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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기도와 관상기도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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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관상기도란 무엇인가?


김홍일(성공회 사제, 디아코니아훈련센터)

한국영성치유연구소 이전식에서 하였던 발제

 


1. 기도란 무엇인가?


 기도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정의는 ‘하나님과의 대화’이다. 기도를 ‘대화’라고 정의하는 관점에는 그리스도교 기도의 특징이 잘 드러내고 있는데 그것은 그것이 말이든, 성찰이든, 묵상이든 하나님이라는 인격적 대상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기도를 ‘하나님과의 대화’라고 할 때 거기에는 자신에게 집중하고 몰두하는 독백과는 다른 하나님이라는 대상이 전제되어 있으며, 그 대상과 소통하는 과정이 포함되어야 함을 의미 한다. 하나님과의 대화는 다양한 방법으로 전개될 수 있는데 말하기, 사색하기. 귀 기울이기, 글쓰기 등 말과 언어만이 아니라 사고와 생각, 감정과 느낌으로도 진행될 수 있다.


 그리스도교가 기도에 대한 정의를 ‘하나님과의 대화’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차원에서  새롭게 바라보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들어와서 그리스도교 관상전통에 대한 관심이 새롭게 일기 시작하면서 부터이다. ‘단순히 하나님 사랑 안에 머무는 관상’은 대화라는 개념으로 포괄하기 어려운 일치의 상태를 표현하기 위한 시도라고 생각한다.

 

 

2. 기도의 단계들


 사람들이 맺는 관계에도 여러 수준과 단계의 관계가 존재하듯이 기도 가운데서 기도하는 사람이 하나님과 관계 또한 몇 가지 단계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 단계는 독백의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 기도하는 사람은 아직 기도 가운데 인격적 하나님을 체험하지 못하고 있는 단계이며, 혼자 필요한 말을 토해 놓고 기도를 마치는 일방적 소통의 단계를 하고 있는 상태이다. 이 단계의 기도자는 자신이 기도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기 쉬우며, 하나님께서 자신을 향하여 보여주시는 응답의 체험을 생략한 기도를 드리게 된다.


  둘째 단계의 기도는 대화의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 기도하는 사람은 기도 중에 하나님께 자신을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응답을 다양한 방식을 통해서 듣기도 한다. 독백의 단계에서는 기도의 초점이 자신이지만 대화의 단계에서는 하나님께서 기도 안에 현존하시며, 기도하는 사람과의 하나님의 사이에 소통과 친교가 시작된다. 이 단계에서부터 기도하는 사람은 기도 중에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체험하기 시작하며 하나님께서는 기도하는 사람의 삶과 문제들에 대하여 영향력을 행사하시기 시작한다. 이 단계의 기도를 하는 사람은 기도를 체계있게 배우고 자신에게 적합한 기도를 발견하여 꾸준히 실천하여야 한다.
 

 셋째 단계의 기도는 듣는 기도이다. 하나님과의 친교와 사랑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우리보다 더 잘 알고 계시다는 믿음과 하나님께서 자녀인 우리들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기를 원하신다는 믿음이 생겨나면 청원보다 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에 귀 기울이는 것을 더욱 사모하게 된다. 이 단계에서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여야 하며, 기도 중에 만나는 자신의 죄나 한계들과 용기있게 자신과 직면하여야 한다. 기도하는 사람은 이 단계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하여 자기초월의 성장을 시작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기도 중에 새로운 깨달음으로, 새로운 의지를 불러일으킴으로, 충만함이나 평화, 기쁜 감정으로, 때로는 상상력이나 기억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마지막 단계는 사랑의 단계이다. 이 단계는 어떤 언어나 생각을 넘어서 하나님 사랑 안에 우리가 머물며 쉬는 단계이며 관상의 단계이다.    

 

 

3. 마음과 가슴으로 드리는 기도


 기도를 몇 가지 형태로 유형할 수 있다고 한다면 첫째는 가장 일반적인 형태로 우리가 말로 드리는 입기도(구송기도)이다. 둘째는 우리들의 생각을 사용하여 드리는 묵상기도이다. 셋째는 단순화된 생각과 충만한 감정으로 드리는 정감의 기도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들의 생각과 감정 너머, 하나님 품 안에 안겨 드리는 관상기도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하워드 L 루이스는 개혁주의 전통에서 기도의 균형을 위하여 강조하는 네 요소가 있는데 첫째는 개인기도와 공동기도의 균형, 둘째는 기도의 자발성과 훈련, 셋째는 마음과 가슴으로 드리는 기도, 넷째로 말하는 자인 동시에 듣는 자로 기도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필자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기도를 말과 언어만이 아니라 마음과 가슴의 일로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개혁주의 전통에 있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묵상(관상)기도를 낯설어하고, 때로는 그것을 가톨릭교회의 기도로 치부하기도 한다. 그러나 하워드 L 루이스의 견해에 따르면 개혁주의 전통에서도 기도가 생각과 감정을 나누는 단계를 넘어서 마음과 가슴을 나누는 단계로 발전되어야 함을 강조하여 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l처럼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은 생각의 차원을 넘어서는 마음과 가슴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일이고, 묵상과 관상은 우리의 마음과 가슴 깊은 곳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를 의미한다고 하겠다.


 마음과 가슴은 기도의 공간이다. 기도의 본질은 느낌으로, 언어로 드리는 것일 뿐 아니라 마음과 가슴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무엇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 단순한 일만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쉽게 가슴에 가 닿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우리들 가슴은 오랜 세월동안 자기방어, 자기를 치켜세우고픈 태도와 생각에 의해서 의식적인 것과 무의식적인 것으로 덧씌워져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우리 일상을 지배하고 있는 복잡한 생각들과 감정들이다. 은수자 Theophan 은 ‘머리는 쓰레기 더미처럼 복잡하다 : 우리는 거기에서 하느님께 기도드릴 수 없다.’ 고 말하였다. 그래서 기도드릴 때 우리는 우리의 주의를 우리의 머리가 아니라 가슴에 모아야 한다. 우리가 ‘mind in heart’ 라고 할 때 마음은 주의를 의미한다.


 어떻게 우리의 주의를 가슴으로 모을 수 있을까? 첫째는 침묵과 고요이다. 침묵과 고요는 단순히 대화의 중단이나 소리가 없는 조용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이같은 외적 환경도 필요하지만 침묵과 고요는 그것 이상을 의미한다. 침묵과 고요에는 세 단계 차원이 있는데 1단계는 몸의 침묵과 고요이다. 먼저 긴장을 풀고 마음을 모으기 좋은 자세를 취하는 것을 의미한다. 2단계는 마음의 고요와 침묵이다. 이것은 이전 것보다 어려운 일이다. 이 단계에서는 떠오르는 모든 생각들을 흘려보내야 한다. 3단계는 영적 고요와 침묵이다. 이 단계는 오직 몸과 마음의 고요와 침묵을 이룬 다음 도달할 수 있다.
    


4. 묵상기도와 관상기도


 그리스도교 전통에서는 묵상(meditation)과 관상(contemplation)을 구분하여 왔다. 요사이 관상은 향심기도(Centering Prayer)나 예수 호칭기도처럼 거룩한 단어나 짧은 기도문을 반복하는 형태의 기도를 포함하여 이야기하지만 십자가의 성요한은 “묵상은 기도와 영성적 습관의 의도적인 온갖 행위와 훈련”인 반면 “관상은 고요한 형태의 묵상이며 훈련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였다.


 묵상은 보통 성경과 그리스도의 삶을 숙고하기 위하여 사람의 지능, 기억, 의지 그리고 상상을 이용하여 하느님에 관하여 생각하는 기도이다. 샬렘의 선임연구원이었던 제랄드 메이에 의하면 관상에 대한 전통적인 설명에서 드러나는 몇 가지 심리학적 특성이 있는데 첫째는, 의식이 열려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묵상의 단계에서 기도하는 사람이 하는 노력처럼 한 가지 집중하여 다른 것들을 모두 배제하는 상태가 아니라는 것이다. 두 번째 특징은 현재의 순간에 집중된다는 점이다. 기도 중에 기도하는 사람은 새소리도 듣고, 바람도 느낄 수 있으며, 과거의 기억이나 미래에 관한 생각이 생겨날 수 있지만 그것들은 그저 스쳐지나가는 것에 불과할 뿐 더 이상 기도하는 사람의 주의를 끌지 못한다. 그리고 마지막 한 가지 중요한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기도 중에 기도하는 사람이 하나님 사랑 안에 머물고 있다는 점이다.

 

 

 4. 묵상기도와 묵상의 방법들


 앞서 언급하였듯이 묵상기도는 우리들의 기억, 이해력, 의지 등 정신의 힘들이 기도로 들어 올려지는 기도이다. 초기 교회에서 묵상의 재료는 성경이었다. 예수님께서도 자주 구약과 시편성경을 인용하여 기도하셨으며, 이처럼 성경말씀을 읽고 기도하는 전통은 유대교와 초기 그리스도교 교회, 그리고 사막의 교부들과 수도회의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 전통을 통하여 이어져 왔다.


 오리게네스는 진리는 성경을 통하여 역사 안에 현존하며 성경은 지혜의 원천이라고 강조하였고, 요한 크리스토퍼는 성경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낸 편지라고 하였다. 이처럼 성경에 대한 강조는 사막의 교부들에게는 물론이고 이후 수도회 생활에 있어서도 기도와 수행에 있어 성경말씀을 묵상하는 일을 수행의 기본으로 자리 잡게 하였다. 실재로 초기 수도회에서 신입회원을 받아들일 때 암기력을 시험하였던 것은 성경을 오늘 날처럼 자유롭게 읽을 수 없었던 상황에서 성경말씀을 외워서 암송하여야만 하였고, 그래야 기도와 수행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중세 초기까지 묵상의 주된 재료는 성경이었으며 묵상은 생각이 아니라 읽은 말씀을 조용히 중얼거리며 기도하는 과정을 의미하였다. 베네딕트는 묵상에 대하여 말하기를 “묵상은 말씀을 읽고, 또는 읽는 것이며, 읽은 것을 되내이고 웅얼거리고 다니는 것이며, 되씹고 읊는 것이요, 정신에 붙박아두고 마음속에 새기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 역시 “당신이 만일 듣거나 읽는다면 그것을 먹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묵상을 한다면 방금 들었거나 읽은 것을 되새김질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중세 후기에 이르면서 묵상의 재료는 성경에서 교부들의 문헌과 다른 영성서적으로 확대되기 시작하였고 14세에는 영적독서를 묵상과 기도를 위한 준비를 넘어 독립적 수련으로 간주하기 시작하였다. 이같은 경향은 주로 예수회에 의해서 강화되고 발전되어 왔다.


 고대 교회와 수도회 중심의 묵상 방법과 비교하여 중세 후기에 일어난 새로운 묵상방법은 두 가지 측면에서 차이가 있다. 첫째는 대상을 생각하고 고찰하는 방법에 새로운 것을 도입한 것이고 둘째는 묵상이 하루 일과에서 정해진 시간에 행해지면서 하나의 영성수련 과정이 된 것이다. 17세기 프랑스의 샹 슐피스는 묵상하는 방법과 관련하여 “묵상하는 사람은 먼저
‘예수를 눈앞에’ 떠올려 그를 열렬히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라보아야 하며 그 다음으로는 ‘예수를 마음속에 간직’하여 그와 함께 대화하는 단계로 나아가야 하고, 마침내 ‘예수를 손 안에 가져’ 하느님의 뜻이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래야한다.”고 하였다.


 묵상기도는 주로 우리들의 추리, 기억, 상상, 성찰 등 사고를 통하여 기도하는 것으로 묵상기도의 방법으로는 앞서 언급한대로 중세 초기까지는 성경말씀을 통한 묵상이 지배적이었으나 이후 다양한 소재를 통한 묵상과 다양한 형태의 묵상방법들이 실천되었다. 향심기도에서처럼 거룩한 단어의 사용, 떼제 찬양과 같은 짧은 챤트의 반복, 춤과 같은 동작을 통한 묵상, 일지쓰기를 통한 묵상, 음악을 들으며 하는 묵상 등 다양한 형태의 묵상기도가 가능한데 묵상은 무엇보다 사랑에 기초하며, 기도에서 우리의 주도성을 필요로 한다는 특징을 갖는다.

 

 

5. 개혁주의 영성과 관상전통


 사람들이 성지를 순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현장에서만 느낄 수 있는 분리를 넘어서는 인식에 대한 갈망의 표현이 아닐까? 관상기도를 가르켜 ‘일치의 기도’라고 할 때 그것은 우리의 생각보다 크고 높으신 하나님을 만나는 기도를 표현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대상에 몰입할 때 대상과 연합하게 된다. 구경꾼들로서는 생각할 수 없는 방법으로 애국자는 조국을 알고, 예술가는 자신의 작품을 알고,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을 알게 된다.


 그동안 개혁주의 전통에서는 하나님과의 일치를 추구하는 이같은 관상적전통의 영성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여 왔다. 그러나 하워드 L 라이스는 그의 책 “개혁주의 영성 Reformed Spirituality”에서 칼빈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필수적인 것으로 내세웠던, 언제나 균형이 유지되어야 하는 세 가지 것들 – 의(義,) 검소, 거룩 – 이 있는데 이것들은 또한 시에나의 케서린(Catherine of Siena) 아시시의 프란시스(Francis of Asssisi) 십자가의 성 요한(John of the Cross), 아빌라의 데레사(Teresa of Avilia)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 의해 표현된 가톨릭 보편교회의 역사적 믿음의 영성과 조화를 이룬다고 지적하고 있다.


 루이스는 그 가운데서 거룩과 관련하여 아래와 같이  칼빈의 주장을 인용하고 있다.


“우리는 머리와 지체들간의 연합, 즉 우리 마음속에 계시는 그리스도의 내주하심 – 간단히 말하면, 신비로운 연합 – 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긴다. 따라서 우리의 것이 되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당신과 함께, 당신이 받으신 선물의 공유자가 되게 하신다.”


그는 믿는 자와 그리스도와의 이러한 신비적 연합이 개혁주의 전통에서 말하는 거룩함의 진정한 핵심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하나님과의 연합을 말했던 영성의 몇몇 중세형태들과 달리 개헉주의 영성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초점을 맞추었다. 17세기 사람으로 신비적이었던 사람들 가운데 아마도 청교도에 가장 가까웠던 인물인 프란시스 루스(Francis Rous)는 결혼이라는 이미지를 사용하여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다음과 같은 극단적인 말로 표현하였다.


“당신은 하나님이신 분과 결혼한 상태이며, 그 분 안에서 당신은 또한 하나님과 함께 있는 사람이다. 그분은 개인적인 연합에 의해 당신과 하나이며, 당신은 신비적 연합에 의해 그분과 하나이다. 그리고 그렇게 그분과 연합되고 그분과 혼인한 상태이므로, 그분의 영이 여러분의 영에 흘러 들어오며. 신성이 여러분의 영혼에 흘러내린다.”


 루이스는 그의 책 “개혁주의 영성‘을 통하여 종교개혁자들의 영성전통 안에 관상적인 차원의 영성이 어떻게 자리 잡고 있는지에 대하여 다양한 자료를 통하여 논증하고 있다.      

 

 

6. 관상기도와 관상의 여정


 인간의 의식작용은 실재 그 자체와 관계 맺는 것이 아니라 실재로부터 도출한 이미지나 개념과 관계를 맺는다. 그런 점에서 관상은 묵상에서 작용하는 의식과 사고의 세계를 넘어서 하나님 자체와 관계하기 위한 기도라고 할 수 있다.


1)  침잠


 에블린 언더힐은 관상훈련의 첫 단계를 침잠, recollection 이라고 하였다. 침잠은 주의력을 의지의 지배아래 두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성녀 데레사는 침잠은 규칙적으로 신중하게 묵상을 실천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했다. 그런 점에서 묵상은 생각과 관상 사이에 중간 지점이다. 데레사는 제자들에게 ‘나는 위대하고 기묘한 생각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저 바라보라는 것’이라고 했다. 그것은 분석적인 바라봄이 아니라 사랑의 응시이며 그래서 데레사는 묵상을 많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많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묵상 주제를 선택한 이후 묵상을 하는 동안 기도하는 사람은 영적으로 가장한 모든 공격에 맞서야 한다. 분심으로 인하여 묵상이 방해를 받게 되는데 그때마다 다시 묵상 주제로 돌아가서 그것을 다시 생각하고 응시하고 붙잡아야 한다. 권태롭고 자신이 무능하다는 서글픈 생각이 들 터인데 이것 역시 거부하여야 한다. 보통 묵상을 시작하고 15분 정도는 이러한 분심꺼리들과 씨름하는 시간이 될 것이다.


 그러한 시간이 지나면 묵상의 주제가 생각지도 않은 의미, 아름다움, 능력을 타나내기 시작한다. 묵상이 더욱 깊어지면 외부세계로부터 오는 집요한 공격으로부터 보호를 받게 된다. 바깥세상의 번잡한 소음이 당신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멜로디처럼 들리며, 이제 그 소음으로부터 벗어났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이같은 과정을 통하여 서툴지만 번잡하고 분주함 속에 자신과 또 다른 자신의 실재를 구분하는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면 이미 관상생활의 초기 단계에 도달하였다는 징조이다.


2) 정화


 그같은 침잠으로 기도하는 사람은 세상의 번잡한 생활에 만족하기를 거부하며 영적인 우주와 교제하기를 갈망하는 존재를 발견한다. 침잠상태에 친숙해지면서 기도자의 태도를 결정하는 의식은 과거에 자신이 일상생활에서 매우 적절하다고 여겼던 의식이나 태도와 첨예하게 충돌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처럼 자신의 죄스러운 모습을 만나게 되면 기도자는 자기 전존재를 개조하려 하지 않을 수 없으며 회심에 대한 갈망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같은 변화를 향한 갈망과 노력에서 무력한 자신을 보면서 기도자는 하느님의 도움에 의한 변화를 갈망하게 되는데 신비가들은 이 단계를 정화의 단계라고 하였다. 정화란 성품을 극적으로 재형성하는 것으로 이것이 두 번째 단계이다. 우리들의 지성만 세상에 대한 피상적이고 비현실적인 견해에 동화, 연합되었던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지, 갈망, 우리의 에너지 전체가 그릇된 길로 향했고 잘못된 기계에 사용되어 왔다. 그래서 마음은 하느님을 향하지만 기도자는 여전히 습관의 속박을 받고 자유하지 못하다.


 때문에 습관과 욕망에 오염되지 않은 하느님과 교제하는 묵상시간을 실천하는 일을 꾸준히 실천하여야 한다. 이 과정은 서로 다른 두 인격이 싸우는 과정이며, 침잠을 통하여 우리는 사람이 천사도 아니고 짐승도 아니며, 영원을 향하여 살 수도 있고, 또 유한한 세상을 향해 살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 대치상황이 해소되지 않는 한 우리는 온전한 평화를 누리지 못한다.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려는 사람에게는 신중한 자기-단순화, 마음과 의지의 정화가 요구된다. 이 모험에서 성공하려면 모든 힘과 결심을 동원하여야 한다. 이 때 중요한 것은 신비한 성품 즉 용기, 단순한 마음, 절제가 중요하다. 신비가들은 이를 위하여 집착에서의 이탈과 금욕에의 헌신을 추구하였다.


 이기심의 죽음, 사심이 없는 상태, 자비한 마음의 시각이 바로 참 지식과 만나는 조건의 비밀이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마음이 가난한 사람,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 하느님을 볼 것이라고 하였다. 사랑과 의지를 가지고 관상적 실천을 꾸준히 할 때, 침잠에 의해서 산만한 생각이 정지되고 이탈에 의해서 산만한 욕망이 제거되었듯이 이제 흐트러진 산만한 소원, 영혼의 내향적 본능과 외향적 본능 사이에 망설임도 억제되고 해결 될 것이다.


 3) 관상의 형태들


 관상의 첫 번째 형태는 엄격한 재조정, 조명의 과정을 통하여 이기적인 자아의 독재를 물리치고 보다 폭넓은 삶의 자유를 획득한다. 그로인해 사물에 대한 확대되고 강화된 인식, 자유하게 된 의식의 유산이라고 선언하는 것에 동참한다. 이처럼 개인이나 그룹의 실존보다 더 큰 실존의 강력한 리듬에 기꺼이 복종하는 것에 의해서 보다 큰 자아인식에 이르게 된다.


 이 과정을 통하여 기도자와 주위의 감각대상들 사이에서 기도자가 상상했던 것 보다 훨씬 친밀한 관계를 발견하게 되고 또 감각대상 안에서 심오한 의미, 개인적인 특성, 실절적인 반응능력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은 마치 성프란시스가 형제 바람과 자매 물이라고 말한 것처럼… 19세기 위대한 관상가 중에 한 사람인  플로랜스 나이팅게일은 ‘나는 내 친구들 안에서 하느님을 보기 위해 노력하고, 내 고양이 속에서 하느님을 보기 위해 노력한다.’고 했다.


 관상의 두 번째 형태는 기도하는 사람이 살아있는 것들에 대한 보다 큰 의식에 들어감에 따라 연속적으로 노르위치의 쥴리안 발견하였던 특성으로 표현된다. 쥴리안이 피조된 우주의 하나 됨을 보여주는 ‘작은 것’을 관상의 눈으로 바라볼 때. 그녀의 심오한 사랑의 시각은 그 안에서 연속적으로 세 가지 특성을 감지했다. 첫째는 하느님이 그것을 만드셨다는 것, 둘째는 하느님이 그것을 사랑하신다는 것, 셋째는 하느님이 그것을 보존케 하신다는 것이다. 그녀는 세 가지 견해가 아니라 세 가지 사실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들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신비가들은 말하기를 ‘하느님은 가깝고도 멀다’고 한다. 생각에서는 멀지만 우리의 삶을 흠뻑 적시고 지원해주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 안에 거하고 그 분은 우리 안에 거하신다. 우리들은 항상 포옹해주는 창조적인 사랑에 의해 양육되고 유지되어 왔지만 우리들은 자신이 호흡하는 공기만큼도 이것을 의식하지 않고 있다.

 두 단계 사이에 현저한 차이점이 있다. 첫 단계에서는 의도적으로 내면으로 들어가서 침잠에 의해 초래된 기도하는 사람의 기능들을 모아들이는 것이 새로운 출현의 서곡, 순수히 개인적인 삶의 편협한 한계를 벗어나서 피조세계에 대한 보다 훌륭하고 참된 이해에 들어가기 위한 준비 행위였다면 이제 두 번째 단계에서 훈련과 집중된 주의력은 반대의 경로를 취하는 듯 하다. 그것은 기도자의 육체적인 감각이 애착하지 않는 실존의 차원을 향한다. 신비가들이 말하듯이 생각하거나 말할 수 있는 모든 것들로부터 떠나 자신의 중심을 향해 내면으로 내려가야 하며, 십자의 요한이 감각의 밤이라고 한 기이하고 특이한 어두운 상태를 향해야 한다.


 마지막 단계는 지금까지 기도자가 획득한 모든 것은 기도하는 사람 자신의 고된 노력의 집접적인 결과였다. 기도자는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었고, 날카로운 사랑의 화살로 무지의 구름을 공격하였다. 이제는 경험할 모든 것이 기도자의 노력이 아니라 선물처럼 발생할 것이다. 기도하는 사람은 길을 잃은 것처럼 느낀다. 실존의 주요한 목적이 제거된 것처럼 느낀다. 이제 기도자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없지만 기도자에게 행해질 수 있거나 행해져야 할 일은 많다. 영적 만족을 향한 갈망처럼 이기심의 마지막 단편들이 정화되는 과정이며 하느님의 활동이 인간의 행동을 대신하는 과정,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시게 되는 단계이다.

 


7. 기도, 그리고 일상으로의 확장


 기도란 무엇인가? 그것은 내 사랑 안에 머무르라는 초대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며, 하나님 사랑 안에 머물면서 예수님께서 누리셨던 기쁨과 생명을 우리들도 누리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간절한 초대이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돌과 땅이 하나인 것처럼 영혼과 하느님도 하나인데 돌을 땅의 중심부로 이끄는 것은 중력이지만 영혼은 하느님께로 이끄는 것은 사랑이라고 하였다.


 기도를 한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고, 우리의 기도가 실재로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방해할 수 있다고 경고하였던 토마스 머튼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토마스 머튼에 의하면 기도의 위대한 점은 기도하는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께 집적 가는 일이라고 하였다. 그는 최선의 기도는 멈추는 것이고,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기도하도록 허락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그런 점에서 묵상을 배운다는 것은 어떤 인위적 기술을 익혀서 하고 싶을 때는 언제나 ‘참회와 허무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총을 주시려고 할 때 언제든지 이 은총을 받기 위한 역량을 키우는 일이고, 이는 겸손으로 향한 항구한 마음의 태도, 현실성과 감수성과 유연성을 향한 주의력을 포함한다.


 토마스 머튼에 의하면 관상이란 사람의 지적, 영성적 삶의 최고 표현이다. 관상은 깨어 활동하며 생명이 살아있다는 것을 충분히 의식하고 있는 생명 자체이다. 그 길은 은밀한 체험을 하기 위해 계획적으로 자기를 비우는 ‘기술’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거의 이해할 수 없는 부르심에 대한 역설적 응답이다.


 오래 전 일본 갈멜 수도회 오쿠무라 이치로신부님의 ‘기도’라는 책을 흥미있게 읽은 기억이 있다. 그 중에서도 ‘물과 기도’의 비유는 일상과 기도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저자는 먼저 인간의 몸에서 수분이 차지하는 비중이 70%라는 점과 몸의 생존에서 물이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다. 사람의 몸이 수분을 섭취하는 방법에는 세 가지 경로가 있는데 첫째는 공기 중에 있는 수분을 호흡을 통하여 섭취하는 경로이다. 둘째는 음식물에 있는 수분을 통하여 섭취하는 경로이고 마지막으로는 물 자체를 섭취하는 경로이다. 저자는 기도의 필요성을 기도의 신체성에서만 끌어 낼 수 있다고 하면서 신앙적 생명과 생존을 위해서도 쉬지 않는 호흡으로 공기 같은 하느님을 취하고, 일상 속에서도 식사를 하듯 음식물 같은 하느님을 취할 뿐만 아니라 매일 일정한 분량의 물에 마시듯 물 자체이신 하느님을 취할 기도의 시간을 가져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물론 몸의 생존을 위하여 매일 일정한 시간을 확보하여 물 자체를 마시는 기도가 가장 중요하겠지만 그렇다고 일정한 시간에 섭취하여야 하는 식사 같은 기도와 수면시간에도 멈추지 않는 호흡 같은 기도가 없어도 온전하고 건강한 신앙적 생명을 유지할 수 없을 것이다.


 ‘생활이 곧 기도’가 되는 과정은 이처럼 호흡 같은 기도와 식사 같은 기도를 통하여 완성되는 것이며, 안정적인 기도의 시간과 공간을 확보하기 어려운 조건에서 생활하여야 하는 많은 현대인들에게 이같은 기도가 차지하는 비중과 중요성은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안토니오 성인은 “영적독서는 기도로 나아가야 하고, 읽혀진 내용은 실생활 안에서 전개되어야 한다.” 고 강조하였다.


 묵상이라는 뜻의 히브리어 haga를 나타내는 그리스어 meletao 는 말씀을 내면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자갈밭이나, 가시덤불, 뙤약볕이 내리쪼이는 땅이 아니라 가슴에, 좋은 땅인 가슴에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하여 기도가 열매 맺는 삶으로 이어지는 져야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참된 기도는 기도를 마치고 나서 일상과 현장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복되어라! .. 야훼께서 주신 법을 낙으로 삼아 밤낮으로 그 법을 되새기는 사람! (시편 1:2)


 

출처 : 성공회 영성센터 (http://cafe.daum.net/soulfriend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