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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영적 리더쉽을 발휘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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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나무꾼이 늘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도깨비가 이 소리를 듣고 나무꾼의 소원을 들어 주기로 한 것입니다. 도깨비는 나무꾼에게 나타나 무슨 소원이든지 들어줄 테니 세 가지만 말하라고 하였습니다.

나무꾼은 급히 산을 내려와 이 사실을 아내에게 말을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지금 배가 고프니 우선 쏘시지나 하나 먹었으면 좋겠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정말 쏘시지 하나가 툭 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보던 아내가 화가 났습니다.

“아니 이 영감태기, 그 귀한 소원을 이렇게 써먹다니”

“쏘시지야! 영감태기 코에나 붙었어라”

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쏘시지는 나무꾼의 코에 붙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쏘시지가 붙은 코가 얼마나 우습던지 한참 웃고 있었는데 나무꾼은 아내에게 쏘시지를 떼어 달라고 애원하였습니다. 나무꾼의 아내는 할 수 없이 쏘시지를 떼어 주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세 가지 소원을 다 써버리고 만 것입니다.

남편의 실수를 인정하고 두 가지 소원을 잘 썼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순간의 감정이 그 좋은 기회들을 다 망쳐버린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가 쉽게 빠지는 실수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도 이처럼 매 순간마다 무엇인가를 판단하고 선택해야만합니다. 이 때 우리는 감정에 치우치지 말고 냉정하게 판단해서 그 판단과 선택이 나를 살리고, 모두를 살릴 수 있는 판단과 선택이 되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이 시대가 요구하는 리더쉽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도중에 사마리아를 들렸다가 가시기로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 중에 몇 사람을 뽑아 앞서 보냈습니다. 그런데 심부름을 갔던 제자가 돌아와서는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의 일행이 예루살렘을 가다가 잠시 들리는 것을 알고는 예수님을 맞아들이려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렸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듣고 있던 야고보와 요한이 이 일로 무척이나 화가 난 모양이가 봅니다. 대뜸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하여 그들을 불살라 버리겠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화가 난 제자들을 향해 주님은 아주 매섭게 꾸짖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마음으로는 결코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지금 맞아들이지 않았으면 다음 기회를 보면 될 것이요, 지금 막고 서있으면 돌아가면 될 것을 가지고 그들 저주하고 능멸해서야 되겠습니까? 그런데 왜 제자들이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판단할 때 지나치게 감정에 치우쳐 있다는 것입니다.

감정에 치우치면 바른 판단을 할 수 없고, 바른 지도력이 나올 수 없게 됩니다. 제자들은 “저는 선생님이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 가겠습니다.”라고 고백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자신들을 맞아들이지 않았다는 상한 감정 때문에 사마리아 사람들 앞에서 이런 고백은 여지없이 허물어지고 말았습니다.

주님은 어떤 상황에 처하든지 흔들림 없이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그 길을 가라고 하십니다. 때로는 환란과 역경이 불어 닥치고, 때로는 내 마음이 분노와 혼란에 휩싸인다 할지라도 뱀같이 냉정하게 판단해서 주님이 가신 길을 가야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선택한 판단과 행동이 나 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생명과 평화를 줄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입장 바꾸어 볼 수 있는 지혜가 있어야합니다. 그래야 주님의 뜻을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왜 이렇게 분노했을까요? 자기 입장에서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을 자기 입장에서만 보면 객관적인 판단을 할 수 없습니다. 사실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 보면 사마리아 사람들이 이렇게 대한 일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유다인들에게 늘 무시당하며 살아 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마저도 자기를 위해서 오시는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을 가시다가 잠시 들린다고 생각하니 섭섭한 생각이 들었을 것 같습니다. 아마 예수님도 유다인들 처럼 자신들을 무시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내 입장이 아니라 사마리아 사람들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이해가 될 만한 일입니다. 저는 이 사건을 보면서 남을 판단할 때 내 입장이 아니라 남의 입장에 서보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주님과 함께 있었어도 남의 입장에 서보지 않고는 바른 판단을 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렇게 보면 제자들이 그렇게 화낼 일도, 그리고 불살라 버릴 일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사마리아 사람들을 이해시키고, 위로해 주어야할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화가 나있었고, 흥분하고 있었던 것은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보는 자세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런 제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 자신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는 얼마나 남의 입장에서 서서 바라보고 판단했는지? 자녀를 훈계할 때도, 아내를 대할 때도, 그리고 교인을 대할 때도 그렇습니다. 언제나 남의 입장보다는 내 입장에서 바라보고 판단할 때 문제가 생겼습니다. 상대방의 상처를 치유하거나 바르게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처를 주고 더 아프게 하는 적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참된 리더쉽은 우리가 어떤 판단을 할 때, 내 생각보다는 남을 배려하는 마음을 먼저 갖는 지혜를 가질 때 주어집니다. 이것이 없이는 우리가 아무리 “주여, 주여!”한다 해도 주님으로부터 그 지혜를 얻을 수 없게 된다는 사실은 오늘 말씀을 통해서 새삼 깨닫게 됩니다.

셋째, 참된 리더쉽은 능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인격에서 나옵니다.

오늘 본문에서 중요하게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제자들이 “하늘에서 불을 내려 불살라 버릴까요?” 라고 말한 것입니다. 제자들은 그만한 능력이 있기 때문에 이런 말을 했을 것입니다. 루가복음 10장 19절 말씀을 보면 “내가 너희에게 뱀이나 전갈을 짓밟는 능력과 원수의 모든 힘을 꺾는 권세를 주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악령들이 복종한다고 기뻐하기보다는 우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라”고 하셨습니다. 악령을 복종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다 할지라도 그 능력을 바르게 쓰는 마음이 더 중요하다는 가르침 같습니다.

우리는 뭔가 더 많은 것을 갖고 싶어합니다. 더 많은 것을 갖게 되면 더 큰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올무였습니다. 바로 이런 생각들이 교회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을 병들게 하고 있습니다.

어제 우연히 “여왕의 학교”라는 드라마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한 장면은 저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 주인공인 마여진 선생님은 시험 성적표를 받아들고 반 아이들에게 비수 같은 말을 던집니다. “시험이 자신이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점검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시험은 너희들 진짜 실력이 궁금해서가 아니라 너희들을 평가하고 등급을 매기기 위해서야”라고 서두를 꺼냅니다.

이어 그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생명에 대한 사명감이 있거나 없거나 성적만 좋으면 의사가 될 수 있어. 물론 정의로움도 필요 없어. 시험만 잘 치면 남들을 심판할 수 있는 법관 자리에 설 수도 있는 거야. 그러니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시험 성적을 올리도록 해. 아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닌 등수가 중요한 거니까”라고 말입니다.

어쩌면 자가는 마 여진이라고 하는 여교사를 통해 지금 우리 사회가 앓고 있는 병을 통렬하게 외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우린 사회는 능력자를 만드는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 마져도 여기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이런 능력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칼은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다만 그 칼을 든 사람의 인격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입니다. 만약 강도의 인격이라면 그것은 다른 사람을 해치는 무기가 될 것이요, 어머니의 인격이 된다면 그것은 음식을 만드는 도구로 쓰여 질 것입니다. 때문에 능력보다 먼저 인격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래야 참된 리더쉽이 발휘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당신을 따르겠다고 하는 제자들에게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고 하셨습니다.

사실 사람은 누구나 좋은 것을 먹고 마시고, 좋은 것을 입고 좋은 집에 살기를 원합니다. 남들로부터 존경받고 싶어 하고, 남보다 뛰어나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러한 욕구를 채우려 한다면 주님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주실 수 없을 것입니다.

 

때문에 주님은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영원히 살게 하며 없어지지 않을 양식을 얻도록 힘쓰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5장 13절 말씀에서 “하느님의 은총을 여러분의 육정을 만족시키는 기회로 삼지 마십시오.” 그리고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받아야할 것은 힘이나 능력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아무리 돌을 갖고 빵을 만드는 능력이 있어도, 성전 탑에서 떨어져도 천사들이 떠받들어 다치지 않는 재주가 있어도 결국 하느님 말씀을 마음에 담아내는 인격이 없다면 불행한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베냐민 지파의 사람이었고, 바리사이파 사람이었고, 가말리엘의 제자였으며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은 그 당시 최고의 능력을 갖춘 실력자임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만나고 나서는 그런 것은 다 쓰레기로 여긴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만을 자랑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바울로를 위대한 사도가 되게 한 것은 그의 능력이 아니라 바로 십자가였습니다. 사도 바울로가 십자가의 진리를 마음에 품었을 때 비로소 사도 바울은 이 세상을 비춘 찬란한 빛이 되었던 것입니다.

때문에 바울은 확신했습니다. 방언을 하고 천사의 말을 한다 하더라도, 온갖 신비를 꿰뚫어보는 능력과 모든 지식을 가졌다 할지라도, 산을 옳길 만한 완전한 믿음을 가졌다 할지라도 그 모든 것 안에 예수의 인격이 없다면, 사랑이 없다면 참된 제자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사도 바울로는 고백합니다. “사랑으로 서로 종이 되라”고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리더쉽은 남보다 더 뛰어난 능력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능력자가 되야 합니다. 이 사랑은 세상을 구원하고도 남을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넷째, 그리스찬의 리더쉽은 훈련되야 합니다.

리더쉽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훈련되야 합니다. 이삭은 에사오를 불러 사냥을 해다가 별미를 만들어오면 복을 빌어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몰래 이 말을 듣고 양으로 별미를 만들어 바치고 축복을 받습니다. 사람들은 야곱이 사기 쳤다고 합니다. 아닙니다.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데 이것도 분멸하지 못하고 축복을 내려주시겠습니까? 하느님이 원하신 별미는 사냥감이 아니라 양으로 만들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사냥감은 양육이 필요 없지만, 양은 오직 양육을 통해서만 길러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크리스도인의 리더쉽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오직 양육을 통해서만 만들어집니다. 때문에 “주여, 주여” 하는 것에 머물지 말고 말씀과 기도로 내 자신을 끝없이 단련해야 합니다.

주님은 훈련이 필요 없는 분입니다. 그런데도 광야에서 훈련을 받으셨습니다. 그것은 훈련을 통하지 않고는 참된 제자가 될 수 없음을 보여주기 친히 보여 주신 것입니다.

제자의 길은 우연히 되는 것이 아니라 금이 용광로에서 금이 정제되는 것과 같이 지금 내 자신을 단련하는 훈련 없이는 절대로 제자의 리더쉽은 생길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주님처럼 광야로 나가는데 주저하지 말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지금이 중요하다고 하십니다.

쟁기를 잡고 뒤를 보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인 것처럼 과거에 사로잡힌 사람은 참된 영적 리더가 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자신을 따르겠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장례도 작별인사도 못하게 하셨습니다. 작별인사나 장례가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참된 리더에게는 언제나 지금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가르치시기 위한 것입니다. 나에게 필요한 현실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현실에 지금 자신을 투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를 필요로 하는 현실 앞에서 자신을 투신한 사람만이 역사를 밝은 빛으로 비추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다음에 하지요, 내일 하지요 라고 합니다. 오늘은 돈도 벌어야 하고, 공부도 해야 하고, 장가도 가야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내일 하려고 하는 사람은 주님의 영적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도종환 씨의 “담쟁이”란 시가 가슴에 와 닿습니다.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 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을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그렇습니다. 절망의 벽 앞에서도 담쟁이처럼 현실에 충실하자만이 역사를 이끌어가는 리더가 될 수 있습니다.

스펜서 존스가 쓴 “선물”이란 책을 보면 이런 말을 합니다. “과거에서 소중한 교훈을 배워라. 그리고 멋진 미래를 마음속에 그려라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바로 지금 이 순간을 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인생에서 가장 귀한 선물은 프레센트 곧 현재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주님의 말씀을 살아가는 자만이 잠자는 역사를 깨우고, 더 밝은 미래를 밝혀가는 리더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하느님께로부터 리더가 되도록 부르심을 받은 성도들입니다. 교회에서, 가정에서, 그리고 내가 살고 있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리더들입니다. 때문에 지금 우리가 행한 말과 행위들이 내 자신과 가정, 그리고 이웃과 세상을 치유하고, 평화와 축복의 길로 인도하는 참된 제자가 되기를 다짐하는 이 시간이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