 왜냐하면 재물을 바로 다스리지 못하고는 올바른 믿음의 길을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의 격언 가운데 “물질을 다스려라. 그러면 너에게 참으로 유익한 충복이 되리라. 그렇지 못하면 물질은 너에게 폭군이 되어 너를 지배하게 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재물을 다스리지 못하면 재물이 날 지배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물질에 대한 분명한 철학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성서적 물질관에 관하여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와 “형에게 아버지의 유산을 나누어주라고 타일러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아마 형이 동생의 유산을 가로챈 모양인가 봅니다. 일이 이쯤 되면 형을 타일러서 동생의 유산을 찾아 주는 것이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동생을 향해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재산 분배자로 세웠단 말이냐?”라고 말씀하시며 “어떤 탐욕에도 빠져들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꾸짖으셨습니다. 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정말 귀한 것이 무엇인지 깨달아야 합니다.

한번 우리 주변을 둘러보십시오. 재물보다 소중한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여러분 우정이 돈보다 귀하다는 것 아십니까? 사랑이 돈보다 귀하다는 것 아십니까? 얼마 전 형제들이 유산 문제로 동생이 형을 죽인 사건의 보도를 보았습니다. 형제간의 사랑, 이 얼마나 귀하고 귀한 것입니까? 저 같으면 차라리 돈을 포기하겠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우애보다 재물을 귀하게 여기며 살아갑니다. 이것이 우리의 비극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동생은 아버지의 유산을 법대로 처리해 달라고 청했습니다. 잘못된 게 없어 보입니다. 동생에게 주어야할 유산을 가로챈 형의 행동은 정말 잘못된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형을 책망하기는커녕 오히려 도움을 요청한 동생에게 “어떤 탐욕에도 빠져 들지 않도록 조심하여라.”고 타이르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탐욕이 문제였습니다. 아버지의 유산을 제대로 나주지 않았던 형의 탐욕도 문제이지만 그 재산을 기꺼이 차지하려는 동생의 욕심도 문제였습니다.

성경에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땀 흘려 일하지 않는 열매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저는 땀 흘려 일하지 않은 재물 때문에 허물어지는 것을 주변에서 너무나 많이 보았습니다. 이는 가정도 마찬가지요, 사회도 마찬가지요,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가르침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그런데 유산은 어떻습니까? 내 자신의 땀 흘려 거둔 결실이 아닙니다. 그것은 애초부터 부모의 결실이지 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자기 것도 아니면서 이 유산을 조금 더 차지하려고 싸움을 한다면 그 사이에 결국 돈보다 소중한 모든 것을 잃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모두가 불행하게 됩니다.

그리고 유산을 물려주는 부모도 문제지요. 결국 이 유산 때문에 형제간의 우애가 다 깨지고 말잖아요. 왜 이렇게 죽어라고 유산을 물려주려고 할까요? 이 재물이 자식들을 행복하게 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닙니다. 결국 이 재물 때문에 형제간에 싸움이 일어나고 말지 않았습니까? 모두가 불행해 지지 않습니까?

세계의 갑부인 빌게이트는 자식에게 단 100만달라만 유산으로 물려주고, 모든 재산은 모든 재산은 사회에 환원할 것라고 했습니다. 재물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제대로 아는 사람입니다.

사실 지금 우리나라에 들어왔던 선교자금 대부분이 바로 이런 유산이라는 것 아십니까? 지금은 허물어졌지만 옛날 성공회 대학에 카트라이트관이라는 2층 건물이 있었습니다. 이 건물은 카트라이트라는 사람이 죽으면서 봉헌한 유산으로 지어진 건물입니다.

 

그리고 재물의 속성을 알아야 합니다.

에덴동산에서 인간은 정말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이 행복을 잃어버렸습니다. 그 이유가 만족하지 못한 마음, 더 가지려는 인간의 욕심이 인간의 마음을 어둡게 했기 때문입니다.

더 가지려는 욕심이 있는 한 에덴동산도 만족하지 못하는 게 인간입니다. 그리고 이 욕심은 인간의 모든 행복을 빼앗아가 버렸습니다. 이게 재물이 가진 속성입니다. 재물에는 만족이 없습니다.

많은 소출을 얻었으니 만족합니까? 더 큰 창고를 짓겠다고 합니다. 이게 불행입니다. 100을 가지면 101를 가진 사람이 부럽고, 1000을 가지면 1001를 가진 사람이 부러워집니다. 만족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채워도 채워지지 않습니다.

정채봉 선생님이 쓴 “날고 있는 새는 걱정할 틈이 없다”라는 책을 보면 “진정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의 욕망을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이요, 진정으로 부유한 사람은 스스로 만족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남보다 더 가지려는 탐욕을 버릴 수 있을 때, 지금 나에게 주신 모든 것에 감사할 수 있을 때 하느님께서 내려주신 재물이 축복이 됩니다. 더 풍성한 은혜로 채워주십니다. 그리고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을 어둡게 하는 탐욕을 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탐욕의 노예가 되지 않으려면 우리가 간직해야할 유일한 실천적 진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나눔입니다.

주님은 “자기를 위해서는 재산을 모으면서 하느님께 인색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하느님께 바쳐진 재물, 그것은 나눔입니다. 나눔이 있는 곳에 하느님께 드리는 영광이 있습니다.

떼제 공동체의 노래입니다. 한 번 다같이 해보시기 바랍니다. “사랑의 나눔 있는 곳에 하느님께서 계시도다.”

재물은 오직 나눔을 통해만 축복이 되고, 기쁨이 넘치게 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나눔을 가르쳐하고, 나눔을 배워야 합니다. 나눔은 모두를 행복하게 합니다. 가진 자도, 없는 자도 모두를 행복하게 합니다. 모두를 살립니다. 모두를 풍성하게 합니다.

노자는 흙을 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늘과 땅은 만물을 생성하고 양육하지만 자기 소유로 삼지 않고, 스스로 이룬 바 있어도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지 않으며 온갖 것을 길러주었으면서도 아무것도 거느리지 않는다.”

그렇습니다. 대지는 죄다 나누어줄 뿐 어느 것 하나도 차지하거나 거느리지 않기 때문에 모든 것을 살게합니다. 이처럼 나눔은 생명의 이치요 축복의 이치입니다.

희랍의 철학자 스크라테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부자가 그 재산을 어떻게 쓰느냐가 판명되기 전까지는 그를 칭찬해서는 안 된다.”

사람들은 많은 재산을 모으게 되면 복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직은 축복이 아닙니다. 성도는 버는 축복이 아니라 쓰는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적게 벌면 적게 번대로, 많이 벌면 많이 번대로 바르게 쓸 줄 알아야 합니다.

루가 복음 12장 48절 말씀에 “많이 받은 사람은 많은 것을 돌려주어야 하며 많이 맡은 사람은 더 많은 것을 내어놓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착하고 슬기로운 종입니까? 버는데 만족한 사람이 아니라 올바로 쓸 줄 아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오늘 본문에서 벌기만 하려는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자기를 위해서는 재산을 모으면서 하느님께 인색한 사람은 바로 이와 같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심판을 받게 된다는 말입니다. 행복을 잃게 된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눌 줄 모르는 재물에는 생명도 축복도 기쁨도 없음을 알라는 가르침입니다.

하느님께 바쳐진 재물, 그것은 나눔입니다. 나눔은 하느님의 축복이요 생명이 될 뿐만 아니라, 이 재물로 인해 행복과 기쁨이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진리를 반복적으로 되새기는 행위가 바로 감사성찬례입니다.

주께서 당신의 살과 피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예를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우리의 살과 피를 나누어야 합니다.

성찬의 전례에서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주님의 성체를 떼어 나눕니다. 우리는 모두가 이를 바라봅니다. 그런데 이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사제는 곧 떼어진 성체에서 다시 떼어냅니다. 그리고 그 조각을 보혈에 넣습니다.

주님만 쪼개지지지 않습니다. 나도 주님처럼 쪼개집니다. 왜냐하면 이 쪼개짐에서, 바로 이 나눔에서 기쁨이 오고, 보람이 오고, 행복이 오고, 생명이 오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기복신앙은 좋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실 기독교 신앙은 기복신앙입니다.

신명기 28장 2절 이하를 보면 “너희는 도시에서도 복을 받고 시골에서도 복을 받으리라. 들어와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너희 몸의 소생과 밭의 소출과 소 새끼나 양 새끼 할 것 없이 복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이보다 더 확실하게 복을 약속해주는 종교는 없습니다. 그런데 그 조건이 있습니다. “야훼의 말씀에 순종하기만 하면”이라고 하셨습니다. 복이 먼저가 아니라 순종이 먼저입니다.

우리는 물질로 사는 사람이 아니고 은혜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소유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소유를 어떻게 쓰느냐? 이것이 더 중요합니다.

주님은 물질을 죄악시하거나 거부하는 삶을 옳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하느님께 물질을 구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다만 그 물질 바르게 쓸 줄 아는 철학을 가져야 합니다.

주님은 하느님께서 주신 물질로 복을 누리며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물질의 축복을 주신 것은 모든 사람들이 행복한 삶을 누리며 살아가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탐욕에도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이제 결론입니다.

 

호세아는 주님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에집트에서 불러냈다고 했습니다.(호세11:1) 그러니 다시 에집트로 돌아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에집트는 제국주의입니다. 힘으로 싸워서 모든 것을 혼자 누렸던 나라가 에집트입니다. (호세11:1) 때문에 이런 나라들은 골로사이의 말씀처럼 “육체의 욕망, 못된 욕심과 우상숭배나 다름없는 탐욕, 그리고 거짓말로 서로를 속이는”(골로3:5)이런 낡은 인간성이 판을 쳤습니다. 그래서 자신도 불행하고 남도 불행하게 만들었습니다. 하느님은 바로 이런 곳에 우리를 불러내셨습니다. 그리고 나누고 섬기며 함께, 더불어 사는 새로운 축복공동체를 세워주신 것입니다.

콩 한 쪽도 나누어 먹어야 하고, 덤을 주며 나눔을 정으로, 축복으로 가르쳤던 선조들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이제야말로 남보다 더 많이 갖고, 더 높이 출세해야 하는 이런 이기적인 낡은 인간성은 죽이고, 주님처럼 내 자신을 쪼개어 나누는 새로운 인간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