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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으로 키워가는 신앙(연중 15주일, 최도미닉 신부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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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으로 키워가는 신앙

 

얼마 전 고대 에집트 무덤에서 볍씨가 발견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볍씨를 심어 보았더니 싹이 돋아났다는 것입니다. 놀랍지요. 수천 년이 지났을 것인데 어떤 조건이 되니까 싹을 틔우는 이 씨알의 잠재력을 보면서 많은 것을 깨닫게 됩니다. 정말 씨앗은 거짓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기독교의 진리를 한마디로 정리해 준 말씀입니다.

기독교를 한마디로 정의하라면, 그것은 말씀의 종교입니다. 하느님은 말씀을 주셨고, 이 말씀을 통해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생명을 주시고, 우리를 축복하시고 구원의 길로 인도 해 주십니다. 때문에 우리에게 주신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여기서 결정됩니다.

축구는 꼴로서 결정 되듯이 기독교는 말씀에서 판결납니다. 아무리 온갖 신비한 기적을 만나고, 온갖 축복을 다 받았어도 말씀이 내안에서 열매를 맺지 못하면 다 허사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합니다. 돈을 잃으면 조금 잃은 것이요, 명예를 잃으면 많이 잃은 것이고,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은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신앙은 아닙니다. 말씀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습니다. 출세도 하고 성공도 합니다. 다 좋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은 것입니다.

 

오늘 비유의 말씀을 보면 씨앗이 뿌려집니다. 물론 이 비유의 말씀은 이스라엘의 농경문화를 배경을 두고 하신 말씀일 것입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씨를 한 알 한 알 심는 것이 아니라 뿌린다고 합니다. 이 때 뿌려진 씨앗은 제 멋대로 떨어집니다. 흙에 떨어지기도 하고, 길에 떨어지고 하고, 잡초가 우거진 곳에 떨어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씨가 어디에 떨어지는가에 따라서 열매를 맺기도 하고 죽기도 합니다. 이런 농사 풍습을 보시면서 말씀을 생각하신 것 같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받아들이는 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여 할까요? 이게 중요합니다. 어떻게 받아들여야 그 말씀이 축복이 되고, 생명이 될 수 있을까요?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을 수 있을까요? 먼저 안 되는 것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길바닥에 뿌려진 씨앗이라고 했습니다.

길이란 사람들이 많이 다는 곳입니다. 그래서 단단히 굳어버린 땅을 말합니다. 이렇게 단단히 굳어 있는 땅은 씨앗이 파고들어 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 씨앗을 새들이 쪼아 먹어버렸습니다. 그렇다면 말씀이 들어갈 수 없도록 단단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은 무엇일까? 바로 나 자신입니다.

내가 갖고 있는 편견, 고집, 그리고 욕심과 이기심과 같은 이러 마음들은 우리의 마음 밭을 딱딱하게 만드는 길과 같습니다. 사도 바울로는 이것을 “육체적인 것”(로마8:5)이라고 했습니다. 이 육체적인 것은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들릴 수 없고, 내 안에 말씀이 살아 움직이지 못하게 죽이고 맙니다. 때문에 성령의 힘으로 이 육체적인 행실을 죽여야, 산다고 했습니다.

 

얼마 전 이현주 목사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 손톱의 박힌 가시가 암으로 죽어가는 사람의 고통보다 더 크게 느껴진다.”

인간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인지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게 육체입니다. 육체는 언제나 내가 중심에 서 있습니다. 이것이 강하면 강할수록 마음이 단단해져서 말씀이 내안에 들어올 수 가 없습니다.

에페소 3장 16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넘쳐흐르는 영광의 아버지께서 성령으로 여러분의 힘을 돋우어 내적 인간으로 굳세게 하여 주시기를 빕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여러분의 믿음을 보시고 그리스도로 하여금 여러분의 마음속에 들어 가 사실 수 있게 하여 주시기를 빕니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우리의 마음이 내적으로 굳세어 질 수 있을까요? 그리고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속에서 머무실 수 있을까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 마음이 길이 되지 않게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마음을 길처럼 단단하게 하는 육체적인 것을 버려야 합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질 수 있어야 한다.”

 

왜 자기를 죽이라고 했을까요? 나를 버려야 말씀이 들어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베드로처럼 “당신은 그리스도 이십니다.”라고 고백했다할지라도 결국 나를 죽이지 못하면 나는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사람, 사탄”되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나를 버리는 일을 먼저 하십시오. 이스라엘 백성이 물설주에 양의 피를 발랐듯이, 세례를 통해 육체의 행실을 죽이겠다고 맹세한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진 씨앗입니다.

돌밭에 떨어진 씨앗은 해가 뜨자 말라버렸습니다. 씨앗은 햇빛을 머금고 자라납니다. 그런데 때로는 말라비틀어지게도 합니다. 저는 이 햇볕을 고난이라고 생각합니다. 고난은 우리의 믿음을 자라게 하는 햇빛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극복하면 햇빛이 되지만, 이것을 이겨내지 못하면 말라버립니다.

신앙은 고난을 통해 성장합니다. 때문에 베드로는 “없어지고 말 황금도 불로 단련을 받듯이 우리의 믿음은 고난으로 단련을 받는다”(1베드1:6)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바울로는 고난을 장차 우리가 차지할 영광으로 우리를 인도해 준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고난은 햇빛입니다.

 

모든 생명은 고난을 통해 태어납니다. 이것이 생명의 이치입니다. 그러나 이 고난 앞에 얼마나 쉽게 우리의 믿음이 허물어지는지 모릅니다. 이 고난을 이겨내야 합니다.

참된 기쁨과 희망과 자유를 누리고 싶습니까? 고난을 배워야 합니다. 정채봉 선생님은 이렇게 가르칩니다.

“온상에서 자라는 콩은 콩나물이 되지만 고난을 이기면서 자라는 콩은 콩나무가 된다.”고 했습니다.

 

마태복음을 보면 흔히 산상수훈이라고 하는 팔복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팔복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아홉 가지 복입니다. 그런데 흔히 9번째 복은 생략하는데 사실은 이것이 가장 중요한 복입니다. 그 복은 바로 고난의 복입니다.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으며 터무니없는 말로 갖은 비난을 다 받게 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받을 상이 하늘에 마련되어 있다”

그렇습니다. 고난을 통해 우리가 받은 상을 하늘에 마련해 주십니다. 사도 바울의 말씀처럼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을 특권뿐만 아니라 그분을 위해서 고난까지 당하는 특권, 곧 그리스도를 섬기는 특권을 받았습니다”(에페1: 29) 고난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고난 앞에 좌절하거나 두려워하며 피하려 하지 말고 당당하게 맞서 나가야합니다. 고난 앞에 좌절해서 나에 주신 이 복음의 씨앗을 말라버리지 않게 하시기 바랍니다.

 

셋째, 가시덤불 속에 떨어진 씨앗입니다.

싹이 자라나기는 했지만 가시덤불 속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주님은 가시덤불을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덤불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그 첫째가 걱정입니다.

여러분 세상적인 걱정이 뭡니까? 저는 열등감이라고 생각합니다. 얼마 전 한 교인이 재미있는 말을 했습니다. 한국 사람은 배가 고픈 것은 참아도 배가 아픈 것은 참지 못한다는 말을 했습니다.

이게 열등감입니다. 남보다 못하다고 느끼는 마음, 뭔가 적다고 느끼는 마음, 이런 열등감이 우리를 얼마나 어둡게 합니까? 이런 열등감은 진실을 보지 못하게 하고 미워하고 갈등하게 만듭니다. 만족하지 못하고 감사할 줄 모르게 만듭니다.

 

법정 스님의 글을 보면 “꽃이나 새는 자기 자신을 남과 비교하지 않습니다. 저마다 자기 특성을 마음껏 드러내면서 우주적인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비교는 시샘과 열등감을 낳습니다.”

 

그렇습니다. 남과 비교하여 자신을 세우려고 하는 것도, 자신은 남보다 못하다고 비하하는 것도 다 열등감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열등감은 우리의 마음을 어둡게 하는 가시덤불입니다.

 

그리고 유혹이라고 했습니다.

유혹은 모두가 욕심에서 나옵니다. 아담과 하와도 바로 이 유혹에 빠져서 말씀을 버렸습니다. 원죄, 바로 욕심입니다. 이 욕심에서 죄가 나오고, 이 죄가 우리를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잠언을 보면 솔로몬은 하느님께 두 가지를 청했습니다. “하느님, 제 생전에 청할 두 가지 소원이 있습니다. 허황한 거짓말을 하지 않게 해 주십시오.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마십시오. 먹고 살만큼만 주십시오. 배부른 김에, ‘야훼가 다 뭐냐’고 하며 배은망덕하지 않게 하시고, 너무 가난한 탓에 도둑질하여 하느님의 이름에 욕을 돌리지 않게 해 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허황된 거짓말이란 열등감이요,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말아달라는 말은 욕심의 노예가 되지 말게 해달라는 말입니다. 농부가 잡초를 쳐 내듯이 내 안에 열등감과 욕심을 버려야합니다.

끝으로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이라고 했습니다.

좋은 땅이란 삼박자가 갖추어진 땅을 말합니다. 물과 햇빛과 거름이 충분한 땅입니다.

루가복음 8장 15절 말씀을 보면 좋은 땅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꾸준히 열매를 맺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좋은 땅에 떨어져야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처럼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자신이 좋은 땅이 되야합니다. 농부는 좋은 땅을 어떻게 만들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거름을 주고, 잡초를 뽑아내고, 돌을 골라내야 합니다. 그리고 때에 따라서 물을 대 주어야 합니다.

여러분 말씀이 저절로 내 안에서 자라나리라 생각하지 마십시오. 말씀이 내 안에서 자라나 열매를 맺기까지는 정말 노력을 많이 해야합니다. 가장 중요한 훈련은 묵상과 기도입니다. 묵상과 기도는 내 마음을 기름지게 합니다. 그리고 모이기에 힘쓰고 열심히 배워야 합니다. 초대 교인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열심히 모였습니다. 그리고 열심히 배웠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열심히 모이고, 열심히 배우고, 열심히 기도하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삶을 통에 우리에게 주실 축복과 은총을 생각하면 흥분되어서 잠이 오지 않을 지경입니다.

 

이사야는 분명히 선언합니다.

“씨 뿌린 사람에게 씨앗과 먹을 양식을 내어 주듯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그 받은 사명을 이루어 나의 뜻이 성취 되지 아니하고는 그냥 나에게로 돌아오지 않는다.”(이사55:11)

 

이 보다 더 분명한 말씀은 없습니다. 말씀은 우리의 삶을 축복하시고, 더 풍성하게 하십니다. 오늘 시편의 말씀처럼 “주님께서 실어 주시는 수확의 수레가 차고 넘칩니다.” 이게 말씀이 주시는 축복입니다. 씨앗이 흙속에서 자신을 변화시키고, 성장시키고, 마침내 열매를 맺듯이 말씀을 통해 자신의 삶과 연격을 변화시키고, 그 변화된 삶을 통해 영적 열매를 맺어가는 사람이 되어 가시기 바랍니다.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진실, 온유, 그리고 절제”의 열매가 우리 안에 주렁주렁 열렸으면 좋겠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