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말씀과 신앙나눔 나의 왕이신 그리스도(연중 34주일, 최도미닉 신부 말씀)

나의 왕이신 그리스도(연중 34주일, 최도미닉 신부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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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34. 왕이신 그리스도주일)/예레23:1-6, 골로1:11-20, 루가23:33-43

 

나의 왕이신 그리스도

 

얼마 전 검투사들의 삶을 다룬 스팔타카스라는 영화를 본 기억이 납니다. 이 노예들은 주인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칩니다. 그 이유는 이렇게 할 때 노예가 누릴 수 없는 영광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영광이란 것이 허구라는 것을 알고 반란을 일으키지만 하여튼 주인을 향한 순종과 충성을 보면서 왜 우리가 예수를 주님이라고 고백해야 하는 것인지 그 이유를 알았습니다.

 

우리들은 예수님을 만왕의 왕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두 가지를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는 충성과 복종, 그리고 우리가 받을 영광입니다. 우리의 왕은 평화를 주시는 왕이요, 생명을 주시는 왕이요, 우리의 삶을 치유하시고 축복을 내려주시는 왕이시오, 정의를 세우시는 왕입니다. 하느님은 충성하는 우리에게 이 모든 것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우선 충성과 복종입니다.

바울로는 우리 모두가 예수님의 마음을 간직하라고 합니다. 바울로는 부활의 길, 영광의 길, 축복의 길을 위해 우리가 꼭 간직해야할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바로 순종입니다.

당신의 것을 다 내어 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셨습니다. (필립2:7) 그 뿐이 아닙니다.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이렇게 하신 예수님을 아버지께서는 그분을 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도 주님처럼 하느님 앞에 앞에 절대 순명합니다.

 

그런데 왕은 모든 것을 명령으로 지시합니다. 때문에 왕의 명령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 모든 것을 세워 주실 왕 중의 왕이신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오늘 복음은 처절합니다. 처절하게 십자가에서 죽음을 맞이하시는 예수의 모습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왕 중의 왕, 그분을 기리는 주일, 교회는 우리에게 십자가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떠올리게 합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 생명을 주기 위해 우리에게 내리시는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지신 이 십자가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내리시는 그 명령을 제대로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기 때문에 우리를 구원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십자가에 달린 사람은 이 세상에 수 없이 많습니다. 노예 반란을 일으켰던 스팔타카스도, 두 강도도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이유만으로 만왕의 왕이 될 수는 없습니다.

 

사실 십자가란 이스라엘의 율법으로 말하면 저주의 상징이요, 로마법으로 말하면 죽음의 상징입니다. 십자가란 자랑스러운 일도 아니고, 바라볼 만한 가치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날마다 이 십자가를 바라보며 주님을 찬양하고, 이 십자가를 바라보면 주님의 축복을 기원하고, 영원한 생명을 기원합니다. 그리고 이 십자가를 바라보며 우리도 십자가를 지겠다고 고백합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저주를 축복으로,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어 버리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 볼 때마다 예수님은 어떤 힘으로 저주를 축복으로,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어 놓았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십자가를 보아도 저주를 축복으로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어 놓으셨던 그 능력을 보지 못한다면 우리가 바라보는 십자가는 누군가가 조각해 놓은 조각품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어떻게 이 저주와 죽음의 십자가를 축복과 생명으로 바꾸어 놓았을까요?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바로 이것이 주님의 명령입니다. 이 명령에 복종하는 사람은 오늘 예레미아의 말씀처럼 참 목자가 되셔서 우리를 푸른 초장으로 이끌어 주시고, 죽음의 골짜기에서 우리를 막대기와 지팡이로 인도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사랑의 능력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 십자가에서 보여주셨습니다. 하느님은 이 사랑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고, 이 사랑으로 세상을 축복해 주십니다. 자, 오늘 복음 말씀으로 들어가서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보십시오. 주님은 십자가에서 어떻게 이 사랑을 보여주셨습니까? 그 사랑이 보이십니까?

주님은 자신을 배반하고 있는 사람들, 자신을 조롱하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용서하셨습니다. 아니 그들이 구원되기를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용서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용서하셨습니다. 용서할 수 없는 처지에서,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십자가에서 조차도 이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용서는 사랑의 극치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만이 생명의 길을 갈 수 있도록 우리를 인도해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번엔 우편의 강도가 예수님을 바라보십니다. 그는 고통으로 일그러진 모습으로 주님을 향해 가녀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애원합니다.

 

“예수님, 예수님께서 왕이 되어 오실 때에 저를 꼭 기억하여 주십시오.”

 

이 때 예수님은 자신조차 가눌 없는 힘조차 없었습니다. 성서학자들은 말합니다. 사실 십자가에 못 박힌 손과 발보다도 예수님을 더 고통스럽게 한 것은 숨이 막혀오는 고통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숨을 쉬기 위해 못 박힌 손발이 찢어져도 발버둥 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했습니다.

사실 이런 상황에선 남의 이야기가 들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렇게 견디기 힘든 고통 속에서도 구원을 요청하는 그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오늘 네가 정녕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렇습니다. 사랑이란 이렇게 내가 아니라 남의 입장에 서 주는 것입니다.

제가 신학교에 다닐 때 하루 7시간을 통학했습니다. 아침 6시 40분에 출발한 첫 열차를 타야 수업시간을 맞출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저에게 아침을 먹이려고 어머니는 4시에 일어나셨습니다. 자신의 피곤함보다 아들이 피곤해 하는 것을 더 안타까워하셨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를 사랑이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 사랑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의 고통 속에서도 내가 아니라 남을 향에 마음을 여시는 그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마지막 남은 기력까지, 마지막 남은 피 한 방울까지 다 남을 위해 주셨습니다.

 

얼마나 놀랍습니다. 사랑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라 사랑할 수 없는 처지에서도 사랑하셨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사랑의 본질을 십자가에서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을 볼 수 있어야 주님의 명령을 들을 수 있습니다.

정호승 시인의 봄 길이란 시를 보면 이런 노래가 있습니다.

“보라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이 시인은 주님의 모습을 노래했다고 생각합니다. 사랑이 거부된 그런 상황에서도 사랑하시 주님을 말입니다.

시인은 노래합니다.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여전히 사랑으로 남아있는 사람, 그런 사람은 모든 사람들에게 봄 길을 열어주는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이처럼 주님은 사랑을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사랑이셨습니다. 때문에 주님은 생명이 있게 한 분이요, 또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왜 이렇게 끝까지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까? 왜 주님은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그 순간에도 사랑하셨습니까?

 

사랑만이 우리를 완전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사람다운 것, 그것은 지식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과학을 발전시키고 기술이 뛰어나기 때문이 아닙니다. 돈과 권력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것, 그리고 하느님이 주신 축복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비밀은 바로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로는 말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천사의 말을 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고, 온갖 신비를 환히 꿰뚫어 보고 모든 지식을 가졌다할지라도,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을 가졌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이 모든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말씀을 받아 전하는 특권도 사라지고 이상한 언어를 말하는 능력도 끊어지고 지식도 사라질 것입니다. 문명도 과학도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언제나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이 사랑을 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사랑만이 인간을 인간되게, 그리고 이 사랑만이 모든 것을 부활케 하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보듬고, 치유하고, 화해하게 하고, 하나 되게 하며 생명을 줍니다. 때문에 우리가 살아 있는 한 결코 버릴 수 없는 가장 소중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입니다.

 

성탄이 알파라면 오늘 주일은 오메가입니다. 사랑으로 오신 예수님, 사랑으로 모든 것을 완성하십니다. 그런데 교회는 이런 예수님의 만왕의 왕, 우리의 왕으로 고백하게 합니다.

바울로는 말합니다.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 보이는 것은 물론이고 왕권과 주권과 권세와 세력의 여러 천신들과 같은 보이지 않는 것까지…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재하고 그에게 속해 있습니다.”(골로1:16-17)

 

그렇다면 이제 뭐가 남았습니까? 그 명령에 순종할 때 어떤 영광을 누릴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신하는 왕에게 충성을 다합니다. 저는 백의종군하는 이순신을 봅니다. 어머니의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왕명을 받들어 전라도로 갑니다. 이 명을 받는 것이 나라를 살리고, 백성을 살리고, 자신이 지금 장군으로 존재하는 의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다른 명령보다 더 우선적으로 이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고문으로 일그러진 육신의 고통도, 어머니 장례를 치려야하는 인륜도, 다 버렸습니다. 오직 왕명에 복종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주님을 왕으로 고백하려면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에 보여주신 그 진실한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한번 내 자신을 보십시오. 여러분은 어떤 것에 복종하고 있나요? 세상 권세, 명예, 부귀영화에 복종하고 있습니까? 내 감정에, 내 뜻에 복종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오직 하느님께 복종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오늘 갈라디아서의 말씀은 놀랍습니다. 바울로는 아버지 하느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감사하고 있습니까? 4절 말씀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를 믿고 모든 성도에게 사랑을 보여주고 있다는 말을 전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대로 서로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복종하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복음이 퍼져나갔습니다. 그리고 “성도들이 광명의 나라에서 받을 상속에 참여할 자격을 얻었고, (갈라1:12) 흑암 권세에서 건져 내시어 당신의 사랑하시는 아들의 나라로 옮겨 주셨고, 죄의 속박에서 풀어주셨고, 하늘과 땅의 모든 만물과 화해시켜 주셨습니다. 이것이 오늘 갈라디아서가 말하는 왕의 신하가 누릴 축복과 영광입니다. 이 영광과 축복을 알아야합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입니까? 그런데 이 모든 축복은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의 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복종한 성도들에게 주신 영광이요, 축복입니다. 우리가 어명에 복종할 때 우리가 누릴 축복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누릴 영광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제 십자가에서 명령하신 주님의 어명이 들리십니까? 내가 사랑한 것처럼 서로 사랑하는 이 어명이 들리십니까? 이 어명을 복종하고 순종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느님이 주실 영광이 큽니다. 우리 모두가 만왕의 왕께서 내리시는 축복과 은혜 안에 머무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