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말씀과 신앙나눔 돼지 떼 속으로나 들어거라(연중 12주일 설교 / 최은식 신부님)

돼지 떼 속으로나 들어거라(연중 12주일 설교 / 최은식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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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6. 23 (연중12주)루가8:26-39 1열왕1-16, 갈라3:23-28

                                    돼지 떼 속으로나 들어가라

다석 유영모 선생님은 “사람이 모이면 삶이 된다”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만 산다면 삶에 대해 신경 쓸 필요도 없고 문제도 대두되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혼자 살 수 없습니다. 싫든 좋든 함께 더불어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 “人”자는 두 개의 막대기가 서로 기대는 모습입니다. 어느 하나가 빠져버리면 쓰러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게 사람입니다. 하느님은 이웃을 만들어 주실 때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의 일을 거들 짝을 만들어 주리라” 하셨습니다. 여기서 그의 일이 어떤 일입니까? 인간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일은 행복입니다. 이 행복을 위해 필요한 사람입니다. 때문에 행복을 위해 우리는 이들과 함께 어울려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서로 돕는 배필, 행복한 관계가 될 수 있는지 깨닫는 길, 이게 신앙의 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악령에 들려 무덤을 배외하는 한 사람이 제정신이 들어 다시 가정으로 돌아가는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함께 살 수 없었던 사람이 함께 사는 곳으로 다시 돌아갔다는 이야기입니다. 다시 말하면 깨어진 관계가 다시 회복된 것입니다.

어렸을 때 공동묘지를 지나려면 아무런 이유도 없이 두려워했던 생각이 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그 무섭고 두려운 무덤을 혼자 배외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이 사람은 평안히 안식을 누려야할 집에서 머물지 못하고 무덤을 배외하고 있을까? 그리고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살아야할 사람이 서로 어울리지 못하고 이런 곳을 배외하고 있는 것일까? 관계가 깨어졌기 때문입니다. 관계가 깨지면 정말 무섭고 사나와 집니다. 고독해 지고 외로워집니다. 그리고 이것이 깊어지면 결국은 삶의 의미를 잃고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얼마 전 어린이 집 선생님이 아이가 떠든다고 아이를 바늘로 찔렀다고 합니다. 이건 사람 사는 관계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치 무덤을 배외하고 있는 사람처럼 이런 관계를 정말 무섭고 살벌한 관계입니다. 그런데 이런 현상이 어디 어린이집뿐이겠습니까? 바로 이런 관계가 치유되야합니다. 회복되야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무덤을 배외하고 있는 사람, 어떻게 보면 내 자신일수도 있고, 또 내 가정일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사회일 수도 있고 우리의 역사 일 수도 있습니다. 무덤을 방황하고 있는 모든 관계는 회복 되야 합니다. 이게 신앙의 목표요, 주님이 이 땅에서 하신 일입니다. 그렇다면 서로 돕고 사랑해야할 관계들이 깨어진 모습은 어떤가요? 이것을 제대로 알아야합니다.

먼저 그들은 “옷을 걸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옷을 걸치지 않았다는 말은 벗고 있다는 말입니다. 어렸을 때야 벗고 있는 모습이 자연스럽고 천진스럽습니다. 그런데 다 큰 사람이 벗고 있다면 이는 수치스러운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옷을 입고 살아갑니다. 가정에서나 사회에서나 그에 맞는 옷을 입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옷을 벗고 사는 게 문제입니다. 그런데 마귀에 사로잡힌 이 사람은 옷을 걸치지 않았습니다. 수치스러운 행위를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수치스런 행위를 하면서 전혀 수치스럽게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게 비극입니다.

저는 요즘 일본 총리가의 모습을 보면서 정말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은 위안부 사건은 일본이 저지른 아주 잘못된 행위라고 말하고 있는데 자신들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른 나를 침략하고, 전쟁을 일으킨 부끄러운 과거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과장하고 자랑하고 있습니다. 일본만 그런가요? 얼마 전 종편 방송에서 5.18 광주 민주화항쟁을 북한에서 일으킨 소행이라고 방송을 해서 결국 중징계를 받게 되었다는 뉴스를 보았습니다. 부끄러운 일입니다.

사람이 성숙하면 가정 먼저 행하는 행위는 부끄러움을 알고, 더러운 것을 갈릴 줄 알게 됩니다. 부끄러운 행위를 부끄럽게 느끼지 못하면 서로에게 불행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부끄러움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얼마 전 뉴스 보도를 보았습니다. 어떤 어머니가 자신의 딸을 유흥가의 종업원으로 일을 시켰습니다. 그래서 기자가 따져 물었습니다. 어찌하여 엄마가 되어서 딸들에게 그런 일을 시킬 수 있습니까? 그러자 그 어머니 하시는 말씀이 직업에 귀천이 어디 있냐고 따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창피한줄 알아야 하는데 그걸 모릅니다.

이번에 사회복지사 교육에서 “사람이 되거라”라는 아주 짧은 영상 하나를 보았습니다. 개인의 인성이나 자질은 무시된 체 오직 공부만 하는 일그러진 우리의 교육현장을 지적한 내용입니다. 난사람보다는 든 사람, 든 사람보다 된 사람이 되는 게 교육인데 우리의 교육은 거꾸로 가고 있습니다. 든 사람, 된 사람은 필요 없고 오직 난 사람이 되라고 합니다. 학교도 부모도 그렇게 가르칩니다. 참으로 부끄러운 현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부끄러운 현실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로는 필립비 교인들을 향해 “자기네 수치를 오히려 자랑으로 생각하며 세상일에만 마음을 쓰고 있다.”고 눈물로 호소했는데 꼭 우리를 두고 하신 말씀 같았습니다.

 

다음으로 집이 없다고 했습니다.

집은 안식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집이 아니라 무덤을 배외하고 있습니다. 안식을 잃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행복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자살률은 세계 1위입니다. 행복지수는 꼴찌입니다.

 

법정 스님이 쓴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라는 글에서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우리 곁에 새소리가 사라져 버린다면 우리의 삶을 얼마나 팍팍하고 메마를 것인가! 새 소리는 단순한 자연의 소리가 아니라 생명이 살아서 약동하는 소리인 것을! 그런데 우리는 그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그 가슴을 잃어가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행복을 느낄 수 있는 마음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세상을 보십시오. 돈보다 명예보다 권세보다 더 귀한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이런 귀한 것들이 돈과 명예와 권세 때문에 무참히 짓밟히고 있습니다. 서로 믿어주고 있습니까? 신뢰하고 있습니까? 서로 사랑하고 있습니까? 마음을 열어보면 참으로 귀한 것들입니다.

비록 가진 것은 없지만 이런 마음들이 우리의 삶을 훈훈하게 하고 살맛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욕심과 이기심이, 그릇된 가치관이 이 행복을 짓밟고 있습니다.

얼마 전 잡지에 이런 글이 실려 있었습니다.

“흔히 네 잎의 크로바를 행운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세입의 크로바를 행복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네 잎의 행운을 찾기 위해 행복을 짓밟고 있다”고 했습니다.

나만 잘 사는 세상처럼 불행한 세상은 없습니다. 나만 잘 살려고 하는 행운을 잡기 보다는 더불어 살아가는 행복을 잡는 것은 어떨까 생각했습니다. 나만 잘 살려고 하는 이기적인 마음으로는 에덴동산에서도 행복할 수 없습니다. 이게 성서의 가르침입니다. “남보다 더”라고 하는 욕심이 우리를 얼마나 불행하게 하는지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다음으로 더 무서운 것은 그를 붙잡으려고 쇠고랑과 쇠사슬로 단단히 묶었지만 그것을 부수어 버리고 광야로 나간 것입니다.

이게 가장 큰 모순입니다. 결국은 언제나 혼자 남습니다. 고독합니다. 마르코 복음을 보면 “소리를 지르고 제 몸을 찢었다”라고 했습니다. 이런 행동을 못하도록 해도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힘이 너무나 강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런 강함은 고집에서 나옵니다. 참으로 고집에 센 것은 막을 길이 없습니다. 사실 신념과 고집은 다른 것입니다. 신념은 하느님의 뜻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을 줍니다. 그런데 고집은 나에게서 나옵니다. 그런데 고집은 나를 해치고 남도 해치는 아주 무서운 병입니다.

무덤을 헤매는 이 사람을 보십시오. 그는 어떤 일을 하던 그 결과는 자신을 자해하는 결과로 나타납니다. 고독으로 나타납니다. 독불장군이 됩니다. 이게 비극입니다.

 

내일 모래면 6.25 발발 63주년입니다. 저는 6.25전쟁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6.25에 대한 고정관념, 고집이 있습니다. 6.25를 “원수들이 침략한 그날, 어찌 우리 잊으랴!” 라고 합니다. 증오와 원한에 대한 적대감으로 그날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이런 고집, 편견을 버려야합니다. 이제는 남북의 평화와 생존을 위해 서로가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날로 기억해야 합니다.

얼마 전 성공회 대학교 김동춘 교수가 쓴 “한국전쟁 어떻게 기억해야 하는가?”라는 글을 보니 이런 글이 있습니다.

1994년 미국과 북한사이에 한판의 전쟁이 벌어질 뻔했다는 것입니다. 미국은 북한의 핵시설을 공격하기 위한 20일 작전에 돌입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는 우리 모두를 죽음으로 몰고 갈 전쟁의 비극 앞에서 미국이 북한을 혼내준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박수를 치며 기뻐했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카터 대통령이 비밀리에 북한을 방문해서 중재했기에 망정이지 이 일이 이루어 지지 않았다면 우리는 또 다른 전생에 휩싸였을지도 모릅니다. 마치 불나비처럼 무모한 싸움을 하는 것은 편견. 고집이 가져오는 비극입니다. 그러므로 상처를 넘어 치유로 가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얼마 전 방송에서 서울시가 “전쟁이 일어나면?” 이란 주제로 작품을 공모한다는 인터넷 광고를 실었다고 합니다. 그것도 창의성과 사실적 표현을 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저는 이런 주제보다는 “ ‘평화를 이루는 길’ 이란 제목을 실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이 사람을 집을 나가게 해서 무덤을 배외하게 하고, 자신의 몸을 자해하게 했던 것은 천성이 그래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은 바로 “군대”라는 마귀였습니다. 군대라고 하는 마귀가 이 사람을 광야로 몰고 간 것입니다. 이제 이 사람을 이렇게 만든 실체가 드러납니다.

바로 군대입니다.

“군대”라는 말이 눈에 뜁니다. 주님은 우리를 불행하게 하는 힘, 우리의 관계를 망가뜨리는 힘을 군대로 본 것입니다. 군대란 로마 군단의 이름입니다. 한 군단이 6000명의 병사로 이루어졌다고 하니 대단한 숫자입니다. 로마는 이 힘으로 세상을 정복했고 부귀영화를 만들어냈습니다. 이처럼 군대는 힘의 상징입니다.

얼마 전 “반지의 제왕”이란 영화를 보았습니다. 신비한 힘을 가진 반지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 영화입니다. 어느 날 이상한 반지가 만들어졌습니다. 이 반지를 끼면 신비한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힘은 선한 사람은 악하게 만들고, 악한 사람은 더 악하게 만들지요. 그래서 예언자는 한 사람을 택하여 이 반지를 펄펄 타오르는 용암 속에 넣으라고 합니다. 예언자의 말대로 반지를 용암에 넣는 과정을 그린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오늘 이 시대를 향해 이렇게 외칩니다. 힘이 평화를 주고, 행복을 주리라는 허상에 벗어나라고 말입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평화를 위해 힘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힘은 평화를 만들기 보다는 사람들을 무덤에 배외하게 만드는 원인이 됩니다. 주님은 이 우상에서 벗어나라고 하십니다. 사람들이 뭔가 최고가 되려고 하는 욕심을 버리지 않는 한 그 마음에 평화는 없습니다. 때문에 주님은 다윗과 같은 왕이 아니라 어린양과 같은 왕이 되셔서 우리에게 생명과 평화를 주셨습니다.

 

주님은 이 사람을 치유하기 전에 그를 괴롭혔던 군대마귀의 실체를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이 사람을 괴롭히던 군대 마귀는 예수를 보자 “돼지 떼 속으로 들어가게 해달라고”애원합니다. 돼지 떼가 바로 군대 마귀의 실체였습니다.

그렇구나! 바로 이런 마음이 우리를 불행하게 하고, 관계를 끊어지게 하는 구나? 그렇다면 군대, 돼지의 실체는 무엇일까요?

 

이사야 말씀을 보면 “돼지고기를 먹고 부정한 음식을 그릇에 담는 것들,”이라고 했습니다. 동양이나 서양이나 돼지는 욕심의 상징입니다. 이 욕심이 죄의 원인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죽음입니다. 때문에 유대에서는 절대로 돼지고기는 먹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 이유는 이런 욕심은 그릇된 영, 바알의 영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이 사람을 무덤에서 배외하게 한 정신은 바로 나만 아는 이기적인 욕심이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주님은 그 마귀를 꾸짖어 무덤을 배외하던 사람을 떠나게 했습니다. 아예 몰살시켜 버렸습니다. 그러자 옷을 벗고 가정을 잃은 채 무덤을 헤매던 사람, 쇠사슬 까지 끊으며 제멋대로 자신을 자해했던 이 사람이 이제는 옷을 입고 멀쩡한 정신으로 앉아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이란 내 마음 속에 도사리고 있는 욕심과 이기심을 버리고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는 세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음을 바꾸어야 합니다. 군대마귀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들의 마음을 바꾸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뀝니다. 사는 모습이 바뀌고, 관계가 바뀌게 되어 있습니다. 정호승 시인의 글을 하나 소개하고 마칠까 합니다.

“내 마음이 불안할 때면 나는 늘 남을 보았습니다. 남이 나를 불안하게 하는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보니 내가 불안하고 답답한 것은 남 때문이 아니라 내 속에 사랑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에 기쁨이 없을 때면 나는 늘 남을 보았습니다. 남이 내 기쁨을 빼앗아가는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보니 나에게 기쁨과 평화가 없는 것은 남 아니라 내 속에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부정적인 일들은 내 마음에 사랑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된 오늘, 나는 내 마음 밭에 사랑이란 이름의 씨앗 하나를 떨어뜨려 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사랑이란 이름의 씨앗을 하나 떨어뜨려 보면 어떨까요? 자기네 뱃속을 하느님으로 알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십자가의 진리를 심어보면 어떨까요? 우리 마음속에, 그리고 우리가 사는 세상 속에 도사리고 있는 사탄과 싸워야 합니다. “남보다 더”라고 하는 욕심과 이기심을 버리고, 남을 탓하기 앞서 내 자신을 성찰할 수 있는 삶을 통해 맑고 아름다운 관계를 만들어가는 작은 밀알이 되는 이시간이 되기를 축원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