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박태식의 함께 사는 이야기 사회적인 관심

[문제에 직면하기] 사회적인 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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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에 직면하기] 사회적인 관심

박태식 신부(성공회 장애인센터 ‘함께사는세상’ 원장)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서서 예수의 속을 떠보려고 “선생님, 제가 무슨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율법서에 무엇이라고 적혀 있으며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읽었느냐?” 하고 반문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생각을 다하여 주님이신 네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하였습니다.” 이 대답에 예수께서는 “옳은 대답이다. 그대로 실천하여라. 그러면 살 수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율법교사는 짐짓 제가 옳다는 것을 드러내려고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 사람이 가진 것을 모조리 빼앗고 마구 두들겨서 반쯤 죽여놓고 갔다. 마침 한 사제가 바로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 사람을 보고는 피해서 지나가 버렸다. 또 레위 사람도 거기까지 왔다가 그 사람을 보고 피해서 지나가 버렸다. 그런데 길을 가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그의 옆을 지나다가 그를 보고는 가엾은 마음이 들어 가까이 가서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매어 주고는 자기 나귀에 태워 여관으로 데려가서 간호해 주었다. 다음날 자기 주머니에서 돈 두 데나리온을 꺼내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잘 돌보아 주시오.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오는 길에 갚아드리겠소.’ 하며 부탁하고 떠났다. 자, 그러면 이 세 사람 중에서 강도를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준 사람은 누구였다고 생각하느냐?” 율법교사가 “그 사람에게 사랑을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루가 10,25-37

선한 사마리아 사람

1 세기 로마 제국의 식민지였던 이스라엘 땅은 세부분으로 행정구역이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북쪽의 갈릴래아, 남쪽의 유대아, 중앙의 사마리아입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에는 슬픈 역사가 있습니다. 이민족과 피를 섞었다는 이유로 다른 지방의 유대인들로부터 천대를 받았습니다.

어느 유대인 남자가 예리고로 가는 길 가운데 강도를 만났습니다. 강도들은 옷을 뺏고 그를 반쯤 죽여 놓았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가는 길은 원래부터 위험하다고 정평이 나 있었기에 예수님의 비유를 듣던 이들도 모두 고개를 끄덕였을 겁니다. 사제와 레위는 그 장소를 피해갔는데 이는 자기들도 강도를 만날 까 겁을 먹어서가 아니라, 율법에 따르면 부정不淨한 장소(강도 사건이 난 장소)를 피하는 것이 원칙이었기 때문입니다(레위 21장). 사제와 레위는 의인인 양 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달랐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반쯤 죽은 사람을 구해 여관에 데려갔는데, 이 비유가 보다 감동적인 이유는 여관 주인에게 던진 한 마디에 있습니다. “저 사람을 돌봐 주시오.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당신에게 갚아 드리겠소.”(35절) 하지만 우리는 사마리아 사람이 다시 온다는 약속을 통해 혹시 강도당한 사람의 상처가 더 깊어지지나 않을까, 혹시 치료비라도 부족하면 어쩌나 하는 그의 따뜻한 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를 처음 듣던 이들은 사마리아인의 착한 마음씨에 감동을 받았을 법합니다.

비유의 목적은 진정한 이웃이 누구인지 알려주는 데 있습니다. 이야기를 듣고 나서 사마리아 사람을 지목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겁니다. 통념을 완전히 바꾸는 이야기 설정입니다. 도대체 사마리아 사람에게 도움을 받는다는 것을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천연덕스럽게, 당대의 최고 종교 권력자인 사제를 빗대어 이런 이야기를 하신 겁니다.

이웃은 그렇게 다가옵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데서, 전혀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상식의 허를 찌르며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아니면 내가 바로 그런 이웃이 되는 게 비유를 이해하는 빠른 방법이 될 수 있을지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