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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연중 25주일, 최도미닉 신부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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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25)/ 요나3:10-4:11, 필립1:21-30, 마태20:1-16

                                                    모두가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한 시인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살아 있는 것들 모두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이 시인의 노래처럼 우리 사는 세상을 이렇게 만들어 갔으면 좋겠습니다. 모두가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 가는 것, 하느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이요, 하느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그 행복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가야합니다. 이것이 성서가 말하는 하늘나라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하늘나라를 만들어가는 사람일까요? 어떤 사람이 행복을 만들어가는 사람일까요? 이게 오늘 말씀의 요지입니다.

우선 주인의 뜻을 아는 일꾼입니다.

새벽부터 나와서 저녁까지 성실하게 일한 일꾼, 얼마나 칭찬받을 사람입니까? 그런데 꼴찌가 되었습니다. 왜 새벽부터 저녁까지 열심히 일을 했는데, 오히려 책망을 받았을까요? 주인의 뜻을 헤아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집을 짓는 목수에게 제일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재능일까요? 아닙니다. 설계자의 의도에 따라 집을 짓는 일입니다. 그래야 집을 잘 짓는 목수입니다. 이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포도원 주인은 일을 잘했건, 능력이 많건 적건 똑같이 대했습니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부분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른 아침에 일찍 일한 사람이나 오후 5시에 나와서 한 시간 일한 사람이나 똑같은 품삯을 준다면 가만히 있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만약 이른 아침에 일한 사람이나 오후 5시에 나와 일한 사람이나 똑같은 대우를 한다면 누가 이른 새벽부터 일을 하겠습니까? 그런데 주인은 이른 새벽에 일한 사람이나 늦게 일한 사람에게나 똑같은 품삯을 주면서 “내 후한 처사가 비위에 거슬린단 말이요?”하며 화까지 냈습니다.

 

저는 이 분문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런 주인의 행위가 이해 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을 가질 때입니다.

일꾼은 주인이 능력에 따라 대우해 주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그 누구도 비교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모두를 친절하게 감싸 주었습니다. 이처럼 주님은 제자들도 이처럼 서로 사랑하기를 원하셨습니다. 누구보다도 가난하고 소외되고 아파하는 사람들을 먼저 사랑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주인이 나중에 일한 사람들에게 먼저 품삯을 준 이유도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한다 해도 주인의 뜻을 따라 일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삐뚤어져 쓸모없는 일이 되고 맙니다. 그렇다면 맨 처음 일한 일꾼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 수 있겠지요.

그는 능력에 따라 평가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남보다 더 많은 것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바로 이런 생각들이 우리를 불행하게 합니다.

오늘 제1독서의 말씀은 요나의 이야기입니다. 하느님 뜻과 어긋난 생각과 행동이 무엇인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나는 니느웨에 가서 회개를 선포하라는 하느님의 명령을 거부합니다. 그러다가 고래 배속에서 3일이나 죽을 고생합니다. 요나는 하는 수 없이 자신의 뜻을 꺾고 니느웨로 가서 회개를 선포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요나는 이런 니느웨의 모습을 보고 화가 났습니다. 저주 받아도 시원치 안은데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고 구원을 받게 되었으니 얼마나 심통이 났겠습니까? 아마 저 같아도 이런 심통이 났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심통이 난 요나에게 하느님은 이렇게 말하십니다.

 

“내가 어찌 이 큰 도시를 아끼지 않겠느냐?”

 

“그래 니느웨는 이스라엘을 망하게 아시리아의 수도이다. 그래서 너는 이 도시를 증오하고 미워했구나. 그래도 나는 이 도시를 사랑한단다. 그리고 이 도시를 구원하고 싶구나!”

 

이게 하느님의 뜻입니다. 죄인이든 의인이든, 미워하는 사람이든 사랑하는 사람이든 하느님은 모두가 구원 받기를 원하십니다. 모두가 행복해 지기를 원하십니다. 이게 아버지의 뜻입니다.

 

자 보십시오. 주인은 능력이 있건 없건 누구에게나 일감을 주고 싶어 했습니다. 그리고 그 능력과 상관없이 똑 같이 대우해 주었습니다. 이것이 주인의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일을 할 때 정말 피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나는 이런 사람이야?” “나는 한다면 하는 사람이야”라고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이런 사람을 두고 시편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깨닫는 사람도, 하느님을 찾는 사람도 없다. 모두가 비뚤어져 쓸모없게 되었다”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정말 행복을 만들어가는 사람은 내 뜻, 내 고집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길을 끝까지 참고 인내하며 갈 수 있는 사람입니다.

안중 교회앞에는 인력시장이 있습니다. 새벽이 되면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자신에게 일을 줄 주인을 기다립니다. 신체가 건강하고 능력이 있는 사람은 좋은 조건에 일치감치 일감을 찾아 떠납니다. 대개 9시나 반나절은 혹시 일을 줄까 기다립니다. 그런데 반나절이 되어도 일감을 구하지 못한 사람은 다 떠나버립니다. 그 시간에 일감을 줄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오늘 본문을 보면 오후 5시 인데도 주인은 일꾼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리고 일감을 주셨고, 똑같은 임금을 주었습니다. 일감이 없으려니 하고 포기하고 떠난 사람은 아무것도 얻지 못했지만 그래도 끝까지 참고 기다린 사람은 자신이 원하던 것을 얻었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의 뜻이라면 끝까지 참고 그 길을 갈 수 있는 사람 아니겠습니까? 몇 번 해보다가 실패하면 포기하는 그런 삶이 아니라 그 길이 주님의 뜻이라면 끝가지 갈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저는 우리 강동교회 교인들이 이런 마음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디모데오 후서 2장 11절 말씀입니다.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었으니 그분과 함께 살 것이고 우리가 끝가지 참고 견디면 그분과 함께 다스리게 될 것입니다.”

 

포기하는 자는 결코 그 나라를 차지 할 수 없습니다. 나만 장군을 보십시오. 엘리사는 나만에게 병이 났고 싶으면 요단강에서 7번 목욕하라고 했습니다. 만약 나만 장군이 6번 째가서 포기 했다면 그는 나병을 치유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엘리사의 말대로 일곱 번 목욕을 했습니다. 이처럼 지금 당장은 자신이 원하는 어떤 결과는 얻지 못했다 하더라도 꾸준히 하다보면 그 결실을 얻는 법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쉽게 포기합니다.

 

하느님은 포기 하지 않는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왜 나중 된 자가 처음이 되겠습니까? 오후 5시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희망을 버리지 않고 남아 있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환란입니까? 역경입니까? 실패입니까? 좌절입니까? 죽음입니까? 그 어떤 것도 우리를 주님에게서 떼어 놓을 것은 없습니다. 살다보면 우리를 실망시키고 힘들게 하는 것이 많습니다. 유혹의 손길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떠나버린다면 주님의 영광은 없을 수 있겠습니까? 끝까지 참고 견디어 내야 합니다.

 

다음으로, 어떤 처지에서든지 주님의 일을 하라고 하십니다.

주인은 그 사람의 능력이나 조건, 일을 얼마나 했는지도 보지 않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인의 부름에 따라 일을 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일을 하지 않은 자는 아무것도 받을 수 없었지만 일한 자는 누구나 그 임금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주님은 누구나 일하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의 일은 능력이 있는 사람, 시간이 되는 사람만 하는 일이 아닙니다. 능력이 많건 적건, 시간이 많건 적던 간에 누구나 주님의 일을 하여야합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일이란 어떤 것인가요? 내적인 일과 외적인 일이 있습니다.

우선 내적인 일입니다.

내 삶을 정화하는 작업입니다. 주님은 누구나 회개하기를 원하십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말씀의 진리를 배워야 하고, 낡은 마음, 낡은 생각을 버리는 일을 해야합니다.

법정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행복의 비결은 필요한 것을 얼마나 갖고 있는가가 아니라 불필요한 것에서 얼마나 자유로워져 있는가에 있다.”

정말 우리가 행복하려면 불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그 불필요한 것을 내 마음으로부터 빼내는 일을 해야합니다. 이 일을 위해 우리의 시간과 정열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 다음으로 외적인 일입니다.

주여, 주여! 하는 자가 다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처럼 그 뜻을 살아가야 합니다.

봉사하십시오. 나누십시오. 섬기십시오. 봉사하고 나누고 섬기는 자만이 그에 합당한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힘이 없다고, 능력이 없다고, 가진 게 없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있는 그대로 하십시오.

사도 바울은 분명히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특권뿐만 아니라 그분을 위해서 고난까지 당하는 특권, 곧 그리스도를 섬기는 특권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모든 영광은 하느님께 돌리십시오.

아침 일찍 나와서 일한 일꾼은 다른 사람들을 후하게 대해준 주인의 처사를 비판했습니다. 사실은 함께 기뻐해야할 일이 아닙니까? 왜 자신이 받은 은혜에 감사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과 함께 누리는 축복을 기뻐하지 못할까요? 자신은 받은 은혜를 공로의 대가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2독서의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로는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라고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뛰어난 학식도, 명예도, 남들이 갖지 못한 권세도 다 쓰레기로 여길 뿐이라고 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죽는 것도 나에게는 이득이 된다.”고 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자랑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합니다. 다만 자신은 빚진 자 일 뿐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자신을 다 바쳐 헌신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로는 여전히 자신은 빚진 자라고 고백할 수 있는 믿음, 이것을 우리는 은혜의 신앙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공로가 있는 사람이 받는 보수는 자기가 마땅히 받을 품삯을 받는 것이지 결코 선물로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이른 아침에 나와 일한 일꾼이 “왜 나에게 돈을 더 주지 않나요?” 라고 항의 한 것은 선물이 아니라 품삯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능력이 있는데, 이렇게 많은 일을 했는데 왜 요것만 주십니까? 이것은 하느님께 돌리는 영광이 아니라 자신의 영광이요, 자신의 대가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주님의 일을 한다면 주님을 떠난 부자청년처럼 꼴지가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청지기로 부름 받은 사람은 언제나 겸손하게 주님의 일을 해야합니다. 모든 영광을 하느님께 돌리고 자신은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고백하면 됩니다.

교회가 하는 일이 뭡니까? 이 시대의 빛이 되어야 하고 소금이 되는 것 아닙니까? 그 시대의 양심이 되고 정신이 되어서 세상을 바로 세우는 일이 바로 교회가 해야 할 일입니다.

 

하느님은 오늘도 일하십니다. 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생명과 기쁨이 넘치는 세상이 되도록 오늘도 당신의 포도원에서 일할 일꾼을 찾으십니다. 이 부르심에 기꺼이 응답하는 우리 강동 교회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