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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추석설교, 최도미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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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9. 19 (추석설교)/ 1요한3:17-18, 마태25:34-40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먼저 추석명절을 맞이하여 교우님과 가정에 기쁨과 평화 넘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그리고 이 땅을 지켜온 선조들의 영혼이 주님 안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시기를 기원합니다.

펄벅 여사가 한국을 방문하면서 시골을 여행할 기회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 때 충청도 시골 마을을 지나면서 소달구지에 짐을 실고 가는데 농부도 한 짐을 짊어지고 소와 함께 걸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감동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한국의 문화와 정신이야말로 21세기 자본주의의 위기로부터 이 세계를 지킬 수 있는 위대한 정신을 간직한 민족이라고 감탄했다고 합니다.

아마 근면한 농부의 모습도 모습이었겠지만 소와 함께 짐을 나누어 질 정도로 소를 아끼고 사랑하는 농심을 보았던 것입니다. 하찮은 짐승도 이럴 진데 다른 사람들이야 오죽할까? 이런 생각을 한 것입니다.

저는 이 모습을 보면서 이삭의 아내를 선택하기 위해 하느님께 바쳤던 아브라함의 종의 기도가 생각납니다.

“저는 지금 이 샘터에 서 있습니다. 저 성에 사는 여자들이 물을 길으러 나오면 저는 그들에게 항아리를 내려 물을 마시게 해달라고 하겠습니다. 그들 가운데서 저에게 물을 마시게 해줄 뿐만아니라, 제 낙타에게도 물을 마시게 해주겠다고 나서는 아가씨가 있으면 그가 바로 하느님의 심복 이사악의 아내감으로 정해주신 여자라고 알겠습니다”

어떻습니까? 여기서 하늘마음, 천심이 느껴지십니까? 천심이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요, 나눌 수 있는 넉넉한 마음, 훈훈한 마음을 의미합니다. 나그네를 불쌍히 여기고, 가축까지도 불쌍히여 나눌 수 있는 마음입니다. 이게 복받을 마음입니다.

어느 민족이든 그 나라마다 축제가 있습니다. 축제는 그 민족의 얼이요 정신입니다. 이스라엘은 유월절이란 축제를 통해 하느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삶의 방식과 법도를 후손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이처럼 우리 민족도 우리의 삶의 방식과 가치를 명절이란 축제를 통해 전해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 같기만 하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단지 가을의 풍족한 결실이 있기 때문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한해의 결실을 놓고 조상님과 하느님께 감사할 줄 알았고, 첫 곡식으로 빚은 음식과 과일을 가까운 이웃들과 함께 나누는 넉넉함과 훈훈한 인심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정말 이런 훈훈한 인심이 살아났으면 좋겠습니다. 그렇다면 추석명절을 통해 우리가 배워야할 조상님들의 삶의 지혜는 무엇일까요?

먼저 감사할 줄 아는 삶입니다.

추석은 한 마디로 감사의 축제입니다. 결실을 거두기까지 자신들을 도와준 세상 모든 것들에 대해 감사했습니다. 하늘에 감사했고, 조상님들이 가꾸어 논 유산에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결실을 얻기까지 자신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준 천지만물에 대하여 감사했고, 함께 땀흘려온 이웃에게 감사했습니다. 이 세상에 복 받을 마음이 어떤 마음일까요? 바로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아무리 천하를 가졌다 해도 감사함이 없다면 그것은 불행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감사란 어떤 마음일까요? 감사란 만족할 줄 아는 마음이요, 나눌 줄 아는 마음입니다.

부족하다고 생각하면 감사함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감사함이 없으면 나눌 수 없습니다.

나눔이 없는 세상처럼 삭막한 세상은 없습니다. 때문에 콩 한 쪽도 나누어 먹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우리나라 말에는 “주고 받는다.”는 말은 있어도 “받고 준다.”는 말은 없습니다. 받고 주는 마음이 이기적인 마음이라면, 주고받는 마음은 사랑의 마음, 이타적인 마음, 나눔의 마음입니다. 하늘마음입니다. 천심입니다. 이처럼 우리 조상은 나눔을 미덕으로 여겼습니다. 나눌 줄 알아야 하늘 복을 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때문에 나눌 때는 넉넉하고 차고 넘치게 나누었습니다. 쩨쩨하게 나누면 복이 달아난다고 가르쳤습니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했습니다. 좋은 습관을 어릴 때부터 가르쳐야 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 어머니는 한술 주면 정이 없다고 해서 늘 한술 더 주셨습니다. 누가 가르쳐서 배우신 것이 아니라 옛날부터 그렇게 사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옳다는 것을 삶속에서 터득하시고 이것을 자식들에게 가르치신 것입니다.

정 없는 형제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정 없은 가정, 정 없는 부부들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런데 정은 초코파이를 사 준다고 생기는 게 아닙니다. 정은 기꺼이 나눌 수 있을 때 생기는 겁니다.

예전에 배웠던 초등학교 교과서가 생각납니다. 형이 한 밤중에 볏단을 들고 동생 집으로 향합니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그대로 있습니다. 형은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없어져야할 볏단이 그대로 있으니 말입니다. 다음 날 범에도 볏단을 지고 갑니다. 그런데 저 멀리서 사람이 다가옵니다. 동생이었습니다. 둘은 서로 놀랍니다. 서로 볏단을 지고 있었습니다.

형님이 동생에 묻습니다.

“너는 어쩐 일이냐?”

“저는 형님을 생각해서 제 볏단을 형님께로 옮기고 있는 중입니다. 형님은 어머님을 모시고 사니 얼마나 힘드시겠습니까?”

그러자 동생은 말합니다. “아니 그러면 형님은 어쩐 일이십니까?”

그러자 형이 말합니다. “나도 네 집에 볏단을 옮기고 있는 중이야. 나야 풍족하지만 너는 조카들을 얼마나 힘들겠니!”

그러자 둘을 부둥켜 안고 눈물을 흘립니다. 어떻습니까? 멋지지 않습니까? 행복해 보이지 않습니까? 이렇게 살아야 살맛나는 세상이 되는 겁니다.

지금은 찾아보기 힘든 풍경이 되어버리고 말았지만 재래식 시장에 가면 늘 덤이란 것이 있습니다. 딱 맞추어 주지 않습니다. 조금 더 얹어 주시는 넉넉함이 있습니다. 이게 우리의 사는 모습입니다.

바로 이런 넉넉한 인정, 훈훈한 사랑이 있어야 사람 사는 세상이라고 가르쳐왔던 것입니다.

 

때문에 비록 가진 것이 없이 가난하게 살았지만 마음은 넉넉했던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웃을 소중히 여길 줄 알고, 감사할 줄 알고, 나눌 줄 알았기에 넉넉했던 것 같습니다. 바로 이런 정신을 갖고 살아가도록 가르친 축제가 바로 추석명절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저는 이런 추석 전통은 살려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인정과 훈훈함이야말로 메말라가는 이 시대를 적실 수 있는 단비와 같기 때문입니다.

금세기 미국의 취고의 작가로 알려진 포머스 울푸는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란 소설에서 현대인은 마치 고향을 잃어버린 “실향민”과 같다고 했습니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으로 과거에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편리하고 풍요로운 세상은 만들었지만 인간의 마음은 더 메말라가고 오히려 물질의 노예로 전락되어 인간성을 상실한 채 살라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만 잘 살면 되고, 나만 가지만 된다고 하는 이런 이기적인 마음이 많은 것을 갖고도 불행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현대인의 비극이라고 고발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서로 나눌 수 있을 때가 가장 아름답습니다. 사람 (人)인자처럼 되야 합니다. 서로가 기대어 주고, 서로 나누는 모습이 아닙니까? 서로 기대어 주는 버팀목이 되어 줄 수 있을 때 아름답습니다. 그러므로 인간다운 모습이란 더 갖기 위해, 더 높이 올라가기 위해 싸우는 모습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며, 서로 나누며, 서로를 보듬고 살아가는 것이 인간다움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감사함을 아는 것이야 말로 가장 아름다운 행위요, 서로 나누는 일이야 말로 축복받을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추석은 이웃을 늘 기억하는 명절입니다.

우리 민족처럼 이웃을 소중히 여긴 민족이 있을까요? 이웃은 살아가면서 서로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들임을 느끼게 해 준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이 명절 때만 되면 고향을 찾는 이유는 물론 고향에 부모 형제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정든 동무와 이웃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때문에 우리 조상들은 “세 냥 주고 집을 사고 천 냥 주고 이웃을 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