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박태식의 함께 사는 이야기 딸아, 어디로 간 게냐?

딸아, 어디로 간 게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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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아, 어디로 간 게냐?

박태식 신부(성공회 장애인센터 ‘함께사는세상’ 원장)

대지의 여신 데메테르는 거인족인 크로노스와 레아의 딸로 태어났다. 그 출생만 보면 신들의 왕으로 하늘과 땅을 지배하는 제우스와 오누이 관계이다. 또한 그녀의 딸인 페르세포네의 아버지가 제우스였으니 데메테르는 제우스의 누이이자 부인인 셈이다. (그리스 신화에선 그런 일이 종종 있다) 말하자면, 데메테르는 제우스마저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지위에 있는 신이었다. 하지만 외동딸인 페르세포네가 지하세계의 통치자 하데스에게 잡혀가자 그녀의 기운은 급격히 쇠락하고 만다.

명부(冥府)의 어둠에 진저리를 느껴서인지 하데스는 종종 검은 말 네 마리가 끄는 사두마차를 타고 땅에 오르곤 했다. 어느 따뜻한 봄날인가 사랑의 신 큐피드는 또다시 땅에 오른 하데스를 보았다. 장난기가 발동한 큐피드는 그를 사랑에 빠트리기로 작정했고 화살 통에서 가장 효과가 좋은 놈을 골라 하데스의 가슴에 정확히 날렸다. 마침 백합과 오랑캐꽃이 만발한 들판에서 친구들과 노닐던 페르세포네는 사랑에 눈 먼 지하의 신에게 납치되었고 그를 위해 입구를 열었던 대지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입을 다물고 말았다.

큐피드가 철없이 화살을 날린 그 날은, 하데스에게는 축복의 날이었을지 몰라도 외동딸을 잃은 데메테르에겐 절망의 날이었다. 딸을 찾아 온 땅을 뒤지고 다녔던 데메테르는 후에 사정을 알게 되자 배은망덕한 대지에게 저주를 내린다. 딸을 잃은 어미의 슬픔을 두고 신화학자 불핀치는 다음과 같이 써내려갔다.

데메테르가 대지에게 말했다. “배은망덕한 대지여, 내가 풍요를 선물하고 아름다운 꽃들과 잘 익은 곡식으로 네 위를 따뜻하게 덮어주었건만 너는 나를 배신하고 말았다. 이제 다시는 나의 은혜를 얻지 못하리라.”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소들이 죽어갔고 대지를 일구던 가래는 고랑에서 부러졌으며, 씨앗은 싹을 틔우지 못했다. 한번은 강렬한 햇볕이 내리쬐어 땅에게 고통을 주더니 다음번에는 비가 몹시 와서 땅을 잠기게 해 숨도 못 쉴 지경이었다. 굶주린 새들은 종자 씨마저 훔쳐 달아났고 한때 그렇게 풍요로웠던 대지는 가시덤불과 엉겅퀴로 뒤덮이고 말았다. (T. Bulfinch, Mythology, a laurel classic, NY, 1959, 53쪽)

불핀치는 사라진 딸을 향한 어미의 마음을 그렇게 표현했다. 이 신화의 뒤편에는 틀림없이 졸지에 딸을 잃었던 어머니의 한이 들어있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슬픈 사연을 후대에 전달했고 그 이야기에 뼈가 생기고 살이 붙어 데메테르의 신화로 탄생했다. 데메테르의 신화에서 수 천 년 전부터 이어져 내려온 어머니와 딸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는 뜻이다. 이제 한 가지씩 어머니와 딸의 이야기를 들어보도록 하자.

조이 럭 클럽

‘조이 럭 클럽’(The Joy Luck Club, 극영화, 미국, 1993년, 139분)을 연출한 웨인 왕 은 일찌감치 할리우드에 진출한 중국 감독으로 ‘스모크1995년’, ‘차이니즈 박스1997년’ 등 주로 인간의 따뜻한 내면을 다루는 영화를 만들었다. 한 때 인본주의를 표방하며 할리우드를 이끌었던 감독들, 이를테면 데이비드 린이나 윌리엄 와일러의 맥을 잇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영화에는 모두 12가지 이야기가 들어있다. 네 어머니와 네 딸의 이야기, 그리고 각각의 어머니와 딸이 맺은 관계들이다. 자칫 너무 복잡해서 이야기들이 엉키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를 독자들이 하실지 모르나 그럴 염려는 전혀 없다. 감독의 치밀한 계산 덕분에 12개 이야기가 물 흐르듯 연결되는 까닭이다.

딸을 향한 어머니의 마음은 하나이다. 인생을 낭비해선 안 되고, 못된 남편을 만나 고생하는 일이 없어야 하고, 어떤 경우라도 자신의 가치를 포기하지 말아야 하며, 후회 없는 삶을 살아야 한다. 어머니는 자신이 범한 실수를 딸이 반복하지 않게 도와주려는데 그 시도가 항상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묘하게도 딸들은 어쩌면 하나같이 어머니의 전철을 밟는 어리석은 삶을 선택한다. 그리고는 말한다. ‘어머니, 제발 제 일에 참견하지 마세요.’ 그러나 딸이 잘못되어가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저 손 놓고 있을 어머니가 세상천지에 있을까? 그런 점에서도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어머니는 하나로 통한다. 하지만 이미 장성해서 제 갈 길로 가버린 딸에게 어머니가 과연 어떤 충고를 할 수 있을까?

그렇게 암담한 상황에서 감독이 찾아낸 단어가 ‘희망’이다. 모든 어머니는 딸에게 희망을 둔다. 딸이 그 희망을 어머니가 살아있을 때 깨달을 수도 있고 아니면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에 깨달을 수도 있지만, 그리 중요하진 않다. 이 세상에서 딸을 속속들이 아는 사람은 오직 어머니뿐이기에, 그의 희망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다. 감독은 영화의 마지막에 태평양을 건너 수 십 년을 넘어온 어머니의 희망이 딸에게 전달되는 장면을 배치했다. 희망을 상징하는 깃털 한 개에 세상을 바꾸는 힘이 있었던 것이다.

비단 ‘희망’ 외에도 ‘조이 럭 클럽’에는 가슴에 새겨둘만한 낱말들이 많이 등장한다. 효도, 사랑, 존중, 갈등, 이별, 포기, 다정함, 분노, 질투, 고통, 가치, 희생, 죽음 등등. 감독은 그 낱말들 하나하나의 깊은 뜻을 보여주려고 많은 내레이션을 영화에 도입했다. 덕분에 영화가 지나치게 감성적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기는 하지만 어느 정도 몰입하면 그런 감성마저도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12개나 되는 이야기를 연출해 내느라 웨인 왕 감독은 영어권에서 활동하는 중국 여배우들을 총출동시킨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배우들의 연기 주준이 일정치 않았지만 감독의 세심하고 능숙한 연출력으로 그 문제를 어느 정도 극복해냈다.

영화를 보면서 가슴 뭉클한 장면을 여러 차례 접할 수 있었다. 죽어가는 어머니를 회생 시키려고 딸이 피를 내어 봉양하는 풍습이나, 딸의 앞날을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대목은 우리네 정서와도 잘 맞아떨어졌다. 잘 마른 손수건 한 장을 준비하는 게 좋을 듯싶다. 영화에서 어머니가 딸을 도울 때 ‘영혼을 나누어 준다.’고 한다. 실제로 중국어에 그런 표현이 있는지 모르나 그 의미만은 확실하게 전달받을 수 있었다.

철 목 련

‘철목련’(Steel Magnolias, 허버트 로스 감독, 극영화, 미국, 1989년, 118년)은 여성영화로 보기에 아주 적당하다. 여러 여성들이 등장해 각자 자신의 문제를 갖고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그들이 모여 대화를 나누는 장소로 미장원이 선택된다. 거기서 서로의 갈등과 고통과 웃음을 나누어가지면서 상처가 치유된다. 제목에서 풍기는 느낌도 아주 좋다. 철은 강인한 인상을 주는 단어이고 목련은 아름다운 꽃이니까 남성적인 이미지와 여성적이 이미지가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어낸다. 문득 시인 이육사의 ‘절정’에 나오는 ‘겨울은 강철의 무지개’라는 표현도 떠오른다.

영화의 시작은 결혼식부터이다. 딸 셀비(줄리아 로버츠)를 시집보낼 준비로 엄마 마린(세릴 필드)은 분주한 하루를 보낸다. 마지막으로 딸의 머리를 다듬으려 미장원에 가고 활달한 미장원 주인 트루비(돌리 파튼)는 방금 새로운 조수인 아넬(대릴 한나)을 받은 처지다. 그리고 미장원에 매일 출근하다시피 하는 두 여인이 있다. 성미가 급하고 별나 원수들이 많은 제위저(셜리 맥클레인)와 교양 넘치는 전 시장 부인인 클레리(올림피아 두카키스)로 둘은 절친한 친구이다.

낯선 곳에 새로 와서 모든 게 어색한 아넬이 셀비의 머리를 손질하는 동안 갑자기 셀비에게 쇼크가 찾아온다. 그녀는 심각한 당뇨병을 앓고 있었던 것이다. 평범하고 화기애애할 것만 같았던 영화가 갑자기 심각해지면서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한다. 넋 놓고 영화를 보던 관객의 허가 찔린 경우로, 그만큼 감독의 연출력이 뛰어나다는 증거다.

영화의 중심엔 마린과 셀비 모녀가 서있다. 셀비는 아이를 낳을 수 없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해 아이를 낳아서는 안 되는데, 아기가 자칫 엄마의 생명을 위험에 빠뜨릴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마린은 결혼 전부터 셀비의 귀에 인이 박히도록 경고 했다. ‘정 아이가 갖고 싶으면 입양을 하라’는 충고도 덧붙여서 말이다. 하지만 셀비는 어머니의 말을 듣지 않았고 결국 아이만 남긴 채 숨을 거두고 만다.

영화에서 다루는 모녀관계는 결코 밝지 않다. 마린은 딸의 행복을 위해 거창한 결혼식을 열어주고, 딸에게 자신의 신장 하나를 떼어주고, 비록 원치 않았던 손자지만 지극정성으로 돌보고, 며칠씩 잠도 안자고 딸의 병상을 지켜낸다. 그러나 셀비에게서 마린에게 돌아온 말은 ‘그럴 줄 알았다’는 것이었다. 아기를 가졌다는 셀비의 일방적인 통보에 마린이 냉담한 반응을 보이자 “엄마는 질투하는 거지요? 내게 더 이상 명령을 못 내리니까. 엄마 뜻대로 안 되니까 화가 난 거지요?” 이제 딸이 성인이 되어 스스로 결정하니까 엄마가 화가 나서 일부러 딸의 출산을 방해한다는 논리다. 물론 이는 셀비도 속이 상해 닥치는 대로 내뱉은 말이었지만 어머니와 딸의 관계가 갖는 한 단면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대사였다.

어머니는 딸을 진심으로 사랑하지만 딸은 그 사랑을 거북해한다. 그래서 어머니의 사랑에 종종 냉담한 반응을 보일 뿐 아니라 그만 자기에게서 손을 떼 달라는 말까지 서슴지 않는다. 셀비의 반응에 마린의 표정은 마치 번개를 맞은 듯이 굳어진다. 마린은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한다. “나는 딸이 엄마에게 그런 식으로 말하라고 키우지 않았다.” 그리고 딸의 장례식장에서 마린이 던진 마지막 말은 “셀비가 내가 좋은 엄마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이다. 어머니와 딸은 그렇게 헤어지고 말았다.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사이빌’1976)을 수상한바 있는 세릴 필드가 최고의 연기를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귀 향

고향으로 돌아가면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흔히 사랑하는 부모형제와 일가친척들 그리고 어린 날의 아름다운 추억들이 있으리라는 기대를 할 것이다. 그러나 페드로 알마도바르 감독의 ‘귀향’(Volver, 극영화, 스페인, 2006년, 120분)에서 고향을 찾은 라이문다(페네로페 크루즈)에겐 불행한 느낌과 지워버리고 싶은 기억뿐이다. 특히, 부모에 대한 라이문다의 증오는 말을 꺼내기도 끔찍할 정도이다. 그녀에게 고향은 한마디로 저주의 땅인 셈이다.

마드리드에 살고 있는 라이문다와 그녀의 딸 파울라는 매년 고향 라만차를 찾아 부모님의 묘지를 손질한다. 그 곳에서 오랜만에 마을 사람들을 만났는데 특히 일가뻘인 아우구스티나(블랑카 포틸로)와의 우정은 여느 친구들과 달랐다. 그런데 그녀로부터 이상한 이야기를 듣는다. 돌아가신 어머니 이렌느(카르멘 마우라)의 유령이 마을에 떠돌아다닌다는 것이었다. 바람이 많아 화재가 잦고 신비한 이야기에 익숙한 마을 사람들은 유령의 출현에 놀라기는커녕 이렌느의 유령이 마을의 불행을 막아주기를 은근히 기대한다.

스페인은 한 때 유럽에서도 가장 예스러운 나라였다. 프랑코 총통의 오랜 지배로 고립되어 문명의 영향이 덜 한 때문이었는데,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유난히 미신과 전설이 많다. 그런 전통들 속에 가족의 끔찍한 비밀이 교묘하게 숨겨져 있다. 독특한 영화(‘하이 힐1991년’, ‘엄마의 모든 것1999년’, ‘그녀에게2002년’ 등)를 만드는 것으로 유명한 알마도바르는 ‘귀향’에서 가족의 증오와 화해라는 주제에 스페인의 토속 소재를 섞어 잘 요리했다. 선전지에 담긴 감독의 말을 옮겨보면 “‘귀향’이라는 제목은 나에게 있어 여러 의미의 돌아옴을 말한다. 우선 좀 더 코미디로 돌아왔다. 그리고 여성들의 세계로, 라만차(감독의 고향)로 돌아왔다.”고 한다. 그리고 오랜만에 돌아온 그곳 고향에는 어머니가 있었다. 돌아온 어머니의 옆으로 잠자리를 옮겨 눕는 라이문다의 동생 쏠레(롤라 두에나스)의 얼굴에서 비로소 귀향한 이의 안도감을 읽을 수 있었다.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이 바로 천국으로의 귀향이다. 끔찍한 고통과 한과 가난을 품고 험난한 일생을 살아야 했던 라이문다를 어느 날 어머니가 문득 찾아와 품에 안아준다. 참으로 멋진 결말이다. ‘귀향’은 칸 영화제에서 각본상 외에 6명의 여배우가 공동으로 여주주연상을 수상했다. 관객이 주인공 여인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와 연기를 눈여겨보아야 할 까닭이 거기에 있다. 혹자는 페네로페 크루즈에게 시선을 맞추느라 영화의 줄기가 흔들렸다고 평을 했지만 필자의 생각은 전혀 다르다.

필자도 영화를 보면서 돌아가신 어머니가 어느 날 갑자기 내 앞에 나타나는 상상을 해 보았다. 그래서 그동안 가슴 속 깊이 감추어두었던 온갖 이야기를 어머니 앞에 털어놓는 거다. 어떤 에누리와 변명도 없이……. 그러면 어머니는 내 이야기를 들어주면서 아무런 말도 없이 가만히 나를 감싸 안아 줄 것이다. 마치 어린 시절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라이문다와 쏠레 자매는 살아서 천국을 경험한 것이다.

어머니와 딸

어머니와 딸을 소재로 만든 영화들은 수없이 많다. 앞의 영화들 외에도 몇 가지를 꼽아보면 ‘가을 소나타1978년’, ‘애정의 조건1983년’, ‘인어공주2004년’ 등이 떠오른다. 그러나 이 작품들을 여성 영화의 범주에 넣기는 어려운데 여성의 인권보다는 모녀간의 갈등과 화해에 온전히 그 초점을 맞추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조이 럭 클럽’과 ‘철목련’과 ‘귀향’은 여성들이 자신의 참 가치를 발견하여 스스로 구현해나가는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다른 모녀 영화들과 구별된다.

‘조이 럭 클럽’에는 현대사에서 가장 험한 시절을 살아온 네 여인이 등장한다. 그들은 중국에서 온갖 풍상을 겪은 후에 미국으로 건너왔다. 비록 미국에서 안정된 삶을 누리고 있지만 중국 시절의 기억은 언제나 그녀들을 짓눌러 얼이 빠지게 만든다. 하지만 딸이라는 존재가 언제까지나 어머니를 얼빠진 상태로 남겨 두질 않는다. 딸들이 이 험한 세상에서 버티어 나갈 수 있게 도와주어야만 한다. 바로 거기서 어머니의 강력한 힘이 나온다. 처참한 처지에 빠져든 딸이 존중받을 수 있도록, 질투와 미움에 가득 찬 딸이 사랑의 맘을 가질 수 있도록, 그리고 자신이 저지른 과오를 딸에게 용서받을 수 있도록, 어머니는 다시금 강해져야 하는 것이다. 여성성(女性性)에 대한 감독의 수준 높은 관찰이었다.

딸이 어머니에게 슬픔만 남겨주고 떠나버렸다. 이제 어머니는 어떻게 살아야하나? 어머니에게 마지막 남은 희망도 꺼져버리고 말았다. 어머니는 딸을 출산했던 바로 그 병원에서 딸의 죽음을 지켜본다. 식물인간이 되어버린 딸의 입에서 생명유지 장치를 떼어내는 결정을 감행해야 했던 어머니. 어떤 위로도 그녀에게 통하지 않았다. 오직 딸을 먼저 데려간 신을 원망할 뿐이다. 마린의 분노를 잠재운 사람은 바로 그녀의 네 친구들이었다. 트루비와 아넬과 제위저와 클레리, 그녀들은 마린에게 다시금 웃음을 찾아주었고 손자를 돌보게 할 힘을 주었으며 아넬이 산기를 보이자 모두들 새 생명의 탄생에 힘을 보탠다.

알모도바르 감독은 ‘귀향’에서 남성과는 전혀 다른 여성의 본질을 보여주려 한다. 모성애, 자상함, 희생정신, 동정심, 그러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 의연한 모습을 보여주는 강인함 등등. 라이문다는 딸 파울라가 자신과 똑같은 고통을 당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망설임 없이 남편의 시체를 숨긴다. 이 세상에서 딸을 보호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자신 밖에 없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또한 자신을 보호해주지 못했던 어머니에 대한 원망에서 나온 행동이기도 했다. 어쨌든 딸이 자신의 전철을 밟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한다.

돌아온 어머니와 라이문다의 화해는 영화 감상 내내 막혀있던 필자의 호흡을 시원하게 뚫어주었다. 아무리 손톱발톱 세워가며 이 세상을 독하게 살아가야만 하는 여성일지라도 누군가는 위로하고 보듬어 주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인간이 인간다워질 수 있는 것이다. 어머니 외에 과연 누가 그 역할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역사의 주체는 누구일까? 세 영화는, 역사의 표면에선 남성들이 도맡아 이름을 날렸지만 실은 여성이 역사의 주체라고 말한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영화에 나오는 남성들은 어딘가 모자라 보인다. 사실 남자들은 조금 비겁하고, 조금 무책임하고, 조금 무감각하고, 조금 건망증이 있는 편이기는 하다. 그리고 중요한 결정일수록 여성에게 미루는 경향도 있다. 대비를 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렇게 배치를 한 것인데, 적어도 필자에게는 좋은 시도로 보였다.

“딸의 곁을 떠날 수가 없었어요. 생명 유지 장치도 꺼졌고 남편은 견딜 수가 없었던지 병실을 나가고 말았어요. 사위도 떠났어요. 난 거기서 대단한 것을 발견했어요. 남자들은 강철 같은 것으로 만들어져 있어요. 딸 곁에 앉아있으려니 소음도 없고 걱정도 없고 단지 평화만 있었어요. 거기서 나는 딸의 멋진 탄생을 보았고 딸이 사라지는 것도 보았어요. 나는 정말 운이 좋은 여자입니다.” 마린의 대사가 귀에 여운으로 오래 남아있었다.

세 영화 모두 세심한 상황설정과 그에 안성맞춤인 대사들이 돋보인다. 대사들에 특히 귀를 기울이며 영화를 감상하시기 바란다.

끝없는 이야기

“어린아이는 자유롭지 못할뿐더러 자유롭기를 주장할 수조차 없다. 어린아이는 ‘자유’라는 표현의 의미를 모르고 그의 행동은 이끌어질 필요가 있다. 개인이 혼자 나아갈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자유가 의미를 획득한다. 칸트는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에서 어린아이는 그제야 ‘감독’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행동을 결정할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보통 이 성숙의 순간은 ‘해방’으로 경험된다.”(<세계의 교양을 읽는다>, 최병권/이정옥 엮음, 휴머니스트, 2002년, 259쪽) ‘감독’에서 벗어나 ‘해방’을 경험한 딸은 그렇게 어머니에게서 떨어져나간다.

여기서 딸을 잃은 비탄에 빠진 데메테르 여신에게 다시 돌아가 보자. 지하 신에게 잡혀간 딸이 하루하루 눈물로 지샌다는 사실을 알게 된 어미는 딸을 돌려달라고 제우스에게 간청한다. 그러나 아무리 막강한 데메테르라도 운명의 여신 페이츠의 잔인한 손길을 피해갈 수 없었다. 페르세포네가 하데스에게 속아 석류 한 조각을 먹은 까닭에 일 년의 반은 지하에서 그리고 나머지 일 년의 반만 어머니가 있는 땅 위에서 지낼 수 있었다. 신화적인 설명에 따르면 가을겨울과 봄여름은 각각 데메테르의 슬픔과 기쁨으로 생겨난 계절들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딸에게 주려 했지만 반밖에 허락되지 않는 가련한 어머니, 어머니의 반은 닮고 싶지만 반은 닮고 싶지 않은 딸, 자신의 딸을 키우면서 비로소 돌아가신 어머니를 이해하는 딸, 그처럼 영원히 채울 수 없는 간격이 어머니와 딸 사이에 놓여있다. 딸은 어머니를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어머니의 여러 모습에 때론 실망하고 때론 싸워가면서 성장해간다. 그러면서 다짐을 한다. “나는 절대 엄마처럼 안 될 거야!” 그러는 딸을 보면서 엄마가 던지는 한 마디. “너 같은 딸 하나만 꼭 낳아라!”

앞으로도 영화 속에서 어머니와 딸의 이야기는 끝없이 이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