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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는 자의 축복(대림 1주일, 최도미닉 신부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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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1주) / 이사2:1-5, 로마13:11-14, 마태24:36-44

기다리는 자의 축복

 

황지우 시인의 <너를 기다리는 동안>이라는 시입니다. 저는 이 시를 읽으면서 왜 교회가 그 시작을 기다림으로부터 시작하는지 알 것 같았습니다. 그 시의 한 부분을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서성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설레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어떻습니까? 기다리는 동안 모든 사람이 그 사람처럼 느껴집니다. 생명이 없는 낙엽을 밟으며 나는 소리조차도 그 사람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시인은 말합니다. 기다리는 동안 그 사람과 하나가 되어 간다고 말입니다. 저는 이 부분이 가슴에 와 닿습니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그렇습니다. 기다리는 동안 자신도 모르게 그 사람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 시를 읽으면서 왜 우리가 주님을 기다려야 하는지, 왜 신앙은 기다림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인지 알 것 같았습니다. 우리는 기다림을 통해 주님과 하나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다림을 통해 “마침내 나는 너에게로 간다.”고 한 시인의 노래처럼 우리도 이 기다림을 통해 주님과 하나가 되는 성도의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그 기다림은 그리움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리움이 없는 사람에게는 기다림도 없습니다. 그리움이 있기에 기다려집니다. 주님은 우리를 축복해 주시기 위해 이 그리움을 주셨습니다.

 

마리아는 태중의 아기를 놓고 이렇게 노래합니다.

“내 구세주 하느님을 생각하는 기쁨에 이 마음 설레입니다” 얼마나 기막힌 노래입니까?

마리아는 지금 자신의 처지를 비천한 신세라고 노래합니다. 그런데 지금 자신의 비천한 신세임에도 불구하고 기쁨에 넘치고 마음을 설레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워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이것을 “하느님을 생각하는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주님을 생각하는 마음이 너무나 사무쳐서, 너무나 그리워서 생각만 해도 설레는 마음, 이게 신앙입니다.

 

예수님의 잉태는 바로 이런 설레는 마음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우리가 마리아처럼 예수님을 내 안에 잉태하기를 원한다면 그래서 주님이 내 안에 계시고, 나도 주 안에 머물기를 원한다면 우리도 마리아처럼 이런 그리움을 가져야 합니다.

 

시인은 말합니다.

“기다려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설레는 일 있을까?”

 

여러분 주일이 기다려집니까? 주님을 만날 기쁨에 설레입니까? 만약 이런 그리움과 설레임이 없다면 우리의 신앙은 문제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이 그리움과 설레임은 내가 주님을 사랑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척도입니다. 사랑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더 그리워지고 기다려집니다. 이는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노아는 하느님의 명령대로 방주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노아가 방주를 만들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하느님에 대한 그리움이었습니다. 사랑이 깊어지면 내 의지보다는 사랑하는 사람의 의지를 따라가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그리움과 애절함이 있었기에 노아는 말씀대로 방주를 만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다림은 그리움으로부터 시작합니다. 하느님과 함께 하는 그리움이 없다면 기다림도 없습니다. 그리고 이 기다림이 없다면 하느님의 나라는 없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그리워하는 사람에게만 주시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마치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주님을 그리워해야합니다. 이 그리움이 있을 때 먹고 마시는 삶이 아니라 주님을 가다리는 삶이 얼마나 큰 축복이 되는지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축복이 너무나 크고 놀라와 죽음도, 시련도, 실패도 좌절도, 미움도, 세상의 쾌락과 기쁨도, 그 어떤 것도 이 기다림에서 떼어 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는 오늘이 중요합니다. 기다림은 오늘을 준비하는 사람에게만 의미가 있습니다.

얼마 전 강길웅 신부님과 함께 피정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신부님은 우리를 연곡사란 절로 안내했습니다. 이것도 피정의 일부라고 했습니다. 왜 절을 방문하는 것이 피정의 일부였는지 나중에 알게 되었습니다.

신부님은 연곡사 입구인 일주문에 다다르자 기둥에 붙어 있는 “억천겁이불고, 긍만세이장금”란 글을 읽고는 그 의미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비로소 왜 이곳에 오는 것도 피정의 일부인지 알았습니다.

“수억 년을 뒤로 거슬러 올라가도 옛날이 아니며, 수억 년을 앞으로 나아가도 항상 지금이다.” 라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세 가지 금이 있는데 부를 상징하는 금이 있고, 음식에 간을 맞추는 소금이 있고, 현재를 뜻하는 지금이 있는데 바로 이 지금이 우리에게는 가장 소중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런 말을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지금 이외의 다른 시간과 공간은 필요치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을 가장 소중히 여기는 가르침은 우리만 그런 줄 알았더니 불교도 똑같이 강조하는 진리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이 진리는 종교만이 아니라 모든 이치가 그렇습니다.

 

농부는 씨를 뿌린 후 가을을 가다립니다. 그들이 가을을 기다릴 수 있는 것은 오늘 씨를 뿌리고 가꾼 수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를 보면 하느님은 모세에게 자신의 이름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이름은 “나는 곧 나다”입니다.

영어로 말하면 “I am” (지금 있는 자)입니다. 주님은 “I was”(나는 있었던 자)도 아니고 “I will be”(나는 있을 자)”도 아닙니다.

하느님은 “I am” (지금 있는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과거의 실수와 후회 속에서는 하느님을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내일 일을 두고 미리 걱정하고 염려하는 사람도 주님을 기다릴 수 없습니다. 우리가 염려한다고 단 일초라도 우리의 생명을 연장시킬 수 있겠습니까?

주님은 “I am”이십니다. “지금 있는 자” 이십니다.

때문에 주님은 제자들에게 “언제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언제나”라는 말은 과거를 가리키는 말도 미래를 가리키는 말도 아닙니다. 지금, 현재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만이 언제 올지 모르는 사람의 아들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코카콜라 회장인 더글러스 태프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어제는 역사이고, 내일은 미스테리이며, 그리고 오늘은 선물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현재(present)를 선물(present)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과거나 미래에 집착해 당신의 삶이 손가락 사이로 오늘을 빠져나가게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오실 주님을 만나는 기쁨을 맛보고 싶습니까? 구원의 은총을 받고 싶습니까? 이 선물을 받고 싶다면 지금 충실히 주님의 뜻을 되새기며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이 중요합니다.

 

내일 할 수 있는 사랑도 없고, 내일 할 수 있는 기도도, 내일 할 수 있는 용서도 없습니다. 지금 해야 합니다. 지금 할 수 있는 자만이 주님의 축복을 맛 볼 수 있습니다. 지금을 잃어버린 사람은 기다릴 수 없습니다.

 

셋째, 약속을 신뢰하는 사람만이 기다릴 수 있습니다.

농부는 추수를 한 후에 또 다시 내년을 위해 볍씨를 준비합니다. 그것은 자연이 우리에게 준 무언의 약속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기다림에는 그 약속에 대한 신뢰가 있어야 합니다. 농부가 자연의 이치를 신뢰하고 그날을 준비하는 것처럼 우리는 주님의 약속을 신뢰하고 그 날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약속을 믿나요.

“그리스도는 죽으셨고, 그리스도는 부활하셨고, 그리스도는 다시 오십니다.”

 

우리는 매번 성찬례 때마다 이 고백을 합니다. 우리는 압니다. 주님은 죽으셨다는 것, 부활하셨다는 것, 그 다음에는 다시 오신다는 약속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두 사람이 밭을 갈고 있다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 둘 것이다. 또 두 여자가 맷돌을 갈고 있다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이것은 약속입니다. 우리는 이 약속을 믿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그 날을 기다립니다. 주님의 말씀에는 요행이 없습니다. 반드시 이루어 질 것입니다. 분명히 하나는 남을 것이고 하나는 들리어 올라갈 것입니다.

솔로몬은 지혜서의 결론을 이렇게 맺고 있습니다. “들을 만한 말을 다 들었을 테지만, 하느님 두려운 줄 알아 그의 분부를 지키라는 이말 한 마디만 결론으로 하고 싶다. 이것이 인생의 모든 것이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심지어 남몰래 한 일까지도 사람이 한 모든 일을 하느님께서 심판에 붙이신다는 사실을 명심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믿습니다. “죄 사하심과 몸의 부활을 믿으며 영원히 살 것”을 믿습니다. 때문에 이 세상을 바라보며 사는 것이 아니라 그 날을 기다리며 살아갑니다.

이제 기다리는 사람은 어떤 모습으로 그분을 맞이할 것인지를 결정해야합니다.

시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이라고

 

그렇습니다. 오기로 한 그 자리가 중요합니다. 오기로 한 자리가 아니라 다른 자리에서 서성이고 있다면 그 사람은 기다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주님은 내 이름을 부르시며 “도미닉아! 네가 지금 어디 있느냐?”라고 부르십니다. 그렇다면 이제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보십시오. 주님이 약속하신 그 자리인가요? 아닌가요?

주님은 형제와 다툰 일이 생각나면 제물을 그 자리에 두고 형제와 화해하고 나서 제물을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왜 일까요? 바울로의 말씀처럼 미움, 시기, 질투, 욕심은 우리가 서 있어야할 자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깨어 있으면서 도둑이 뚫고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서 있어야할 자리가 어디인지 잃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사탄이 가라지를 언제 뿌리고 갔나요? 잠자고 있을 때가 아닙니까? 그러므로 마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합니다. “육체의 정욕을 만족시키려는 생각은 아예 하지 마십시오.”(로마13:14)라고 했습니다. 육체의 정욕, 분노와 이기심과 욕심이 내 마음을 사로잡지 못하도록 깨어 있어야합니다.

 

쓰임 받는 그릇은 금 그릇도, 은그릇도, 질그릇도 아닙니다. 깨끗한 그릇이라고 했습니다. 아마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깨어 있으라고 하신 것도 그리고 사도 바울께서 “어둠의 행실을 벗어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한다.”고 한 이유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이제 성탄을 맞이하는 대림절이 시작되었습니다. 대림기간은 먹고 마시며 즐기는 기간이 아니라 깨어 기도하는 기간입니다. 극장에 들어가면 영화를 보기 위해 모든 불을 꺼야 하는 것처럼 기다리기 위해 나의 삶의 일부분을 포기해야하는 것처럼 삶의 분주함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내 육신의 편안함도 그리고 무엇을 해야 한다고 하는 마음도 잠시 내려놓고 주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약속의 장소에 잠시 머물러 보십시오. 그러면 나도 모르게 기다림이 주는 은총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주님,

오지 않는 주님을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주님께로 가나이다. 내가 주님 안에, 주님이 내 안에 계시나이다.” 라고 기뻐 노래하게 될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