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박태식의 함께 사는 이야기 믿음은 좋지만 교회는 곤란해

믿음은 좋지만 교회는 곤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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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좋지만 교회는 곤란해

박태식 신부(성공회 장애인센터 ‘함께사는세상’ 원장)

‘믿음은 좋지만 교회는 곤란해?’(Glaube Ja – Kirche Nein?) 얼마 전에 독일 인터넷 서점에서 구해 읽은 책 제목이다. 제목만 보아도 짐작할 수 있듯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과 제도교회가 따로 움직이는 유럽 그리스도 교회의 자화상을 그린 책이다. 또한 이 책에는 ‘고백적인 믿음’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는 가톨릭교회의 현실에 직면해 언젠가 큰 위기의 상황이 도래할지 모른다는 우려도 담겨 있다. 미국에도 이와 비슷한 현상이 있어 ‘나는 종교적인 사람이 아니라 영적인 사람이다.’(I’m not religious, but spiritual!)라는 말이 유행한단다. 이 역시 교회의 권위적인 모습에 실망한 평신도들이 교회를 떠나가는 세태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이다.  

한국의 가톨릭교회는 과연 어떠한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의 삶을 반성하는 고백적인 믿음이 살아 숨 쉬고 교회의 권위적인 모습에 실망을 느끼는 평신도들의 움직임을 감지할 수 없는가? 아니,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등록 교우 중에 2/3이 ‘쉬는 교우’라는 통계를 본 게 엊그제 같은 데 요즘은 3/4가 쉬는 교우라고 한다. 평신도의 이탈 현상이 심각해지고 있다. 매주 미사에 평신도들이 성당 가득 들어차는 모습만 보고 사태의 심각성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될 일이다.

사실 한국 가톨릭교회에서는 평신도의 비중이 끊임없이 강조되고 있는 형편이다. 영세 받는 인구는 매년 기록을 갱신하고, 시노드가 열리면 평신도의 중요성이 예외 없이 역설되고, 평신도의 왕직, 예언자직, 사제직은 언제나 등장하는 단골 메뉴이다. 그리고 480만 명을 헤아리는 가톨릭교우 숫자와 갖가지 교구 행사에 구름처럼 모여드는 평신도들까지 감안하면 평신도가 사라진 한국 가톨릭교회는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 그런데도 쉬는 교우가 늘어난다는 것은 어떤 뜻일까?

한국의 가톨릭교회에는 평신도를 일종의 병풍처럼 여기는 풍조가 있다. 그래서 평신도를 거론할 때면 종종 수치와 100분 율이 사용되곤 한다. ‘우리 성당의 전체 교우 숫자는 6천여 명이고, 그 중 여성 비율은 70%이고, 그들이 내는 헌금으로 지탱되는 1년 예산은 대략 30억 원에 달한다.’는 식이다. 그에 비해 주임신부님은 사진과 더불어 자세한 약력, 심지어 취미까지 소개된다. 마치 그 교회공동체는 주임신부 아무개와 나머지 6천명의 평신도로 구성되어 있다는 인상마저 받는다. 교우 한 사람 한 사람의 구체적인 믿음과 애절한 사연은 언제나 통계의 그늘 속으로 사라져가는 느낌이다.  

평신도의 교회 내 위상을 높이는 방법으로 권위적인 교회 제도를 고치거나 평신도 신학을 재정립하자는 의견들이 있다. 물론, 근본적인 해결책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보다 시급한 요구가 있는데 성직자들의 태도에 우선적인 변화가 있어야 한다. 신부님들이 평신도 쪽으로 먼저 달려가 고개 숙여 악수를 청하고, 평신도가 하는 말허리를 끊지 않고,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을 기억하고, 아무에게나 반말하지 않고, 식사 값을 먼저 내기만 해도 상황이 많이 달라질 것이다. 또한 성경을 배우고 싶어 하는 평신도에게 폭넓은 기회를 제공해야 하며(2008년 6월 1일자 가톨릭 신문 참조), 평신도가 너무 많이 알면 위험하다는 사고방식도 버려야 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사목을 제외한 모든 교회 행정을 평신도 전문가에게 맡기는 게 바람직하다. 마치 예루살렘 모교회의 사도들이 내렸던 위대한 결정처럼 말이다(사도 6,1-6 참조).

성서학이 전공인 필자는 대학 강의보다 오히려 수도자와 평신도를 대상으로 성서강의를 할 때 신바람이 나곤 한다. 그분들은 학점이나 장래 취직과 무관하게 오직 성서에 대한 신앙적, 지적 호기심에서 강의를 듣기 때문이다. 특히, 교구에서 주최하는 대규모 성서강의를 할라치면 수 천 명 앞에 서기도 하는데, 그런 때면 정말 대단한 자부심이 느껴진다. 도대체 교우들의 이런 열정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또한 그 열정을 교회는 어떻게 수용하고 발전시켜야 할까?  

성직자는 죽고 평신도가 살아야, 교회가 산다. 그러기 위해서는 평신도들의 목소리에 진지하게 귀 기울이는 성직자들의 층이 점점 더 두터워져야 한다. 그리스도교는 예수님 때부터 태생적으로 비판적인 성향을 가진 종교이다. 줄지어 울려 퍼지는 찬양만 듣기 원하는 교회는 희망이 없다.

아마 이 글을 읽으면서 평신도 교회를 위한 제안 치고는 좀 싱거운 편이라는 생각하실 독자가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평신도들에게 가톨릭교회란, 세계 10억 인구를 자랑하는 거창한 제도교회보다 자신이 속한 본당 신부님의 화사한 표정으로 우선 다가온다는 점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1997년과 1998년에 ‘한국 가톨릭교회 이대로 좋은가?’라는 제목으로 서강대학교 종교신학연구소가 주최한 심포지엄이 열린 적이 있었다. 2년 연속 심포지엄에 참여하면서 다양한 측면에서 제기된 비판적인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또한 심포지엄에 참여했던 분들로, 교수 신부님들은 물론, 압빠스, 수도원장, 그리고 현재 가톨릭대학의 총장으로 일하는 신부님까지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심포지엄 그 자체로 가톨릭교회의 큰 희망이었던 셈이다. 적어도 그런 비판을 성찰할 수 있을 정도의 교회라면 건강한 모습을 갖추고 있다는 생각에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