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말씀과 신앙나눔 내 교회를 반석 위에 세우리라(연중 21주일, 최도미닉 신부 말씀)

내 교회를 반석 위에 세우리라(연중 21주일, 최도미닉 신부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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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21주일)

내 교회를 반석 위에 세우리라

 

오늘 말씀은 교회를 세우시며 하신 말씀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복음서를 통틀어 교회에 대하여 하신 말씀은 오늘 본문이 유일한 말씀입니다. 주님은 교회를 세워 주시면서 하늘의 열쇠를 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죽음의 힘도 감히 누르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분명히 “하느님의 눈과 마음이 있는 곳”(왕상 9:1-3) 이요, “만물을 완성하는 계획을 이루는 곳” 이요, “과거에 감추었던 계획을 알게 하는 곳”(에페1장, 3장) 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에스겔서 47장 9절 말씀을 보면 교회는 광야와 같은 이 세상에 생수를 공급하는 곳이라 했고, 이사 66장 13절 말씀을 보면 “어미가 자식을 달래듯이” 하느님은 교회를 통해 우리를 위로해 주시고, “새로 돋는 풀잎처럼 싱싱하게 회복하게 해 주신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교회는 한 개인의 영혼을 살리는 문제를 넘어 세상을 살리는 곳이요, 우주를 살리는 곳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교회에서 매면 하늘에서 매일 것이요, 교회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교회가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교회가 살아가야 그 시대의 정신이 살고, 정신이 살아있어야 사람이 바로서고, 사람이 바로서야 세상이 바로 설수 있고, 세상이 바로 서야 바른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가 풀지 못하면 하늘에서도 풀리지 않습니다. 교회가 등불이 되어야하고, 교회가 맛을 내는 소금이 되야합니다.

 

주님께서 빌립보의 가이사리아 도시를 지나실 때의 일입니다. 가이사리아는 헤롯이 로마에 충성의 표시로 만든 도시입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신도시입니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도시지요. 사람들은 이런 도시를 꿈꾸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런 도시를 바라보며 제자들에게 두 가지 질문을 하십니다. 이 질문 속에서는 어떻게 해야 교회가 하늘의 문을 열 수 있는지 그 길을 가르쳐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먼저 “세상 사람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 하고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묻는 말씀이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통해 희망을 보았습니다. 이처럼 교회는 세상의 희망이 되어야 하고 생명의 메신저가 되어야 합니다.

 

1943년 7월 14일 독립운동을 한다는 혐의로 일본경찰에 체포된 조선의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바로 윤동주였습니다. 그 당시 나이 27세, 이로부터 19개월이 지난 1954년 2월 16일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비통하게 절명하고 맙니다.

 

이 때 윤동주는 감옥에서 희망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교회였습니다. 그는 “십자가”라는 시에서 이렇게 민족의 희망을 노래했습니다.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 중략…..

 

괴로워하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쫓아오던 햇빛이 교회당 꼭대기에 걸렸다.’라는 표현에 가슴을 뭉클해집니다.

 

시대에 뒤쳐진 채 걸어오던 조국이 결국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고 맙니다. 민족의 장래에는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언제 이 암울한 조국이 해방될 지 끝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 광복의 꿈을 교회에서 보았습니다. 쫓아오던 햇빛, 광복의 희망, 그것이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서 빛나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윤동주는 비록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죽는다 할지라도 교회에서 희망을 본 것입니다. 그리고 그 희망을 위해 기꺼이 주님처럼 행복하게 자신을 바치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교회는 한 청년에게 희망이 되어주었고, 나라를 잃은 민족에게 희망이 되어주었습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의 눈에 비쳐진 세상 사람들이 본 예수는 어떠했습니까?

세상 사람들 속에 비쳐진 주님의 모습은 그 시대 사람들에게 꿈이요 이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시대의 양심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요한을 보았고, 엘리야와 예레미야를 본 것입니다.

자 어떻습니까? 사람들은 가이사리아의 웅장한 도시를 보면서 꿈을 꾼 것이 아니라 바로 예수를 통해서 꿈을 꾸고 있었습니다. 지금 주님이 제자들에게 세상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물으신 것은 사람들이 참된 지리를 어디에서 찾고 있는지 그것을 가르쳐 주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리석은 사람, 멸망당할 사람들은 가이사리아의 아름다움과 웅장함을 통해 희망을 보려고 하지만, 축복을 받을 사람, 하늘을 알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가이사리아가 아니라 예수에게서 희망을 보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 사람들이 세상이 아니라 교회를 통해 희망을 보게 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만약 교회가 이웃에게 꿈과 희망을 주고 생명수를 전해 주지 못한다면, 우리가 참된 삶이 무엇인지를 전해 주지 못한다면 이 세상은 비전을 잃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하늘나라의 문을 여는 열쇠를 쥐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보고 그 시대의 살아 있는 정신을 찾을 수 있고, 참 양심을 볼 수 있게 해야합니다.

노벨이 다이나마이트를 발견했을 때, 그리고 아인슈타인이 핵을 발견했을 때 인류의 발전을 위해 쓰여 질 것이라고 흥분했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그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때문에 토인비는 인류의 희망을 과학에 두지 않았습니다. 교회에 두었습니다. 인간의 지식과 과학을 바르게 사용될 수 있는 것은 오직 인간의 바른 양심뿐입니다. 그런데 그 양심은 하늘을 알 때만 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사실 때문에 오늘 교회는 존재해야 합니다.

 

성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만약 우리가 전했는데도 세상이 듣지 못하면 듣지 못한 세상이 심판을 받겠지만 전하지 않아 듣지 못했다면 전지 않았던 우리가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이 시대를 향해 진리의 횃불을 높이 들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어 주님은 다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주님은 지금 자신이 제자들과 함께 살아온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고 있는지 묻는 질문입니다. 그리고 이 시대의 소망이 되기 위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묻는 질문입니다. 그리고 그 삶을 제자들도 살아 갈 수 있는지를 묻는 질문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다니며 그분이 지닌 엄청난 능력을 보았습니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선포하시고 병든 자를 고쳐주시며 귀머거리를 듣게 하시고 눈먼 자를 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려고까지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제자들을 향해 주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자신은 머리 둘 것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 놀라운 능력을 갖고 있으면서도 주님은 여전히 가난하셨고 겸손하셨습니다.

 

저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어쩌면 저렇게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저토록 가난할 수 있을까? 저토록 겸손하실 수 있을까?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세상적으로 보면 예수님이야 말로 어리석은 분입니다. 이런 능력을 갖고 고작 이렇게 사시다니, 사실 제자들도 이점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얼마든지 편안하고 안락하게 살 수 있을 터인데 왜 이렇게 살아가실까 하고 말입니다.

 

주님은 왜 그렇게 가난하게, 겸손하게, 그리고 온전히 자신의 생명까지 주셨습니까? 이런 삶이 아니고는 하늘의 문을 열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문은 가이사리아의 번영을 통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처럼 사랑할 수 있는 삶이 아니고는 열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지금 베드로의 고백 속에는 당신의 가난, 당신의 겸손, 당신의 그 사랑이야 말고 이 세상을 살리는 삶이요, 때문에 그 삶을 자신도 살아가겠다고 하는 고백입니다.

 

그런데 이런 삶은 말로만 되지 않습니다. 생각만으로 되지 않습니다. 이런 삶을 살아가려면 십자가를 질 수 있는 삶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이것을 부정한다면 아무리 예수를 주님이라고 고백한다 할지라도 그 믿음은 죽은 믿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마음으로 믿은 바를 자신의 삶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서신에서 말하는 사도 바울의 믿음, 바로 이런 삶이었습니다.

주님은 바로 이 믿음 위에 교회를 세우시고, 이 믿음으로 죽음의 권세를 물리치시고,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 풀리게 될 하늘의 열쇠를 교회에게 위임하신 것입니다.

 

한 신부님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와 하느님과의 관계가 깨지는 때는 성당에 다니기를 잠시 멈추는 때가 아니라, 내가 바르게살기를 포기하는 때”라고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고백은 합니다. 그런데 어디에서 깨집니까? 그 아들의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는 실패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저는 순복음교회. 사랑의 교회, 그리고 명성교회 사태를 보면서 시련과 유혹 앞에서 얼마나 쉽게 우리의 믿음이 허물어져 버리는지 깨닫게 됩니다.

 

오늘 유명한 교회 목사 신부들이 많습니다. 능력이 있습니다. 재능도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으로부터 존경도 받습니다. 그런데 어디에서 깨집니까? 삶에서 깨집니다.

 

세상에 생명이 되는 말씀이 흘러나오는 교회는 가이사리아 도시처럼 화려하고 웅장한 교회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아주 작은 삶들이 곧 교회입니다.

진실한 소리, 생명의 소리는 화려한 성당 건물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수많은 교인들이 모여 있다고 나오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를 닮아 진실하게 살아가려는 우리의 삶을 통해서만 흘러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교만도 자랑도 버리고 오로지 주님의 사랑으로 서로를 용납하고, 용서하고, 자신을 성찰하고 회개하며, 사랑하고 나누며 섬기게 될 때 세상은 그 속에서 진리를 보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나를 향해 물으십니다. 네 아내와 네 남편, 네 자녀, 그리고 네 형제와 이웃들은 너를 두고 무엇이라고 하느냐? 그리고 너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라고 물으십니다.

 

이 때 당당하게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나를 보고 예수와 같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향기요 편지라고 합니다. 그리고 저는 “당신을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믿습니다.

“나에게는 그리스도는 가이사르도 아니요, 돈도 명예도 권력도 아니요, 오직 예수입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