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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간 자식에게 바치는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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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간 자식에게 바치는 노래

박태식 신부(성공회 장애인센터 ‘함께사는세상’ 원장)

영화는 선명한 현실

우리를 가장 불행하게 만드는 일은 무엇일까? 모르기는 몰라도 대부분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는 일이라고 답할 것이다. 부모의 죽음, 친구의 죽음, 배우자의 죽음 등등……. 그들의 죽음은 한없는 슬픔을 가져다준다. 그러나 어떤 슬픔을 자식의 죽음에 비길 수 있을까? 부모님과 배우자와 친구의 죽음은 어찌어찌 해서 이유를 찾아낼 수 있다. 부모님은 연로하시니 먼저 가시는 게 이치고 친구는 평소부터 그렇게 술을 좋아했으니 간이 알코올에 절어 그리 되었고 배우자가 죽으면 ‘산 사람은 살아야지!’ 하면서 재혼을 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먼저간 자식의 무덤 앞에서 부모가 합당한 이유를 찾기란 결코 쉽지 않다.

“어머니, 날씨가 더우니 수영 좀 하고 와서 점심을 먹겠어요.”, “오늘 친구들과 약속이 있어 아빠와 조깅은 미안하지만 다음 기회로 미뤄야 하겠어요.” 그 말을 남기고 나간 아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경우도 있다. “부모님께 알려드려야 할 게 있습니다. 따님이 백혈병에 걸렸습니다. 현재로선 방법이 없습니다.” 도대체 무슨 까닭에 눈에 넣어도, 가슴을 후벼 파도 아프지 않은 자식이 먼저 죽을 수 있을까?

묘하게도 영화감독에겐 그렇게 차마 입에 담기조차 두려운 주제를 꺼내서 세상에 보여주는 악취미가 있다. 왜 하필이면 자식이 죽는다는 있을 법하지도 않은,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해 결코 있어선 안 될 불행을 상상하는가? 진정 악취미 때문인가? 단언하건데, 그런 악취미를 가진 감독은 없을 것이다. 감독을 변호하는 말을 약간 해보겠다.

우리에겐 이상한 습관이 있다. 보이는 것만 현실이라고 믿어 당장의 효용가치가 없는 예술 작품을 무시하는 습관 말이다. 그러나 현실이 혼란스러울 경우, 예술작품이 오히려 눈치 채지 못한 현실을 알려주곤 한다. 자연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학습되지 않은 시선으로 들판을 볼 때가 아니라, 밀레처럼 이삭 줍는 여인들 뒤로 펼쳐진 노을을 결합시킬 때 크게 배울 수 있다. 같은 의미에서 베르그송은 예술가를 두고 우리에게 훨씬 선명하게 현실을 보여주는 ‘견자見者’(le voyant)라 했다.

이제 다루게 될 세 영화는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과연 영화감독이라는 인물이 일상 경험을 넘어 사물 배후의 의미를 냉철하게 투시하는 견자인지 알아보도록 하자.

마이 시스터즈 키퍼

모성의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흔히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사랑은 하늘을 움직일 수 있다고 한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데, 그 말만 들으면 왠지 보름달에 정한수를 떠놓고 하늘을 향해 비는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른다. ‘마이 시스터즈 키퍼’(My Sister’s Keeper, 닉 카사베츠 감독, 극영화, 미국, 2009년, 109분)에서도 지극정성으로 자식을 돌보는 어머니가 나온다. 사랑에 대한 적극적인 표현방식이 우리에겐 조금 낯설지만 저변에 흐르는 물줄기는 같다. 바로 무제한적인 모성이다.

겉보기에 단란한 가정이라고 해서 가족 내에 아픔이 전혀 없다고 하면 아마 넌센스일 것이다. 오히려 어느 정도 시련을 견뎌내야 진정한 가족의 정이 싹틀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다음 경우는 어떠한가? 흔히 백혈병으로 불리는 혈액 암에 걸려 전혀 가망이 없는 딸을 낳은 경우, 그리고 딸을 살리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이다 결국 딸에게 재대혈과 필요한 장기를 수시로 공급해줄 맞춤형 아기까지 낳은 경우 말이다.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진 어머니 사라에겐 맞춤형 아기는 어둠속의 한 줄기 빛이었다. 다른 선택은 없었다. 어떤 어머니는 ‘절벽에서 떨어지는 아이를 구하기 위해 아이가 탄 차를 번쩍 끌어올렸다’고 하지 않은가!

영화는 사라를 제외한 가족의 구성원들이 독백하는 형식을 취한다. 감독은 그들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모아 영화를 재구성했는데 마치 흩어진 그림조각을 붙여 하나의 그림을 완성하는 듯했다. 사실 영화 시작에는 과연 어떤 그림이 완성될 지 상당히 궁금했고 영화 감상 내내 긴장감을 늦출 수 없었다. ‘노트 북2004년’과 ‘존 큐2002년’에서 이미 능력을 보여준 카사베츠 감독이 다시 한 번 훌륭한 연출력을 증명한 것이다.

출연진의 면모도 훌륭했다. 사라 역을 맡은 카메로 디아즈는 원래 천방지축 금발미녀 역에 익숙한데 연기변신을 잘 해냈다. ‘미스 리틀 선샤인2006년’에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후보까지 올랐던 아비게일 브레슬린은 맞춤형 동생인 안나를 맡았는데 여전히 돋보이는 연기를 했다. 제이슨 페트릭, 알렉 볼드윈, 조앤 쿠색 등의 역량 있는 배우들을 보는 즐거움도 컸다. 특히, 조앤 쿠색은 어떤 역을 맡아도 기대가 될 정도이다. 마치 실제로 딸을 잃은 고통을 딛고 다시 법정에 돌아와 첫 재판을 맡은 판사 같았다. 고통 받는 소녀 케이트 역의 소피아 바실리바의 연기도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모성의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영화에 의외의 반전이 있기는 하지만 어쨌든 뇌리에 떠오른 이 질문이 사라지질 않았다. 한국의 어머니들은 이 영화에서 많은 교훈을 얻을 것이다. 독한 약에 취해 가쁜 숨을 몰아쉬며 침대에 속절없이 누워있는 딸을 보는 어머니의 가슴은 찢어진다. 하지만 그렇게 누워있어야 하는 딸의 고통은 어머니가 결코 받아낼 수 없는 것이다. ‘차라리 내가 아팠으면 좋겠다.’는 어차피 불가능한 언어이다. 존엄사니, 안락사니 하는 논의도 케이트 앞에선 모두 허황되게 들렸다.

어머니들이 기왕에 이 영화를 보시려면 잘 마른 손수건도 한 장 꼭 준비하시길 바란다. 유용하게 쓰일 것이다. 아니 아버지들이라 하더라도 꼭 한 장씩 준비하셔야 할 것이다. 예외는 없다.

아들의 방

이태리의 감독 난니 모레티가 감독과 주연을 한 ‘아들의 방’(La Stanza del Figlio, 극영화, 이탈리아, 2001년, 87분)은 죽은 아들과 남겨진 가족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이태리 영화는 보통 로베르토 베니니의 ‘인생은 아름다워1997년’처럼 떠들썩하고 장황하게 이야기를 풀어 가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아들의 방’ 이 갖는 분위기는 그와는 전혀 다르다.

이태리 북부 어느 항구 도시, 유능한 정신과 의사 조반니(난니 모레티)는 출판 일을 하는 아내 파울라(로라 모란테)와 아들 안드레, 딸 이레네와 함께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 산다. 종종 가족이 식탁에 둘러앉아 가벼운 농담과 진지한 대화도 나누고, 사소한 일에도 서로를 보듬어 주는 자상함이 넘치는 분위기였다. 한마디로 이상적이 가정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영화 중반쯤 아들이 갑자기 죽고 만다. 급한 환자의 전화를 받은 아버지는 아들과의 조깅 약속을 지키지 못했고, 아들은 나름대로 친구들과 스킨스쿠버 다이빙 약속이 있었는데, 물에 들어간 아들이 다시 나오지 못한 것이었다.

조반니의 가족은 불행과는 도통 어울리지 않았기에, 오히려 그들이 걸려든 불행의 덫은 더욱 잔인해 보였다. 불현듯 떠오르는 아들 생각에 조반니는 환자 앞에서 냉정을 잃고, 파울라는 아들이 캠프에 갔다가 잠시 사귀었던 여학생에게 비정상적으로 집착한다. 이레네는 오빠의 죽음 뒤에 다분히 폭력적이 된다. 시간이 지나면서 슬픔이 희석되는 게 아니라 점점 더 심해져만 갔다. 아들의 죽음으로 단란한 가정은 파괴되었고, 심지어 다음 순서는 조반니 부부의 이혼과 이레네의 탈선으로 보일 정도였다.

구원의 손길은 의외의 곳에서 다가왔다. 아들이 사귀었던 여학생이 현재의 남자 친구와 함께 여행을 하던 중에 불쑥 조반니의 집에 찾아오고 그들을 다음 여행지로 바래다주면서 조반니 가족에게 다시금 평안이 찾아온다. 그 평안의 정체가 무엇인지 감독은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는다. 그러나 관객은 느낌으로 알 수 있다. 남은 이들의 삶을 긍정하는 것이다.

난니 모레티 감독은 가족의 슬픔을 표현하는 데 서두르는 기색이 전혀 없다. 시종일관 담담한 이야기 진행은 마치 아들의 죽음을 남의 이야기로 치부하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아들의 죽음 앞에서 끊임없이 울고불고 하는 것 보다 오히려 절실하게 가족의 슬픔을 전달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특히, 니콜라 피오바니의 배경음악들은 그런 분위기를 물씬 살려내고 있다. ‘아들의 방’(La Stanza del Figlio), ‘조깅’(La Corsa), ‘밤의 여행‘(Viaggio Nella Notte), ‘강가에서’(By this river) 등 주옥같은 멜로디가 영화의 뒤를 장식한다. 영화 제목인 ‘아들의 방’은 세상을 떠난 아들의 존재를 일깨워주는 장소이다. 영화 전반부에서는 별 의미가 없었지만 아들이 죽자 그 방은 남은 가족에게 기억의 현장으로 다가온다. 제목이 보여주는 좋은 상징성이다.

‘아들의 방’은 2001년 칸 영화제의 최고의 명예인 황금종려상을 받은 작품이다. 또한 상영이 끝나자 20분간 기립 박수를 받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걸어도 걸어도

아루이떼모 아루이떼모…….. 80년대 일본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가요인 ‘블루 라이트 요코하마’에 나오는 가사이다. 영화 중간쯤 이 노래가 나오는데 젊었던 시절(요즘도 젊지만!) 나이트클럽에 가면 흔히 들을 수 있었다. 당시에 마루에서 춤추던 젊은이들이 유독 그 부분만 소리 높여 따라 불렀던 기억이 나는데, 실로 30년 만에 다시 들은 것이다. 그리고 처음으로 가사의 뜻이 ‘걸어도 걸어도’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걸어도 걸어도’(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극영화, 일본, 2008년, 114분)는 참으로 맛깔스런 영화다. 인간의 심리를 어떻게 그리 잘 들여다볼 수 있다는 말인가? 어머니의 기대에 알맞게 살아가며 훌륭하게 성장한 장남 준페이, 그래서 둘째 아들 료타와는 다른 사랑을 주었는데, 바로 큰 아들이 허무하게 죽고 말았다. 어머니의 슬픔은 얼마나 지독할까?

영화를 보면서 처음부터 어머니(키키 키린)의 슬픔을 좀 나눠 받으려고 했었다. 그래야 요즘 들어 부쩍 울적해진 필자의 기분에 위로가 될 듯싶어서 말이다. 하지만 영화가 얼마나 조심스럽게 진행되는지, 미처 필자의 감정을 실을 틈이 보이지 않았다. 그저 두 세 차례 마음이 움직일 정도였다.

바다가 잘 보이는 언덕배기에 장남 준페이의 비석이 서 있다. 어머니는 하루가 멀다않고 그 높은 언덕을 올라가 비석 위에 물을 부어 준다. ‘준페이, 오늘은 무척 더운 날씨구나!’ 하면서. 그리고 어머니는 준페이가 수영하러 갔다가 대신 죽으며 목숨을 구해준 요시오를 아들의 기일이면 어김없이 불러들인다. 요시오는 10년째 찾아와 ‘아드님의 몫까지 열심히 살겠습니다.’라는 다짐을 하면서 좌불안석 쩔쩔 맨다. 변변한 직장도 없고 몸이 비대하기까지 한 요시오에게 준페이의 기일은 악몽일 뿐이다. 보다 못한 료타가 제안한다.

‘이제 충분하니 내년부터는 요시오를 부르지 말세요.’

‘그렇게 멋졌던 준페이를 죽였으니 내가 살아있는 한 그놈도 고통을 당해야 해’

대답을 하는 어머니의 눈에서 파란 빛이 감돌았다.

세월이 아무리 지나고, 남은 아들과 딸에 보다 많은 신경을 써야하고, 언제나 당당한 듯 위선적인 남편과 보조를 맞추어간다 한들, 어머니의 가슴 속 깊이 맺힌 슬픔은 결코 사라질 수 없는 법이다. 어머니 역을 한 키키 키린의 연기는 ‘오다기리 조의 도쿄 타워2007년’라는 영화에서 이미 본 적이 있다. 그녀는 유머와 재치와 따뜻한 감성을 겸비한 어머니 상을 기가 막히게 표현했다. 마치 우리 모두의 어머니 모습을 보는 듯했다. 실제로 영화를 보면서 여러 차례 돌아가신 어머니 얼굴이 자연스럽게 오버랩 되는 경험을 했다.

‘걸어도 걸어도’는 아시아 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했다. 감독인 히로카즈는 고아가 된 네 어린이의 이야기인 ‘아무도 모른다2004년’를 감독한 바 있다. 비록 필자는 일본에 막연한 적개심을 품고 자란 세대이긴 하지만 영화만큼은 그들이 훨씬 더 잘 만든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 작품이다.

아브라함의 제사

일전에 어느 TV 토크쇼에 오랜만에 스크린으로 복귀하는 중년 배우가 나온 적이 있었다. 5년 동안 미국에 가 있었다는데 그 계기가 하나뿐인 아들의 죽음 때문이라고 했다. 안 그래도 그 즈음에 이혼까지 하여 인생이 쪼그라들었던 때, 어느 밤 뉴욕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대학 다니던 아들이 교통사고로 죽었다고…….. 그 후로 아버지에겐 어떤 행복도 허락되지 않았다. 만일 조금이라도 행복의 기운이 찾아온다 싶으면 즉시 아들이 기억이 떠올라 그 기운이 차단되고 말았다. 아들이 죽은 날 그의 인생도 끝난 것이었다. 5년의 방황 후에 연예계에 복귀한 이유는, 나중에 죽어 아들을 만날 때 ‘아들아, 그래도 아빠는 주저앉지 않고 열심히 살았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라고 고백했다. 오직 그 말 한마디 하기 위해서! 기분도 풀 겸 가볍게 시청하려던 토크쇼에서 그만 복병을 만났다.

‘걸어도 걸어도’를 보면서 자연스럽게 난니 모레티 감독의 ‘아들의 방’과 비교할 수 있었다. 같은 주제에 대한 접근 방법이 무척이나 달랐기 때문이다. ‘아들의 방’이 가족 중심이고 처음과 끝이 분명하고 이야기 위주인 반면, ‘걸어도 걸어도’는 개인 중심이고 처음도 끝도 없고 표현적이다. ‘아들의 방’에선 아들의 존재를 암시하는 상징이 도처에 깔려있어 마치 지도를 보듯 아비의 슬픔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걸어도 걸어도’에 표현된 어미의 슬픔은 암중모색暗中摸索 그 자체였다. 동서양이 그렇게 다른 것이다. 태생이 아시아권이라서 그런지 필자에게는 ‘걸어도 걸어도’의 표현방식이 훨씬 맘에 와 닿았다. 그 중년배우 말마따나 죽어서나 겨우 해결될 문제였다.

그리스도교의 경전이 구약성서 창세기 22장 1-14절에 보면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신앙의 조상이자 민족의 조상으로 숭상 받는 아브라함에게 큰 시험이 주어졌다. 하느님이 그의 유일한 혈육인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라고 한 것이었다. 이야기의 진행을 볼 때 이사악은 어느 정도 앞가림을 할 수 있는 나이였던 것 같다. 길을 가다가 아들이 아버지를 불렀다.

“아버지!”

“얘야! 내가 듣고 있다.”

“아버지! 불씨도 있고 장작도 있는데, 번제물로 드릴 어린 양은 어디 있습니까?”

“얘야! 번제물로 드릴 어린양은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신단다.”

아브라함은 차마 아들의 눈앞에 손가락질 하며 ‘네가 바로 제물이야!’ 라는 말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그저 앞만 보고 걸어가면서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신단다.’라고 할 밖에. 지난 세월동안 수많은 신학자들이 이 유별난 이야기를 분석하고 해석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실존철학자 키에르케골의 해석처럼 필자의 가슴에 와 닿지는 않았다.

키에르케골은 아브라함의 제사에서 수천 년을 넘어 들려오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고 했다. 그 언젠가 기억도 나지 않는 먼 시절에 자식을 앞세워 보낸 아버지가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 봐도 설명할 방법이 없어, 결국 ‘하느님께서 원하신다!’라고 밖에 할 수 없었던 아버지가 그 옛날에 있었던 것이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자식의 죽음은 하느님 앞에서 인간이 절대 무력한 존재라는 사실을 극적으로 보여준 예이며, 인간 실존의 한계를 절실히 느끼게 만드는 사건이다. 키에르케골은 다음과 같이 말을 이어나간다.

“만약 아브라함이 의심을 했더라면 그는 진실로 다른 위대하고 훌륭한 행위를 했을 것이다. 그는 모리야 산으로 가서 나무를 패고 쌓아 올린 장작에 불을 지피고는 칼을 뽑고 하느님에게 외쳤을 것이다. ‘이 제물을 업신여기지 마소서. 제가 가진 가장 좋은 것은 못되나이다. 저도 아나이다. 늙은 몸이 언약의 아이에 어찌 비기겠나이까. 그러하오나 저로서 바칠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이나이다. 이사악이 이 일을 결코 알지 못하게 하소서. 젊음을 그늘 없이 누릴 수 있게 하기 위하여’ 그리고 제 가슴을 뚫었을 것이다.”(<공포와 전율> 중에서)

영화는 결코 영화 그 자체에 머물지 않는다. 어느 순간인가 우리 맘속 깊숙이 파고들어와 진정한 삶의 의미를 가르쳐주고, 사람답게 사는 길이 어떤 것인지 조언 해준다. 영화는 얼마든지 우리 인생의 좋은 선생이 될 수 있다.

앞의 세 영화에서 인생에 대해 많이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