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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박사와 같은 믿음으로(공현축일, 최도미닉 신부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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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현축일. 이사60:1-6, 에페3:1-12, 마태2:1-12)

동방박사와 같은 믿음으로

 

탈무드를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세 아들에게 유산으로 말 17마리를 물려주었습니다. 그런데 큰 아들에게 2/1을, 둘째에게는 3/1을 그리고 막내에게 9/1을 주라고 했습니다. 도무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랍비를 찾아갔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러자 랍비가 “그럼, 내 말을 한 마리 주겠네.”라고 했습니다. 말을 받은 형제들은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형은 9마리, 둘째는 6마리, 그리고 막내는 2마리, 그런데 한 마리 남았습니다. 그래서 형제들은 그 한 마리를 다시 랍비에게 돌려주었다는 것입니다.

서로 가지려하는 한 해결점은 없습니다. 그 하나를 갖기 위해 서로 싸우고 미워할 것입니다. 그런데 주고 나니 해결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여기서 공현을 발견하셨습니까?

 

주님은 누구나 볼 수 있도록 자신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누구나 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탈무드의 말씀처럼 깨어 있는 사람만이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동방 박사들이 주님을 경배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처럼 주님은 당신의 모습은 세상 반방에 보여주셔서 모든 백성들이 하느님의 축복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셨습니다.

 

“이것을 보는 네 얼굴에 웃음의 꽃이 피리라. 너의 가슴은 벅차올라 부풀리라. 바다의 보물이 너에게로 흘러오고 민족의 재물이 너에게로 밀려오리라.”(이사60:5)

그렇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주님을 볼 수 있어야합니다. 왜냐하면 그 분을 볼 때 거기에 축복이 있고, 행복이 있고, 진정한 평화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말씀을 통해 공현의 신비를 깨달아야 합니다.

 

먼저 주님은 진리를 찾는 자에게 자신을 계시해 주십니다.

이상하고 크고 빛난 별이 밤하늘을 비추고 있습니다. 그저 밤하늘을 한번만이라도 쳐다만 보았더라면 금방 볼 수 있었을 텐데, 왜 다른 사람들은 그 별을 보지 못했을까요?

어두운 밤에는 하늘을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별을 볼 수 있습니다. 집속에 있거나 먹고 마시기를 즐겼다면 밤하늘을 볼 여력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한번 하늘을 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하늘을 볼 여유가 없습니다. 이제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를 찾기 위해 분주했던 마음을 멈추고, 무엇이 참된 삶일까를 한번쯤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그러면 쉽게 예수님이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알게 됩니다.

 

어떻게 해서 동방박사들은 이 이상한별을 보았을까요? 그것은 관심입니다. 어둠을 밝히는 별들에 대하여 조금만 관심을 가졌어도 이상하리만큼 빛나고 있는 별을 금방 알아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시대와 장소는 달라도 별은 언제나 그 자리에서 빛나고 길을 찾는 사람들에게 그 길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천 년 전에 나타났던 별이 지금은 없어졌을까요? 아닙니다. 그 별은 여전히 어둠 속에서 가장 큰 별로 빛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별은 언제나 그 자리에서 길을 찾는 사람들에게 지표가 되어줍니다. 이처럼 주님의 별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별은 지금도 우리 가운데 떠올라 우리가 가야할 길을 비추고 있습니다. 이 별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요한은 이 별을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있으며 하느님께서는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1요한4:16)

 

그런데 그 빛이 찬란하게 떠올랐습니다. 누구나 볼 수 있게 그 빛을 드러내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가야할 곳을 가르쳐 주십니다. 어둠 속을 헤매는 백성, 무엇이 사람답게 사는 길인지, 무엇이 모두를 살리는 생명인지, 무엇이 우리가 가슴에 품고 살아야할 진리인지 비추어줍니다. 저는 지금처럼 이 빛이 절실할 때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정치인들은 대 통합을 이루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양극화로 이루어진 우리의 경제위기를 극복하겠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위에 찬란히 빛나고 있는 별을 보야합니다. 그리고 그 별이 가르치는 곳으로 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2천 년 전처럼 보려하지 않고 가려하지 않습니다.

 

동방박사들은 빛이 비추는 곳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 예수를 요한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리스도께는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1요한3:16)

 

그렇습니다. 시대가 다르고, 나라가 다르더라도 별을 보고 길을 찾는 것은 똑같습니다. 이처럼 어둠을 밝힐 수 있는 진리를 탐구하는 삶은 비슷한 것 같습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구유를 보면 사랑이 보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거짓 사랑이 아닙니다. 이기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나를 주는 사랑입니다. 밥이 되는 사랑입니다. 십자가에 자신을 못 박아 나를 죽이는 사랑입니다. 이게 우리가 보아야할 찬란한 빛입니다.

 

자기를 위해 남을 죽이는 십자가를 보던 사람은 볼 수 없습니다. 4만불 소득을 외치며 지금 슬퍼하고, 애통해 하는 사람의 아픔을 안아주지 못하는 사람은 볼 수 없습니다. 다만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을 위해, 남을 위해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을 수 있는 사람만이 볼 수 있습니다.

 

동방박사는 하느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빛을 찾기 위해 갈망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별을 탐구하다가 유난히 빛나는 별을 본 것입니다. 그래서 그 별을 찾아왔던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을 아는 비밀은 진리를 찾는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무엇이 옳고 바르고 참된 삶인지 찾고 구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교회에 다니고 예수를 믿는다 해도 참된 삶을 찾는 일을 멈춘다면 우리는 주님을 볼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메시아가 나타나기를 얼마나 기다렸습니까? 그런데 정작 메시아의 별을 본 사람들은 유다인들도, 헤로데도 아니고 율법학자들도 아니었습니다. 바로 동방의 박사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있는 자리에서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열심히 했던 목동들이었습니다. 피곤하다고 잠들지 않았습니다. 세상 유혹에 빠져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잊지 않았습니다.

 

자, 이제 보십시오. 어둠 속에 큰 별로 떠오른 예수를 바라보십시오. 모든 별들 중에 가장 큰 별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요구되는 것은 떠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보기는 합니다. 그런데 떠나야 할 자리에서 주저합니다. 신앙은 지식이 아닙니다. 느낌도 아닙니다. 자신이 알고 느끼고 깨달은 바를 실천에 옮길 수 있어야 합니다. 생각 안에만 존재하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4절 말씀을 보면 “예루살렘이 온통 술렁거렸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난 소식을 듣고 메시아가 태어난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군중들은 술렁거렸습니다. 그런데 술렁거리면 무엇 합니까? 메시아가 태어났다고 흥분하고 술렁거렸지만 그들은 예수를 보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신앙은 감동이나 느낌이 아니라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은 메시아가 어디에 태어날 것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그들은 이사야 예언의 말씀을 들어 아주 정확하게 “유대 땅 베들레헴”이라고 동방박사들에게 알려 주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정작 예수를 보지는 못했습니다. 이처럼 신앙은 지식이 아닙니다.

 

그리고 헤롯은 어땠나요. 자신도 경배할 터이니 찾거든 자신에게 알려 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천사는 동방박사들에게 헤롯에게 가지 말라고 알려주었습니다. 왜 가지 말라고 했을까요? 헤롯은 생각과 행동이 다른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말과 행실이 다른 이중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은 결코 예수님을 볼 수 없습니다.

혹시 헤롯처럼 말과 행동이 다른 것은 아닙니까? 남에게는 용서하라고 하면서 정작 자신은 용서하지 못한 채 있는 것은 아닙니까? 남에게는 나누라고 하면서 정작 자신은 움켜쥐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예수를 본 사람은 그 별을 본 사람도, 그리고 그 별이 어디를 비추고 있는지 가르쳐 준 사람이 아닙니다. 그 별을 따라 쫓아간 동방박사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던 목동들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옳다는 것을 마음에만 두지 마십시오. 아는 것에 멈추지 마십시오. 그것을 자신의 삶으로 가져가야 합니다.

 

나누어야 한다고요. 그런데 잘 안되나요.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해야 하는데 잘 안되나요. 안된다고 멈추게 되면 주님을 만날 길이 없습니다. 과감하게 떠날 수 있었습니다. 주교님은 3년 동안 우리 성공회를 키우자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기도하고, 양육하고, 전도하자고 하셨습니다. 이거 모르는 사람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이루려면 떠나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온전히 봉헌하였습니다.

동방박사들은 아기 예수를 경배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가져온 보물을 드렸습니다. 황금과 유향과 몰약입니다. 이 봉헌은 메시아의 별이 되어 세상을 비추게 됩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을 예수에게 인도할 것입니다.

물론 황금은 물질을 의미합니다. 성도는 누구나 주님의 사역을 위해 자신의 물질을 드려야 합니다. 주님은 물질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만큼 구체적으로 당신의 사역을 위해 물질이 봉헌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저는 지난 해 교우 여러분이 열심히 봉헌주신 것에 정말 감사드립니다. 분에 넘치도록 봉헌해주셨습니다. 주님을 위해 교회를 위해 봉헌해주시기 바랍니다.

교회는 청소년들의 양육을 위해 아낌없는 투자해야 합니다. 또한 성도들을 양육하고 훈련시켜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세상을 향해 나눔과 섬김의 사역을 통해 주님을 증거 해야 합니다. 그리고 복음이 끝없이 선포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일을 위해서는 황금을 바쳤던 동방박사처럼 봉헌생활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말라기 3장 10절 말씀을 보면 “너희는 열의 하나를 바칠 때, 조금도 덜지 말고 성전 곳간에 가져다 넣어 내 집 양식으로 쓰게 하라. 그렇게 바치고 나서 내가 하늘 창고의 문을 열고 갚아 주는지 갚아 주지 않는지 두고 보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십일조 생활은 그 교회의 힘이자 또한 성도의 축복입니다.

 

두 번째는 유향입니다.

유향은 제단에서 제물을 바칠 때 쓰는 성물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제단에 바쳐질 유향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을 향해 봉헌되는 거룩한 예배는 우리가 드리는 최고의 유향입니다. 성도는 누구나 주일을 지켜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과 기도의 삶을 통해 참된 믿음의 삶이 무엇인지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삶을 하느님께 드리는 예배, 거룩한 산제사로 바쳐지는 예배가 우리가 바칠 유향입니다. 예수 사랑으로 서로 나누고 감싸주고, 용서하고, 배려해 주십시오. 그리스도의 향기가 될 것입니다.

 

셋째, 몰약입니다.

몰약은 시체가 썩지 않도록 하는 방부제입니다. 죽음을 이겨내는 힘, 부활의 간구입니다. 그런데 바울로의 말씀처럼 부활을 위해서는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죽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내 안에 살고, 내가 주님 안에서 살려면 내가 죽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아버지, 내가 이 사람들을 위하여 이 몸을 바치는 것은 이 사람들도 참으로 아버지께 자기 몸을 바치게 하려는 것입니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를 죽이면 주님이 삽니다. 성령께서 나와 함께해주십니다.

 

오늘 말씀은 동방박사들이 자기 나라로 돌아 간 것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지요. 그런데 그 복음은 유다를 넘어 온 세상에 전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제 구원의 계시는 유다뿐이 아닙니다. 사마리아와 땅 끝에 이르기까지 전해지기 시작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유다가 내 가족이라면, 사마리아는 내 형제요, 땅 끝은 이 세상 모든 곳입니다. 이렇게 해서 주님은 빛은 나에게서 세상으로 비추어 나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공현하십니다. 한 아기를 통해서 공현하신 것처럼 나를 통해서 공현하십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공현하신 주님을 바라보고, 나를 통해 공현하시도록 동방박사들처럼 나를 도구로 드릴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