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말씀과 신앙나눔 다해 연중22주일 설교문… 양지우부제(노원나눔교회)

다해 연중22주일 설교문… 양지우부제(노원나눔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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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해 #연중22주일 설교문

 

예레 2:4-13
시편 81:1,10-16
히브 13:1-8,15-16
루가 14:1,7-14

 

어느 안식일에 예수께서 바리사이파의 한 지도자 집에 들어가 음식을 잡수시게 되었는데 사람들이 예수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손님들이 저마다 윗자리를 차지하려는 것을 보시고 그들에게 비유 하나를 들어 말씀하셨다. “누가 혼인 잔치에 초대하거든 윗자리에 가서 앉지 마라. 혹시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또 초대를 받았을 경우 너와 그 사람을 초대한 주인이 와서 너에게 ‘이분에게 자리를 내어드리게.’ 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무안하게도 맨 끝자리로 내려 앉아야 할 것이다. 너는 초대를 받거든 오히려 맨 끝자리에 가서 앉아라. 그러면 너를 초대한 사람이 와서 ‘여보게, 저 윗자리로 올라 앉게’ 하고 말할 것이다. 그러면 다른 모든 손님들의 눈에 너는 영예롭게 보일 것이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 예수께서 당신을 초대한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점심이나 저녁을 차려놓고 사람들을 초대할 때에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잘사는 이웃 사람들을 부르지 마라. 그렇게 하면 너도 그들의 초대를 받아서 네가 베풀어준 것을 도로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잔치를 베풀 때에 오히려 가난한 사람, 불구자, 절름발이, 소경 같은 사람들을 불러라. 그러면 너는 행복하다. 그들은 갚지 못할 터이지만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하느님께서 대신 갚아주실 것이다.”
“교회 다니기를 멈추고, 교회가 되어 주세요.”

 

#1.

오늘 복음 말씀은 지난주와 마찬가지로 바리사이파의 지도자가 베푼 식사 자리에서 펼쳐집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님이 많은 이들을 치유하는 기적을 펼치시고, 세상의 질서에 균열을 내는 말씀을 담대하게 선포하시는 모습을 보고 위기감을 느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식사자리에 초대한 것은 그를 환대하기 때문이 아니고, 시험하기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시선이 고울 리 없습니다. 매서운 눈초리로 예수님의 행동 하나하나를 살피고 있고, 말씀하시는 내용을 검증하는 데 애를 쓰고 있었을 겁니다. 묘한 긴장감이 식탁을 감싸고 있었겠지요.

당시 이스라엘의 식사 자리는 단순히 끼니를 해결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사회가 갖고 있는 여러 질서를 여실히 보여주는 매우 상직적인 자리입니다. 초대된 사람들이 누구인지, 그 사람들이 어디에 앉는지는 이미 결정되어 있었습니다. 식사를 베푸는 이와 계층, 그러니까 경제적, 사회적 지위가 엇비슷한 이들만을 초대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지위가 높은 사람들부터 상석에 않아야 했습니다. 만약 당시의 식사 자리를 찍은 사진이 있었다면, 한 눈에 초대된 이들의 경제적, 사회적 지위를 알아보는 게 가능했을 겁니다. 그만큼 당시 세상의 모습을 압축해서 드러내는 자리가 바로 식사 자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맥락에서 비유를 꺼내십니다.

 

#2.

혼인 잔치를 이야기하시며, “윗자리에 앉지 말고, 맨 끝자리에 가서 앉으라”고 하십니다. 혹시 자신보다 지위가 높은 사람이 잔치에 참여하기라도 하면 민망하게도 앉아 있던 자리를 넘겨줘야 할지도 모르니까요. 현명한 처세에 대해 가르치고 계신 듯이 보입니다. 그러나 이 가르침을 듣는 이들, 즉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것을 떠올려 보면 예수님의 이 이야기는 날이 서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루가복음 11장 43절에서 예수님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즐겨 찾고, 장터에서는 인사 받기를 좋아한다.” 예수님은 이 말씀과 더불어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일은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고 꾸짖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맨 끝자리에 않으라”고 하신 말씀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행태를 신랄하게 꼬집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리고 세상을 구원할 하느님의 아들이 바로 여기 있으니, 당신들이 앉아있는 높은 자리에서 그만 내려오라는 권고도 담겨 있었습니다.

매섭게 눈과 귀를 곤두세우고 있었을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매우 당황했고, 불쾌했을 것입니다. 특히 이 식사를 마련했고, 참여한 이들 중에 가장 지위가 높았을, 다시 말해 가장 높은 자리에 앉아 있었을 바리사이파 지도자는 분개했을지도 모릅니다. “감히 떠도는 나그네에 불과한 자가 식사를 베풀어 줬으면 고마워 할 것이지, 오히려 나를 조롱하다니!”

 

#3.

그러나 예수님은 멈추시지 않습니다. 이번에는 그 식사 자리 자체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식사 자리에 누군가를 초대할 때 “형제나 친척이나 잘 사는 이웃 사람들을 부르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 초대는 그에 상응하는 보답을 기대하며 이뤄지는 것이니, “베풂” 보다는 “교환”에 가까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가난한 사람,” 그리고 장애를 갖고 있는 이들을 초대하라고 하십니다. 그들은 갚을 수 없습니다. 당시 가난과 질병을 안고 있는 사람들은 죄로 인해 벌을 받은 사람들로 여겨져 삶을 풍성하게 꾸릴 수 없었습니다. 식사 자리를 준비할 여유도 그들에게는 없었지만, 그들이 누군가를 초대했다 하더라도, 사람들은 피하기 바빴을지도 모릅니다. “초대받지 못한 손님”인 그들을 식사 자리에 부르라 말씀하십니다. 그에 대한 보상은 하느님께서 주실 것이라 이야기 하시지요.

만약 예수님의 충고를 받아들여 그러한 식사 자리, 즉 잔치가 열렸다면 비슷한 계층, 형편과 지위가 엇비슷한 사람들을 불러 모아 베풀어지는 당시의 식사 자리와는 사뭇 다른 상황을 상상하게 됩니다. 상대방이 누구인지, 그가 어디에 앉던지 상관하지 않는 환대의 자리 말입니다. 그곳에서는 진정한 환대가 자라 날 틈이 생깁니다.

 

#4.

저는 이 이야기가 단순히 바리사이파 사람들에 대한 훈계라기보다는 우리가 함께 바라는 “하느님의 나라”를 그려내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하느님 나라의 주인은 하느님 한 분 뿐이십니다. 우리는 모두 나그네이며, 초대된 손님일 뿐입니다. 우리는 이 식사 자리를 “내 것”이라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다만 잔치를 베푼 주인에게 “감사”하며 함께 누릴 수는 있습니다. 초대된 모든 이들은 차별 없는 형제, 자매이고 단 한명도 배제되지 않는 식사를 나눕니다. 식사와 함께 우리의 삶도 나누고,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삶, 그의 살과 피, 죽음과 부활도 나눕니다. 우리는 그렇게 희망을 나눕니다.

그곳에서는 세상의 논리가 우스워집니다. 부유한 사람이든 가난한 사람이든, 장애가 있건 없건, 사회적 지위가 높건 낮건, 그 기준들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함께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이, 함께 기뻐하고 희망하며 서로의 친구가 된다는 것만이 중요합니다.

제가 존경하는 한 신부님은 하느님의 나라에 대해 고민하시면서 이렇게 쓰셨습니다. “반백년 넘게 세상살이를 경험한 나에게는 하느님 나라에 대한 이런 소망이 비현실적인, 관념적인 망상으로 들린다. 그러나 스스로 지혜롭다는 이들이 지어내는 구체적인 현실을 경험할수록 차라리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가지는 하느님 나라의 망상이 더 진실하고 현실적인 가능성으로 느껴진다.”

신앙하는 이들은 이 “비현실적인”, 다른 말로 풀자면 세상 어디에도 없는 식사 자리, 그 잔치를 펼치기 위해 삽니다. 그래서 음식을 준비하고 이웃들을 초대하고, 마음을 열고자 다짐합니다. 바로 이것이 교회가 세상을 사는 방식입니다. 우리는 높고 낮음 없이, 단 한 명도 배제되지 않는 식탁을 차려 사람들을 먹이는 데 사명을 부여 받았습니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세상을 먹여 살리시는 방식입니다.

 

#5.

이 방식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 위한 ‘사고실험’을 해 보지요.

“양지우”라는 가상의 한 사람을 상상해 보세요. 그는 어렸을 때 친구들을 통해 일찍 마약에 손을 댔고, 생계를 위해 싸움도 잘 못하지만 폭력 조직에 들어갔다고 하지요. 어느 날 그는 잦은 폭력 사건과 마약 문제로 감옥에 가게 됐고, 10년 후에 출소 했습니다. 가족들은 이미 주소를 바꾸고, 연락을 끊었습니다. 바깥으로 나온 “양지우”는 무엇부터 시작해야 하는 지 암담해 합니다.

자, “양지우”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돈일까요? 당장 어느 정도의 돈이 생긴다면 “양지우”는 그 돈을 어떻게 사용할까요. 미래를 위해 학원에서 공부를 하거나 기술을 배울까요? 제 생각에 “양지우”는 출소 후 며칠 동안 여기저기를 헤매다가 예전 폭력 조직에 다시 합류할까하고 진지하게 고민하게 될 겁니다. 고민이 깊어지다가, 술 한 잔 하며 생각에 잠길 테고, 막막한 현실이 그에게 마약을 다시 떠오르게 할 겁니다. 그리고 반복해서 마음을 돌이키다가, 마약을 사기 위해 움직일 것이고, 다음 날에는 조직의 친구에게 전화를 할 겁니다. “나 돌아왔다”고.

이렇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절망의 상황이 “양지우”라는 극단적인 사례에만 적용되는 이야기일까요. 나눔의집이 만나는 가난한 이웃들의 삶에서도 이러한 절망적 선택이 반복되는 걸 봅니다. “양지우”와 가난한 이웃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6.

저는 그것이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함께 삶의 일정부분을 내어 놓고, 나누며 살아갈 수 있는 공동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실수와 후회를 반복해도 흔들리지 않을 사람들 말입니다. 저는 이렇게, 고된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어딘가에 맡겨둘 수 있는 곳, 문제가 모조리 해결되지는 않겠지만 그 푸념이나마 함께 나눌 수 있는 곳이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어설프지만, 따듯하게 공동체를 이루어 가는 것이 교회가 세상을 사는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약을 퇴치하자!”, “폭력 조직을 단속하고, 교육 제도를 개선하자!”는 말은 매우 중요한 외침입니다. 그러나 저는 교회는 조금 더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라고 부르는 그 허물없는 잔치를 바로 이 자리로 당겨 와야 합니다. 그래서 외침보다 더 강력한 공동체를 사람들에게 보여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에게 “바꾸라!”고 외치기보다, “와서 보라(요 1:46)”고 말합니다. 그것이 교회가 세상을 사는 방식입니다.

 

이 비현실적인, 관념적인 망상을 이 세상 안에서 펼쳐 주십시오. 이 비현실적인, 즉 세상 어디에도 없을 잔치를 함께 꾸려 주십시오. 저도 함께 하겠습니다. 가진 것이 없다면 없는 그대로, 부족하면 부족한 그대로 친구가 되어 주십시오. 이제 더 이상은 교회에 다니지 마시고, 여러분 스스로 교회가 되어 주십시오. 하느님을 보러 교회에 오지 마시고, 여러분의 손에 하느님의 사랑이 담길 수 있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이 세상을 채울 수 있도록 하느님의 자리를 마련하십시오. 그것이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교회로 불러 모은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