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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축복의 길, 생명의 길입니다(연중 25주일, 최도미닉 신부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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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9. 22(연중25주) / 예레8:18-23, 1디모2:1-7, 루가16:1-13

나눔, 축복의 길, 생명의 길입니다.

 

불교의 가르침 중에 바라밀이란 말이 있습니다. 해탈에 도달하게 하는 길을 바라밀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해탈에 이르게 하는 여섯 가지의 바라밀이 있는데 그 가운데 으뜸은 보시라고 합니다. 보시란 “나눔의 덕목”입니다. 이처럼 불교에서는 우리가 가진 것을 나누는 것이야 말로 가장 중요한 삶의 덕목이요, 극락으로 가는 길 중의 길이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디 불교뿐입니까? 우리 조상들도 나눔은 하늘에 이르는 길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이 나눔의 덕을 가르쳤습니다. 때문에 우리 삶의 모든 풍습은 나눔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이것을 “덤의 문화”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에만 있는 아주 독특한 풍습입니다.

어머니께서 밥을 줄 때는 꼭 한술 더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정이란 내가 가진 것을 풍성하게 나눌 때 생기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콩 한쪽도 나누어 먹는 것이 사람이 사는 도리라고 가르쳤습니다. 덤을 주면서 나누고 또 나누는 길은 축복의 길이요, 행복의 길입니다. 나도 행복하고, 너도 행복하고 모두가 행복한 길임을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이보다 한 술 더 뜹니다. 주님은 이 길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 자신의 살과 피를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배 때마다 이 살과 피를 먹습니다. 이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면서 우리는 무엇을 깨닫게 되나요. 대속의 진리입니다. 죄의 사슬을 끊고 생명과 평화의 길로 이끌어주는 길, 대속으로 가는 길은 바로 나눔에 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함께 나눔으로 이 나눔에서 생명이 오고, 부활의 신비에 참여하게 됨을 깨닫습니다.

엠마오 제자의 이야기를 보면 이 나눔이 얼마나 중요한지 가르쳐 줍니다. 제자들이 부활의 신비를 깨달을 때는 성경 말씀 듣고 감동을 받았을 때가 아니라 떡을 떼어 나눌 때 비로소 알게 됩니다. 이처럼 나눔은 천국으로 가는 길을 알려주고, 부활의 기쁨을 알게 하는 가장 중요한 덕목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신자의 길을 가려면 나눔의 기쁨, 나눔을 통해서 오는 생명, 나눔에서 오는 축복의 진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많던 적던 간에 자기에게 주어진 재물과 재능을 갖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 재물을 어떻게 다스리는가에 따라서 행복하기도 하고 불행에 빠지기도 합니다. 때문에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재물과 재능을 잘 다스릴 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세속의 재물을 다루는데도 충실하지 못하다면 누가 참된 재물을 너희에게 맡기겠느냐?”하셨습니다. 이는 기도와 말씀 생활도 중요하지만 이에 못지않게 하느님께서 주신 재능과 재물 관리도 중요하다는 가르침이십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가 세속의 재물을 어떻게 다루여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주인이 한 청지기를 두었는데 자기 재산을 낭비한다는 말을 듣고 그 청지기를 해고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재산을 낭비하던 부정직한 종이 자신을 위해 주인의 재산을 마구 나누어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인은 이런 종을 책망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칭찬하고 있습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사실 저 같으면 그 종을 감옥에 쳐 넣었을 것입니다. 나누려면 자기 것을 나누어야지 왜 주인 것을 막 퍼줍니까?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런 종을 감옥에 쳐 넣은 것이 아니라 칭찬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이 비유에서 무엇을 말씀하시려고 이렇게 말씀 하셨을까요? 나누라는 것입니다. 우선은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 그것이 재물이 되었던, 재능이 되었던 내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출발합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주인이신 하느님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나눔은 여기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부정직한 것이고, 무엇이 하느님께서 맡겨주신 재산을 낭비하는 것인지 보이십니까? 바로 나눔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청지기에게 얼마나 많은 재산을 맡겼는지, 그리고 주인의 재산을 어떻게 낭비했는지, 또 무슨 짓을 했기에 청지기를 정직하지 못하다고 했는지 한마디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재물이 많고 적음은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가진 재물을 나누지 않았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나눔이 없는 삶, 그것은 부정직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재산을 낭비하는 종이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를 보면 노아는 믿음이 좋은 사람입니다. 그렇데 그렇게 믿음이 좋았던 노아도 포도주에 취해 그만 수치를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포도주, 사람들은 이것을 술이라 말합니다. 그런데 성도는 이것을 영적으로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포도주는 인간에게 주신 재물과 재능입니다. 포도는 재물이요, 술은 재능입니다. 포도를 가공해서 술을 만들 수 있는 재능을 가진 동물은 이 세상에 인간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하느님께 우리에게 주신 축복의 선물입니다. 이것으로 세상을 하느님의 뜻에 맞게 아름답게 가꾸어 가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에 취해버렸습니다. 하느님이 주신 재물과 재능을 다스려야할 노아가, 주인이 되어야할 노아가 오히려 재물과 재능의 노예가 되어 버렸습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하느님이 주신 재물과 재능을 하느님의 뜻대로 쓰지 못하면 추하게 되는 것입니다. 재물과 재능은 나누어 질 때 축복이 됩니다.

불의한 종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내가 청지기 자리에서 물러날 때 나를 자기 집에 맞아 줄 사람들을 미리 만들어 놓아야겠다.”라고 생각했습니다.

누구든지 자리에서 물러날 때가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가르칩니다. 사람이 죽는 것은 정한 이치요, 그 다음에는 심판이 따를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습니다. 이 죽음 앞에서는 누구나 빈손입니다.

디모데오 전서 6장 7절의 말씀을 보면 “우리는 아무것도 세상에 가지고 온 것이 없으며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갑니다. 우리는 결코 그 재물의 주인이 아닙니다. 잠시 맡아서 관리하는 청지기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 재물에 대한 아주 분명하고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하느님은 반드시 그 재능과 재물을 나누었는지 물으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이제 곧 해고될 이 불의한 청지가 자기에게 맡긴 재물을 어떻게 했습니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재물을 맡아 관리하는 청지기인 그리스도인에게 물으실 때 “너는 얼마나 많이 모았느냐”?“ 얼마나 큰 부자가 되었느냐? 성공했느냐? 이렇게 묻지 않으십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일은 어떻게 얼마나 나누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재물과 재능은 오직 나눔을 통해서만 아버지의 뜻을 온 세상에 드러낼 수 있습니다.

때문에 주님은 “세속의 제물로라도 친구를 사귀어라. 그러면 재물이 없어질 때에 너희는 영접을 받으며 영원한 집으로 들어갈 것”이라고 하신 말씀은 나눔을 통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왜 이토록 강하게 재물을 나누라 하셨을까요?

하느님이 주신 재물과 재능은 나누어질 때 비로소 우리에게 생명이 되고 축복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재물을 보면 그것을 소유하고 싶어 합니다. 싸놓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이게 병입니다. 이렇게 되면 광야서 일어난 만나의 사건처럼 구대기가 들끓고 썩어 냄새가 나게 된다는 것이 재물에 대한 성서의 가르침입니다.

재물에 대한 욕심은 우리의 신앙을 병들게 하는 가장 강한 덧입니다. 첫째 인간 아담이 물려준 유산은 바로 욕심이었습니다. 이 욕심이 우리 삶을 병들게 하고 어리석게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죽음에 이르게 한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성서가 말하는 원죄는 바로 욕심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주신 둘째 아담은 나눔을 유산으로 물려주셨습니다. 이 세상에 목숨만큼 강한 욕심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 목숨마저 나누어주셨습니다. 주님은 바로 이 나눔을 통해 우리에게 평화를 주셨고, 축복으로 가는 길,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을 유산으로 물려주신 것입니다. 나를 죽음에서 생명에로 인도해 줄 힘은 바로 나눔입니다. 내가 나눈 재물이 나와 이 세상을 하느님의 나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생명에 이르게 합니다.

그렇습니다. 나눔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행위입니다. 마하트마 간디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 세상은 우리의 필요를 위해서는 풍요롭지만 탐욕을 위해서는 궁핍한 곳”이라고 했습니다. 나눌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풍족합니다. 나눌 수만 있다면 정말 행복합니다.

이 세상을 보십시오. 모든 생명은 나눔을 통해서 생겨납니다. 나무를 보십시오. 나무는 열매를 갖기 위해 꽃을 줍니다. 아름다움, 향기, 꿀 자신이 가질 수 있는 모든 것을 벌과 나비에게 줍니다. 그 대신 열매를 얻습니다. 생명을 얻습니다. 이게 나눔의 이치입니다.

때문에 우리말에는 “주고받는 다”라는 말은 있어도 “받고 준다”라는 말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가짐이 죽음의 언어라면 나눔은 생명의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주고받는 것에서 생명과 축복이 온다면, 받고 주는 곳에는 탐욕이 생기가 이 탐욕이 모두를 불행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주님은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 하십니다. 재물은 섬기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나누어 쓰라고 주신 것입니다. 많은 것을 나누면 나눌수록 더 풍족해지는 것이 하늘의 진리요, 뜻입니다.

어차피 지금 내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은 내 것이 아닙니다. 다 맡아 관리하는 청지기일 뿐입니다. 이제 곧 “우리가 맡은 일을 다 청산하라”는 말이 떨어질 것입니다. 약싹 빠른 청지기처럼 미련을 버리고 자신의 미래를 준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미래를 준비하는 지혜, 그것은 나눔입니다.

끝으로 나눔은 하늘나라를 얻기 위한 투자입니다.

불교는 나눔을 극락으로 가는 투자라고 가르쳤습니다. 이처럼 주님도 나눔은 하늘나라로 가기 위한 투자라고 가르칩니다.

이 세상에 투자하지 않고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의 꿈이 의사가 되는 것이라고 합시다. 그는 의사가 되기 위해서는 투자해야 합니다. 시간과 노력과 재물을 투자합니다. 이처럼 하늘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세속의 자녀들이 자기네들끼리 거래하는 데는 빛의 자녀들보다 더 약다고”하셨습니다. 세속의 사람들은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일이라면 악착 같이 투자합니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득이 된다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실천에 옮깁니다. 이렇게 해서 그 결과를 얻어냅니다.

오늘 약삭빠른 청지기를 보십시오. 얼마나 과감하게 실천에 옮기고 있습니까? 머뭇거리지 않았습니다. 과감하게 주인의 재산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빛의 자녀라고 하는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십자가에서 당신의 생명을 나누어 주심으로 부활에 이르는 길,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투자하라는 것입니다. 투자는 말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체적인 실천이 뒤따라야 합니다.

우리가 행복하기를 원한다면, 평화롭게 살아가기를 원한다면,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싶다면 이제 나눔에 투자하라고 하십니다. 자신의 미래를 위해 주인이 맡겨둔 재산을 나누어준 종처럼 나누라는 것입니다.

님은 “너희가 세속의 재물을 다루는데도 충실하지 못한데 누가 참된 재물을 너희에게 맡기겠느냐?”고 하십니다. 세상의 재물을 충실히 다루지 못하고는 천국의 지혜를 얻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는 재물과 재능을 잘 다스릴 줄 아는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나눔입니다.

디모데오 전서 2장 6절 말씀입니다.

“그분은 자기 자신을 모든 사람을 위한 대속물로 바치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느님의 뜻을 적절한 시기에 분명히 나타내 주셨습니다.”

자신을 줌으로써 하늘 뜻을 보여주셨다는 말입니다. 자기를 주는 일, 바울로는 참말이라고 했습니다. 길이요 진리입니다. 그렇다면 맑고 밝은 마음으로 나누십시오.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고 그저 나누십시오. 하느님께서 맡겨주신 재산과 재능을 슬기롭게 사용함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만들어가는 성도의 삶을 살아가기를 다짐하는 이 아침이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