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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치설을 맞이하기 위하여 (설/연중5주/최은식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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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2. 10(연중 5주. “설”기념미사)/ 민수6:22-27, 야고4:13-17, 마태6:19-21

 

까치설을 맞이하기 위하여

 

설날이 되면 “까치 까치설날은 어저께구요, 우리 우리 설날은 오늘 이래요”라고 부르던 노래가 생각납니다.

 

까치는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 좋은 소식을 전해 주는 새, 복을 가져다주는 길조로 여겨 귀하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왜 까치설은 어저께고 우리 설은 오늘이라고 했을까? 그토록 복을 바라던 우리가 왜 까치설은 어저께라고 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한국인의 의식구조를 썼던 이규태 선생님은 우리 조상들이 새해를 “설”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서러운 날’이어서 “설”이라고 했다고 말합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해가 될법한 가설이라고 생각합니다.

 

설이 되면 사람들은 나이를 한살 더 먹습니다. 아마 나이를 더 먹는 것이 어린이들에게는 기쁜 일이지만 나이든 사람에게는 허무한 일이요 서러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저도 어느 새 할아버지가 되어 손자, 손녀 녀석들이 새해 첫날이라고 세배를 하면서 세뱃돈을 주려니 세월의 빠름에 놀랄 때가 있습니다. 들떠서 세뱃돈 받으며 할아버님, 할머님 그리고 부모님과 친지 어른께 세배를 드리던 날이 엊그제 같은데 이제 세배를 받을 나이가 되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 허무함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또 가난과 고난 속에서 살았던 민족이기에 새해를 맞을 때 남다른 한과 서러움도 있었을 것입니다. 설날이 아이들에게는 새 옷 입고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어 즐거운 날이지만 어른들에게는 서러운 날이었던 모양입니다. 가난해서 자식들을 남들처럼 입히지 못하고 먹이지 못하니 서러웠을 것이요, 그 가난과 고난의 긴 터널이 새해라고 도무지 그 끝이 보이지 않기에 서러웠을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올 설은 유난히도 싸늘해 보입니다. 미국에서 시작한 경제 한파가 온 세계를 어렵게 했습니다. 언론에서 온갖 지표를 들어 우리 경제가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사실 서민 경제는 아엠에프 때보다 더 힘들다고 합니다. 무엇보다도 양극화 현상은 오이씨디 가입국가 중에 가장 심각하고, 실업자 수가 무려 100만이 넘는다고 하고 그 중에서도 청년실업은 정말 심각한 실정입니다. 물론 우리 경제지표가 단군 이래 호황이라고 하지만 가난한 민초들의 살림살이는 어렵기는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통일을 애타게 기다리던 북한에 고향을 둔 실향민도 아픈 마음으로 올해도 마음 아픈 설을 맞이하기는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이제 새로운 정부가 시작되니 민족의 대 통합, 경제 민주화가 이루어져서 가난한 민초들의 삶이 나아지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북한의 핵 실험시도로 극도로 얼어붙은 남북관계도 봄눈처럼 녹아지기를 기대해 봅니다.

 

저는 이런 현실을 보면서 새해 설을 맞이하며 “까치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 우리우리 설날은 오늘 이레요”라고 했을까? 하는 의문이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한 많은 우리 민족만이 알 수 있는 비밀이 아니었던가? 생각해봅니다. 언제나 행복한 꿈을 안고 새날을 맞이하지만 현실의 삶의 질고는 언제나 무거웠던 것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그러니 까치설은 언제나 지나간 옛날로만 느껴졌는지도 모릅니다. 까치가 가져다주는 행복한 설은 오기도 전에 이미 지나가버린 것같이 느껴졌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저는 이번 설에는 이렇게 노래해 보고 싶습니다.

“까치 까치설날은 내일이구요,” 라고 불러야 합니다. 비록 지금까지는 힘들고 어려운 날들이 서럽고 아프게 했지만 이제 새해에는 새로운 희망이 우리를 맞이하고 있다고 외치며 새해를 맞이하자고 말입니다. 저는 이것이 늘 새로운 희망과 꿈꾸며 사는 것이 믿음을 갖고 사는 성도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성서는 하느님은 창조의 첫날에 대해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땅은 아직 모양을 갖추지 않고 아무 것도 생기지 않았는데, 어둠이 깊은 물 위에 뒤덮여 있었고, 그 위에 하느님의 기운이 휘돌고 있었다. ‘하느님께서 빛이 생겨라’하시자 빛이 생겼다. 빛을 낮이라, 어둠을 밤이라 부르셨다. 이렇게 첫날이 밤, 낮 하루가 지났다”

 

그런데 특이할 만한 일은 우리는 언제나 낮과 밤이 라고 합니다. 그런데 성서는 낮과 밤이 아니라 “밤, 낮 하루가 지났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는 성서의 세계관을 말해주는 분명한 대목입니다. 성서는 언제나 희망적인 미래에 대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비록 지금은 힘들고 어려워도 절망하지 않고 언제나 희망을 봅니다. 때문에 낮에서 밤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밤에서 낮이 오는 것입니다.

 

동양인의 하루는 아침에 시작하여 저녁으로 끝이 납니다. 이는 빛에서 어둠으로, 삶에서 죽으로 끝나고 있는 세계관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성서가 말하고 있는 첫날에 대한 묘사는 밤에서 시작하여 낮으로 끝나고 있습니다. 무한한 희망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비록 끝없는 어두운 밤의 연속이라 할지라도 새벽은 오고야 만다는 희망을 말해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까치 설, 복을 주는 설, 행운을 주는 설은 어저께가 아니고 내일이라고 노래해야 합니다. 이게 성도들이 새해를 맞이하며 부르는 노래입니다. 지금 우리가 세계 경제 한파로, 우리의 잘못된 경제 구조로 힘든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그래서 왠지 우울하고 싸늘하고 서러움이 북바쳐 오르는 설맞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꿈을 꾸며 새날을 예비해야 합니다.

 

성도는 언제나 어둠 속에서도 빛을 보고, 희망이 없는 절벽과 같은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불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까치 설’을 맞이하기 위해서 ‘우리 설’을 힘차고 보람 있게 설계해야 합니다. 복을 가져다주는 까치설은 우리의 설이 바로 서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먼저 새 옷으로 갈아입어야 합니다.

전우익 선생님이 그러셨던 가요? “혼자만 잘 살면 무슨 재민겨.”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나만을 생각하며 살아온 이기적이고 욕심에 가득 찬 더러운 옷을 벗어 던지고 이웃을 사랑하고 함께 더불어 살 수 있는 옷으로 갈아입어야 합니다.

바른 가치관을 갖자는 말입니다. 너 죽고 나살자는 가치가 아니라 너 살고 나 사는, 함께 더불어 사는 가치관을 갖자는 것입니다. 남북이 함께 사는 길, 노사가 함께 사는 길, 경산도와 전라도가 함께 사는 길, 진보와 보수가 함께 사길, 땅속에 벌레와 곤충과 새들도 함께 살 수 있는 가치관을 갖자는 말입니다.

얼마 전 뉴스를 보니 교황께서 오늘 이 시대가 바로 가려면 나라고 하는 이기심과 욕심을 버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동감하는 말씀입니다. 나만 잘살고, 나만 출세하면 된다고 하는 이기심을 버려야 한다고 말입니다.

 

낡은 이기심의 옷을 버리고 함께 더불어 살 수 있는 사랑의 때때옷을 입어야 합니다. 온갖 색깔들이 한데 어울려 조화를 이루며 아름다움을 보여주듯이 때때 화합과 일치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우리가 입어야할 때때옷입니다. 주님은 이 십자가로 화해를 만드셨고 사랑을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새해에는 십자가란 때때옷으로 덧입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목욕을 해야 합니다.

설에 대한 아련한 추억이 있습니다. 일 년 내내 목욕한 번 못해보았습니다만 이 때만은 아버지와 목욕탕에서 목욕을 하던 시절이 생각납니다. 사실 세례라는 것이 목욕하며 살겠다는 고백입니다.

우리가 사노라면 늘 때 끼고 더러워지게 마련입니다. 우리가 더러운 몸을 씻어내듯이 우리의 몸과 마음을 씻어야 합니다. 참된 축복은 더러워진 내 영혼을 씻어야 복이 오는 법입니다. 우리 조상은 몸과 마음을 씻어야 복이 온다고 생각했습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조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복은 찾아 다니는 것이 아니라 찾아옵니다. 씻으면 자연 스럽게 찾아오는 것이 복입니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새해가 되는 복이 들어오라고 해서 조리를 걸어 둡니다. 조리로 티를 걸러내듯이 내 삶의 티를 걸러내면 복은 자연스럽게 찾아온다고 가르친 것입니다. 복을 찾겠다고 여기저기 기웃 거릴 필요 없습니다. 욕심고 이기심으로 더러워진 몸과 마음을 씻어내면 복은 저절로 찾아옵니다. 그러므로 새해에는 마음을 씻고 새 마음으로 새날을 맞이합시다. 내일의 복은 저절로 찾아오는 법니다.

 

그리고 세배합시다.

세배란 질서를 존중하는 것입니다. 세배란 단지 어른을 공경한다는 것 이상입니다. 이 질서는 누가 강요한 질서가 아니라 생명에 대한 질서요, 자연적인 질서입니다. 이 앞에 세배하자는 것입니다.

 

세배란 내 머리를, 내 무릎을 꼿꼿이 세우고는 할 수 없습니다. 세배는 내 머리를 숙여야 하고 내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먼저 하느님 앞에 꿇어야 하고 숙여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생명을 낳게 한 그 질서 앞에 무릎과 머리를 숙여야 합니다. 부모님의 고귀한 사랑 앞에 무릎을 꿇고, 오늘도 우리를 살리는 자연 앞에, 그리고 우리의 이웃 형제들 앞에 머리를 숙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삽니다.

지금까지 인간은 너무나 교만했습니다. 지식과 과학만 있으면 다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닙니다. 자연의 섭리를 배워야 합니다. 때문에 농심은 천심이라 한 것 같습니다. 농민은 땅에서 배우고, 자연에서 생명의 이치를 배우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그 잘난 지식과 과학이란 교만에서 벗어나 자연 앞에, 우리의 이웃 앞에 겸손하게 세배할 줄 아는 우리가 되야합니다.

참으로 묘하지요. 모든 역사를 보면 백성들에게 세배한 왕은 성군이 되었습니다. 세종대왕이 그렇고, 다윗이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 나라를 지켜내 이순신이 그랬습니다. 잘 익은 벼가 고개를 숙이듯이 남을 섬기며 존경할 줄 알아야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우리에게 올 까치설을 꿈꾸며 우리의 설을 알차고 보람 있게 설계해야 하겠습니다. 현실에 최선을 다하는 실천이 없다면 미래의 행복도 보장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심어야 합니다. 심지 않고 거둘 수 없습니다. 주님은 심은 대로 거두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다가올 까치설을 내다보며 오늘 우리 설을 알차게 설계하고 준비하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새해에는 축복이 넘치는 한해가 되기를 축원 드립니다. 아멘 (최은식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