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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빈치 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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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빈치 코드

박태식 신부(성공회 장애인센터 ‘함께사는세상’ 원장)

이 글이 쓰여진 시점은 2005년 정도 입니다. 착오 없으시길…

메가 베스트셀러

미국의 평범한 교사 댄 브라운이 쓴 소설 ‘다 빈치 코드’(Da Vinci Code, 2003년 3월)가 출간된 지 2년이 좀 넘어섰다. 필자가 소설에 대해 이야기를 처음 들은 것은 미국에 있는 친구에게서였다. 나온 지 몇 달 안돼 인터넷 서점 아마존을 휩쓸고 있다는 것이었다. 현재까지 44개 어로 번역되어 1천 8백만 부가 팔렸고, 이런 경우 특히 ‘메가 베스트셀러’라 부른단다. 미국의 대표적인 언론매체인 USA Today와 ABC에서도 이 책을 주제로 특집을 다루었으며 판타지 소설의 대명사인 ‘해리 포터’ 시리즈의 판매량을 능가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우리나라에서도 2004년에 같은 제목의 번역(양선아 옮김, 베텔스만)이 나왔는데 이 역시 공전의 인기를 누리고 있다. 도대체 ‘다 빈치 코드’가 갖는 매력은 무엇이기에 그토록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걸까?

‘다 빈치 코드’는 추리소설로서의 재미를 골고루 갖추고 있다. 우선 소설의 구성을 철저히 우연성에 바탕을 두어 앞일을 예측하지 못하게 만들었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다음으로 고대와 중세와 근세와 현대에 이르기까지 서구 문화 전반에 대한 풍부한 자료와 암시들을 제공해 독자들로 하여금 서구 세계를 공부하는 재미를 선사해준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세계 인구의 반이 속해있는 그리스도교를 제물 삼아 큰 충격을 던졌다는 점이 ‘메가 베스트셀러’가 된 일등 공신이라 하겠다.

© 2005 The Washington Post Company

지난 3월 15일, 이탈리아 제노바 교구 대주교인 타르치시오 베르토네 추기경은 교황청을 대신해 ‘다 빈치 코드’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한마디로 ‘다 빈치 코드’는 온통 허구라는 것이다. 하지만 가톨릭교회에서 공식적인 입장을 밝히자 공교롭게도 소설은 더욱 인기를 끌게 되었다. 사태가 제법 심각해진 것이다. 사실 이런 때 누군가 나서서 친절하게 상황 정리를 해주면 좋으련만……..

소설의 재미 장치들

고대 그리스는 모든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우수한 사람을 존경했다. 이를테면, 철학자이자 과학자이자 교육가이자 체육인이면서 또한 정치가인 사람 말이다. 그리스 문화와 정신의 회복이라는 기치를 내건 르네상스 시대에도 당연히 그런 인물을 추켜세웠고, 후대 들어 아예 ‘르네상스맨’이라는 호칭까지 부여했다. 우리말로 하면 ‘만능인간’ 정도로 번역할 수 있을까?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화가이자, 건축가이자, 발명가로 르네상스 시대 최고의 르네상스맨이었음을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소설에서는 다 빈치가 성배를 지키는 비밀결사대의 수장으로, 비밀이 외부로 새나가지 않게 갖가지 트릭을 사용한 인물로 그려진다. 그런데 어찌어찌해서 성배를 노리는 세력 앞에 트릭이 노출되고 성배가 세상에 드러날 위기에 빠지고 만다. 그런 와중에 여러 사람이 본의 아니게 끼어들면서 사건이 이상하게 꼬이고, 성배의 비밀이 천천히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추리 소설의 전형적인 틀이다.

‘다 빈치 코드’는 추리 소설의 뛰어난 재미도 선사하지만 교황청에서 예로부터 숨겨왔을 것으로 추정되는 비밀의 베일을 하나씩 벗겨내는 재미도 제공한다.

예수와 마리아 막달레나(마가 16,9~11;요한 20,11~18)라는 여인이 결혼을 했고, 그 후손이 오늘날까지도 존재한다. 성배는 잔이 아니라 예수의 후손을 잉태한 여성을 뜻하고, 그 모든 비밀은 다 빈치가 그린 ‘최후의 만찬’에 암시되어있다. 비밀결사대(시온수도회)는 그 비밀을 끝까지 숨기려 하나 멋진 체형의 미남이며 우수한 머리의 소유자인 미국 영웅(랭던)에 의해 비밀의 너울이 하나씩 벗겨진다. 그 영웅은 폐쇄 공포증까지 가지고 있어 더욱 매력적으로 보인다. 으레 그렇듯이 미국 영웅에게는 지적이며 아름다운 젊은 여성(소피)이 따라붙게 마련이다. 소설을 읽으면서 마치 헐리우드 영화 한편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이다.  

그 외에도 세계 종교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어디선가 한번쯤 들어보았음직한 이야기들도 대거 등장한다. 그리스도교의 경전인 신약성서 27권 외에 근동지방에서 최근에 발견된 외경인 ‘빌립보의 복음’이나 ‘막달라 마리아의 복음’, 예수의 말씀만 따로 모았다는 ‘Q 문서’, 남녀 결합을 중히 여겼던 고대 이집트의 오시리스⋅이시스 종교, 별을 숭배한 중세 밀교의 악마 의식, 뉴 에이지에서 말하는 물고기자리와 물병자리, 가톨릭교회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사조직 오푸스 데이, 모차르트가 속해있었다는 신비한 조직 프리메이슨 등등…….

그 모든 불가사의한 요소들이 더해지면서 소설은 흥미를 더해간다. 소설에 나오는 방대한 종교지식을 섭렵하기 위해 작가가 오래 동안 많은 참고문헌을 살펴보고 추리력을 발휘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아무튼 댄 브라운은 돈방석(1억 4천만 달러)에 올라앉은 인기 작가가 되었고, 더 이상 평범한 교사생활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진실과 거짓

‘다빈치 코드’의 독자는 동⋅서양 가릴 것 없이 누구라도 지난 역사에 감추어져 있던 진실을 찾아내는 데 흥미를 느낄 것이다. 특히, 지난 2천년 동안 서구를 지배해왔던 그리스도 교회에 무언가 깊이 감추어진 비밀이 있다면 더더욱 흥미를 느낄 것이다. 하지만 전통 교리에 목숨을 건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소설은 별로 환영받지 못할 게 뻔한 이치다. ‘다 빈치 코드’의 허구성에 대해 교황청이 조목조목 반대한 항목 중에 몇 가지만 추려보자.  

오푸스 데이: 가톨릭교회와 교황청을 좌지우지하는 사조직 오푸스 데이는 중세 식 고행을 강요하고 가톨릭교회의 비밀을 숨기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내용에 대해 교황청은 오푸스 데이를 적극 변호한다. 세속 한가운데서 자신들의  신앙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소명을 지닌 이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시온수도회: 1099년에 성배의 비밀을 수호하며 예수의 혈통인 메로빙거 왕조를 보호하기 위해 창설된 수도회라는 주장에 대해 교황청에서는 가상의 수도회라고 일축한다. 더구나 소설에 등장하는 다 빈치나 뉴턴, 모차르트, 빅토르 위고가 평신도였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라고 한다.

미트라종교: 그리스도교가 로마제국으로 전파되면서 군인들의 종교이자 밀교密敎인 마트라 종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세례, 만찬례, 사흘만의 부활, 일요일을 축제일로 삼은 것 등이 그 증거이다. 그에 대해 교황청에서는 그리스도교가 미트라 종교와 만나기 전에 이미 정착된 제도와 사상들이라고 반박한다.

콘스탄티누스 황제: ‘다 빈치 코드’에서는 그리스도교가 틀을 잡게 된 것은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그리스도교를 처음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정치적인 의도였다고 한다. 황제는 로마제국을 효과적으로 통치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수용했다(황제 자신이 그리스도의 대리자). 신구약성서의 확정도 황제의 의사에 따른 것이며 그에 따라 예수와 마리아의 이야기를 다룬 모든 책들은 사장되었다. 말하자면 “그리스도에 대한 오리지널 이야기를 선택한 사람들이 세계 최초의 이단자가 되었던 것이다.”(1권 359쪽)

교황청에서는 그런 식의 내용 전개 역시 역사적인 사실을 왜곡한 것이라고 반박한다. 정경正經의 확정은 수많은 전문가 교부敎父들의 중지를 모은 공의회를 통해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진 것이며, 황제는 그리스도교를 좌지우지 한 게 아니라 한 명의 신앙인으로서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수호한 인물이라고 한다.

영지주의靈智主義: 그리스도교는 원래 영지주의 성향을 갖고 있었다. 고대로부터 영지주의의 특성은 신비롭고 초자연적인 지식을 숭배하는 시대사조로, 특히 그리스도교의 신비한 가르침을 알려줄 때 효과적이었다. 그러나 마리아와 예수의 관계를 담은 영지주의 책들이 대거 등장하자 교회는 영지주의 작품과 영지주의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했다. 영지주의에 뿌리를 둔 사상으로 오늘날에는 ‘뉴 에이지’ 사조가 있다. 종교 통합적이고 신비주의적인 성향을 띤다.

교황청은 영지주의와 뉴 에이지 사조의 위험성에 대해 여러 차례 경고한 적이 있고, 한국 가톨릭 주교회의에서도 뉴 에이지를 경계하는 입장을 표명한 바 있다.

마리아 막달레나

‘다 빈치 코드’가 그리스도교에서 경계의 대상으로 부각한 가장 큰 원인은 마리아 막달레나에 대한 새로운 해석 때문이다. 사실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유리 피라미드나 수도자들의 고행이나 영지주의와 뉴 에이지 사조에 대한 소개, 그리고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정치적인 성향 따위는 그저 소설에 재미를 더하는 요소로 치부할 수 있다. 실제로 많은 소설과 영화와 연극에서 그런 식의 암시들이 제공되었기에, 그저 그리스도 신앙을 가볍게 여기는 사람들의 지식적인 사치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교황청에서 공식적인 입장을 밝힐 정도로 심각한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다. 하지만 다음 문제는 도저히 묵과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들이 고대로부터 성배聖杯(예수가 최후만찬에서 사용한 잔)를 찾아왔다. 그리고 중세 시대 언제부터인가 자신의 무덤을 양보해 예수의 시신을 모신 아리마태 요셉(마가 15,42-47 참조)이 예수가 흘린 피를 성배에 담아두었다는 이야기가 퍼지기 시작했다. 그런 전설에 따라 성배가 신앙의 결정체로 간주되었고, 그 전설을 골격으로 많은 이야기들이 만들어졌다. ‘다 빈치 코드’에 따르면 성배란 다름 아닌 마리아 막달레나의 ‘자궁’이고 그 비밀을 다 빈치가 자신의 그림에 절묘하게 끼어 넣었다고 한다.

다 빈치가 그린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의 오른편에 앉아있는 사람은 예수의 연인이었던 마리아 막달레나이다. 매끈한 얼굴에 흐르는 듯한 붉은 머릿결과 모아 쥔 섬세한 손, 그리고 살짝 솟은 가슴으로 보아 여인이 틀림없다. 옷 색깔도 예수와 맞춰 입어 속옷과 겉옷이 대조를 이룬다. 그 마리아의 목에 칼 모양의 손을 만들어 들이대고 있는 자는 베드로이다. 예수의 사랑받는 여인에게 예수의 수제자가 품었던 앙심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그림에 나타난 베드로처럼 가톨릭교회는 교회 내에서 여성이 부각되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다. 그래서 진실을 숨기기 위해 멀쩡했던 여인 마리아를 몹쓸 창녀로 둔갑시켰고 그녀의 위상을 깎아내리려 마리아와 관련된 모든 책자와 정보를 말살했다. 그리고 마리아에 대한 폄하는 모든 여성에 대한 경계심으로 확대되어 가톨릭교회 내에서 여성의 억압하는 구조가 탄생, 유지되어 왔다. 대충 그런 식의 논리가 ‘다 빈치 코드’ 안에 들어있다.  

가톨릭교회는 전통적으로 스캔들에 대해 무시하는 정책을 사용했다. 괜히 반응을 보였다가 오히려 세간의 관심이 증폭되는 현상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다 빈치 코드’의 인기가 수그러들지 않고 날이 지날수록 현혹당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늘어나자 드디어 칼을 빼어들기에 이르렀다.

베르토네 추기경은 “다 빈치 코드는 황당하고 저속한 왜곡으로 로마 가톨릭교회에 대한 신뢰를 실추시키려는 악의적인 시도”라고 서슬 퍼렇게 공격했다. 최후의 만찬에서 옆에 앉은 사람은 예수가 사랑했던 애제자 요한(요한 13,23-26;18,15-16 등)이며, 12제자의 모습을 다양하게 그리다 보니 수염이 없는 미소년을 그리게 된 데 불과하다. 또한 마리아에 대해서 왜곡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이미 교황청에서는 1969년에 마리아 막달레나를 창녀로 규정한 게 교회의 실수였다고 인정한 바 있다.

그리스도교의 전통적인 가르침에 따르면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평생 홀몸으로 살았으며(마태 19,12) 죽은 후 부활·승천하여 하늘에 오르신 분이다(사도 1,9). 따라서 예수는 마리아와 결혼했고 그 혈통이 세세손손 이어졌다는 주장은 그리스도교의 핵심 가르침인 예수신성교리神性敎理(325년의 니케아 신경)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자, 2천년 그리스도교 전통을 뿌리째 흔드는 악마의 가르침이 된다.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

그리스도교의 경전인 신약성서에서 예수의 일생을 집중적으로 다루는 작품은  복음서이다. 복음서의 보도에 따르면 예수는 세례를 받고 나서 악마에게 유혹을 당했으나 멋지게 그 유혹을 이겨냈다고 한다(누가 4,1-13). 그런데 묘하게도 13절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이 발견된다. “그러자 악마는 유혹을 다 하고 나서 때가 되기까지 그분에게서 물러갔다.”

‘때가 되기까지’라고? 그렇다면 악마가 다음 기회를 노리며 일단 후퇴했다는 뜻 아닌가? 무언가 숨어있을 것만 같은 본문이다. 신화의 본고장인 크레타 섬 출신이며, 반 교회적인 성향을 가졌고, 노벨 문학상에 두 번이나 추천되었던 소설가 니코스 카잔차키스(1885-1957)를 자극시키기에 충분한 내용이었다. 그는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1951)이라는 소설을 통해 예수에게 주어졌던 세 가지 유혹 외에, ‘때가 되자’ 또 한 번의 유혹이 주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카잔차키스의 소설을 원작 삼아 마틴 스콜세지 감독(택시 드라이버)이 완성한 영화가 바로 ‘예수의 마지막 유혹’(The Last Temptation Of Christ, 미국, 극영화, 1988년, 164분)이다.

영화에서는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정신이 혼미해졌을 즈음 귀여운 소녀가 십자가 밑에 서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 소녀는 예수의 손목과 발에 박힌 못을 뽑아내고 상처에 입을 맞추어 치료해준다. 그리고 빈 십자가를 뒤로하고 같이 걸으면서 소녀는 예수에게 몇 가지 말을 던진다.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다. 그 정도면 충분했으니 이제 가정을 꾸며 남은 생애를 행복하게 살도록 하시오.’ 예수는 소녀의 권유에 따라 마리아 막달레나와 결혼해서 아들, 딸 놓고, 그야말로 행복한 삶을 누린다.

로마군대가 예루살렘을 멸망시킨 기원 후 70년, 예수는 죽음 앞에 서고 임종의 자리에 제자들이 찾아온다. 그들 중 유다가 하느님의 구원계획이 차질이 생겼다며 예수를 강력히 비난한다. 예수는 십자가에 달려 죽었어야만 했던 것이다. 그 때 예수는 하느님이 보낸 수호천사의 핑계를 대는데, 수호천사인줄 알았던 소녀가 악마였음이 판명 난다. 예수의 빗나갔던 인생은 일장춘몽으로 끝나고 순식간에 십자가로 돌아온다. 숨을 거두는 예수, 그의 얼굴은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이 영화가 처음으로 개봉될 당시 세계적으로 큰 파문이 일어났다. 예수의 삶을 왜곡했다는 비난과 더불어 배신자 유다를 미화한 이야기 설정, 그리고 마리아 막달레나와 예수의 정사 장면 등이 교계에 충격을 던졌다. 그 여파로 전 유럽에서 관람 거부운동이 일어났고 프랑스에서는 영화가 상영되던 극장에서 폭탄이 터지는 사태까지 있었다. 그리고 한국은 개신교단의 강력한 항의에 부딪쳐 아예 상영조차 되지 못했다. 필자는 프랑크푸르트에서 이 영화를 보았는데 극장 앞에 장사진을 치고 촛불 시위를 하던 군중을 겨우 뚫고 들어갔던 기억이 난다.

그저 소설일 뿐…

교회에서 아무리 마리아를 복권시켜 주었다 할지라도 예수가 마리아 막달레나와 결혼했으며 그 후손이 있다고 하는 것은 세간에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앞서 거론한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 외에도 1998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호세 사라마구도 그런 가능성을 펼친 바 있다. ‘다 빈치 코드’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으며, 다만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보다 소설적인 재미가 훨씬 뛰어나다는데 그 차이점이 있다.

필자의 견해로, ‘다 빈치 코드’는 중세에 유행했던 소설 ‘성배를 찾는 기사단’에서 신화적인 틀을 벗겨내고 역사적 사실을 보려 했다는 점에서, 현대판 ‘성배를 찾는 기사단’에 불과하다. 소설가의 기막힌 화술에 정신을 놓아 사실과 허구를 구별하지 못해서는 곤란하다. 소설이란 재미있으면 그뿐인 것이다.

댄 브라운은 교황청의 반응이 있자마자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소설이 마리아 막달레나의 진실을 담고 있다고 응답했다. 필자로서는 한편으로 ‘교황청에서 그저 무시하는 태도를 견지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아무튼 주사위는 던져졌고 시합은 제 2라운드에 접어든 것은 분명하다. 좀 더 지켜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