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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을 주는 신앙(연중 20주일, 최도미닉 신부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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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8. 18(연중20주)/ 이사5:1-7, 히브11:29-12:2, 루가12:49-56

도전을 주는 신앙

 

유명한 신학자 “패커”는 세속화 되어가는 교회를 온탕에 비유했습니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금으로써 육체적 피로를 풀어 주는 곳이 바로 온탕입니다. 이처럼 오늘날 세속화 되어가고 신앙인들은 교회를 마치 피곤한 심신이 쉬고 위로 받는 곳, 하느님의 축복을 받기 위해 필요한 곳으로만 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아주 중대한 문제가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복음에 비추어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고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야 하는 도전을 잃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이런 믿음에 대하여 새로운 도전을 주고 있음을 깨닫게 합니다. 주님은 세상을 불태우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평화를 주려는 것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오셨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안주하려는 믿음에 새로운 도전을 주는 말씀입니다.

참된 믿음은 안주하는 삶이 아니라 끝없이 도전을 줍니다. 그리고 끝없이 갱신해 가는 삶을 요구합니다. 21세기의 유명한 신학자인 몰트만은 살아 있는 물고기가 아무리 작더라도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가는 것처럼 세속의 물을 거슬러 올라가 참된 희망과 생명을 주는 것이 신앙이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참된 신앙은 언제나 삶에 새로운 도전을 줍니다.

 

 

먼저 신앙은 내 자신의 삶과 인격에 도전을 줍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를 믿고 살아간다면 가장 먼저 도전을 받는 것은 내 자신의 삶이요, 내 자신의 인격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를 알고 자신이 받은 도전을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을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바울로가 지금까지 자신의 살아왔던 자신의 삶에 심각한 도전을 받고 있는 것을 드러내 주는 말씀입니다.

바울로는 엘리트가 되기 위해 자신의 모든 삶을 걸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 모든 것을 성취한 사람입니다. 그는 최고의 학부에 들어가서 최고가 된 사람입니다. 그리고 남들이 그토록 부러워했던 귀족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이요, 로마의 시민권까지 가졌던 사람입니다. 세상 적으로 보면 모든 것을 다 가춘 사람입니다. 출세했고, 성공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알면서부터 전에는 의식하지 않았던 자아가 심각하게 도전을 받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불을 지르러 왔고, 이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았겠느냐? 라고 말씀하십니다. 불이 타오르면 예전에 있던 것들은 사라집니다. 이처럼 주님은 믿음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예전의 잘못되었던 자신의 삶과 인격에 변화가 일어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바울로는 바로 이 도전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 13절 말씀에 “육체를 따라 살면 여러분은 죽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힘으로 육체의 악한 행실을 죽이면 삽니다.”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참된 신앙은 육체의 악한 행실을 불태우도록 도전을 줍니다. 주님은 이런 불이 우리의 삶속에서 타오르기를 원하십니다.

“온갖 무거운 짐과 우리를 얽어매는 죄를 벗어버리고 우리가 달려야할 길을 꾸준히 달려가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의 근원이시며 완성 자이신 예수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히브12:1-2) 그래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살아야합니다.” (갈라2:20)

 

 

그 다음으로 찾아오는 것은 세상을 보는 인식에 도전을 줍니다.

“내가 이 세상을 평화롭게 하려고 온 줄로 아느냐, 사실은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라고 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반대하고 아들이 아버지를 반대할 것이며 어머니가 딸을 반대하고 딸이 어머니를 반대할 것이며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반대하고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반대하여 갈라질 것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는 세상을 보는 새로운 마음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 동창을 만났습니다. 얼마나 반갑던지. 왜 이렇게 반가운가요. 어린 시절을 함께 공부했다는 이해관계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이해관계로 묶여 살아갑니다. 같은 고향, 같은 나라, 같은 종교, 같은 학교에 살고 있다는 이유로 친해지기도 하고 서로 협력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팔이 안으로 굽는다는 말을 합니다. 우리는 바로 이런 이해관계 속에서 보는 세계관을 넘어서야 합니다.

가족은 어떤가요. 우리는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합니다. 이는 가족이 얼마나 강한 결속력을 갖고 있는지 잘 표현해 준말입니다. 사실 가족 공동체만큼 강한 결속력을 가진 공동체는 없을 것입니다. 가족이란 이유로 우리는 서로 이해하고, 서로 돕고 나누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서로를 소중히 여깁니다. 그런데 이런 가정도 결국은 핏줄이라는 이해관계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때로는 이런 이해관계들이 우리를 어둡게 합니다. 봐야할 진실을 보지 못하고, 가야할 길을 가지 못하게 합니다. 때문에 이런 이해관계를 뛰어 넘을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서로 싸워야 하고, 가정은 분열되라고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런 이해관계를 넘어설 수 있어야 한다는 취지로 하신 말씀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이해관계로 맺어진 관계를 넘어 이제는 영적인 관계가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어머님의 사랑처럼 순결하고 고귀한 사랑은 없습니다. 그래서 작고하신 양주동 교수님은 어머니의 사랑은 하늘보다 높고, 바다 보다 깊다고 노래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어머니의 사랑, 그 고귀하고 순결한 사랑도 내 자식, 내 가정이란 울타리를 넘어설 수는 없습니다. 이제는 이 울타리를 넘어서야 합니다. 지경을 넓혀야 합니다. 가정에서 느꼈던 이해와 사랑을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피보다 진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으로 하나 되는 것입니다.

“누가 내 형제요 자매입니까?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가 바로 내 형제요 자매입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혈육으로 맺어진 이해관계를 뛰어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게 우리에게 주신 세상을 보는 새로운 도전입니다.

얼마 전 야구 개막전에 시구를 하던 에덤 킹이란 어린이가 생각납니다. 두 발을 의족에 의지하여 뛰뚱뛰뚱 걸으며 공을 던지며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어떤 부모이기에 저렇게 밝고 맑고 아름답게 아이를 키웠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어린이를 키워온 사람은 그를 나아준 부모도, 그리고 조국도 아니었습니다. 그의 출생과는 전혀 상관이 없었던 어느 미국인 양부모에 의해서 양육되었습니다. 그 미국인은 가정을 갖고 있는 크리스챤이었습니다. 자기 자녀를 보살피기에도 부족한데 그는 장애아들만 양자로 받아들여 키우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모습에서 우리가 추구해야할 세상이 어떤 것인지를 다시 한 번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영적인 사랑을 나누는 것입니다. 사랑의 지경을 넓히면 영적인 사랑이 됩니다.

 

그러므로 이제 세상을 보는 눈을 넓혀야 합니다. 이제는 좀 더 넓은 곳을 향해야 합니다. 내 가정, 내 교회, 내 마을, 인간 중심이란 울타리를 벗어나 더 넓은 세상을 향해 이웃을 향해야 합니다. 이게 세상을 보는 그리스도인의 도전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시대의 뜻을 보는 도전입니다.

나라고 하는 한계, 우리라고 하는 한계를 넓혀 예수님의 눈으로 보십시오. 그러면 거짓과 진실이 보입니다. 그리고 역사의 흐름이 보입니다. 우리의 역사가 어디로 가야 생명의 길로 갈 수 있는지, 평화의 길로 갈 수 있는지 보입니다.

내 종교를 위해 다른 종교는 무시해도 되는 것인지, 내 나라를 위해 다른 다라는 무시해도 되는 것인지, 우리의 편리를 위해 자연을 파괴해도 되는 것인지, 우리는 신앙의 눈으로 시대의 뜻, 시대의 징조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까지 가야합니다. 예수 잘 믿어서 축복받고, 천국 가는 것으로 만족한다면 그것은 반쪽짜리 신앙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믿음은 내 개인이 변화될 뿐만 아니라 세상을 변화시키는 믿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때문에 교회는 이 시대의 희망이 되야합니다. 빛과 소금이 되야합니다.

 

신영복 선생님의 글 중에 이런 말이 있어 인상에 남았습니다. 세계의 지붕이라고 하는 히말라야 앞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고 합니다. 그것은 히말라야를 정복하고 기뻐하는 사람들에게서가 아니라 그곳에서 살고 있는 네팔 사람에게서 찾았다고 합니다.

그들은 산에게 이렇게 말한다고 합니다. “산은 정복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신입니다. 우리는 산이 허락하는 만큼의 땅만을 일구어 살고 있습니다.” 이 순박한 이야기가 우리 문명이 어디를 향해 가야하는 지를 깨닫게 해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언제나 자기를 중심으로 자연을 봅니다. 이런 생각이 자연을 끝없이 파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잘못이란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인간 중심이란 울타리를 벋어나 더불어 살고 있는 모든 생명체를 볼 수 있는 눈을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눈으로 보십시오. 자연은 우리의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야할 생명체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향해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이기적인 욕심 때문에 자연을 함부로 다루어서는 안 된다고, 더 이상 자연을 파괴해서는 안 된다고 외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편리와 이익만을 생각하기 때문에 자연도 우리와 함께 살아가야할 생명체임을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자연도 우리와 함께 살아야 하고, 이 아름다운 자연을 세세 만대에 물려주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함께 살아야할 이웃임을 알아야합니다. 이게 이 시대의 뜻입니다.

얼마 전 일본은 한일합방 100주년을 맞이하면서 한국 국민에게 깊은 사과를 했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이 원치 않는 합방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반성이 빠져 있습니다. 이렇게 남의 나라를 침략하고 전쟁을 일으킨 것에 대한 사죄입니다. 그들은 아직도 자신들이 저지른 침략행위를 정당한 행위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될까요? 자국의 입장에서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국의 입장에서 역사를 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그들은 한국을 침략한 것이 아니라 개화시켰다고 합니다. 한국이 성장한 것은 자신들이 문명을 전해주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이제는 역사를 보는 마음을 이제는 바꾸어야 합니다. 어떤 이유이든지 한 나라가 한 나라를 침략하거나 지배하는 것은 잘못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물속에 자기 자신을 비추지 말고 사람에게 비추라고 했습니다. 이웃 속에서 내 자신이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볼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는 지경을 넓혀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야 참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삶이 무엇입니까? 학연, 지연, 혈연으로 뭉쳐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모습입니까? 얼마나 추해보이는 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것을 뛰어 넘을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을 그렇다 치고, 교회만이라 뛰어 넘어야 합니다. 이제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뜻에서 우리의 삶을 찾아야 합니다. 이게 세상을 향한 그리스도인의 도전입니다. 나만을 아는 이기적인 삶에서 주님의 삶을 본받아 자신의 삶을 나누어 감으로 이기적인 삶을 살아가는 세상에 도전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 시대의 뜻을 알라”고 하신 말씀하셨습니다.

이 시대의 뜻, 그것은 도전을 주는 삶입니다. 내 삶을 복음의 빛 속에 비추어 바로 서 있는지를 깨닫고 돌아서는 삶이 이 시대의 뜻입니다. 그리고 복음의 빛에 비추어 이 세상이 바르게 가고 있는지 보고 그 대안을 줄 수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이 시대의 뜻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