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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길, 선택의 길입니다(연중 19주일, 최도미닉신부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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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8. 11(연중19주일)/ 이사1:10-20(창세15:1-7); 히브11:1-3,8-16;루가12:32-40

믿음의 길, 선택의 길입니다

 

한 가전 회사의 선전 문구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순간의 선택이 십년을 좌우합니다.”

어디 가전제품뿐이겠습니까? 사실 우리는 매일 매일 무엇인가를 선택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우리의 삶은 바로 그 선택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어떤 것은 축복이 되기도 하고, 또한 불행이 되기도 합니다.

이처럼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결국 신앙이란 선택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살 때는 어떤 기준을 가지고 요모조모 따져서 삽니다. 이처럼 우리도 무엇인가를 선택하고 결단할 때에도 요모조모 따져야합니다. 이 때 우리는 어떤 것을 기준으로 삼고 선택해야 합니까?

바로 하느님의 뜻입니다. 내가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 속에서 자연스럽게 하느님의 뜻을 생각하고, 그 뜻을 선택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왜 하느님의 뜻을 생각하며 선택해야 합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 기꺼이 하늘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로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보다 더 분명한 말씀이 없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선택할 때 하느님의 뜻을 선택하면 하느님은 우리에게 하늘나라를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은 신약과 구약의 핵심입니다. 아브라함도 이 약속을 믿고 선택했고, 이사야도 이 약속을 믿고 참된 예배와 거짓예배를 구별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장입니다. 믿음으로 살아간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모세가 왜 파라오의 딸의 아들이라 불리우는 것을 거부하고 하느님을 선택했나요. 왜 “메시아를 위해 당하는 치욕을 에집트의 재물보다 더 값진 것”으로 여겼나요.

37절 이하의 말씀을 보십시오.

왜 사람들이 고문을 달게 받았나요? 돌에 맞아 죽고 톱질을 당하고 칼에 맞아 죽기까지 하였나요? 그리고 가난과 고난과 학대를 감수했나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선물로 받는다는 확신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선물은 생명보다도 귀한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런 확신이 없다면 우리는 믿음을 지켜갈 수 없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려면 지식도 중요합니다. 기술도 필요하고 재물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아무리 가치 있다하더라도 그것은 불과 100데나리온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축복은 일만 달란트입니다. 이게 성서의 가르침입니다.

100데나리온이 1이라면 1만 달란트는 60만입니다.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이 세상에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지식을 얻기 위해, 명예를 얻기 위해, 돈을 얻기 위해 신앙을 포기합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신앙을 선택합니다.

저는 저번에 미국 여행을 하면서 이스라엘 사람들에 대하여 조금 배울 기회가 있었습니다. 왜 이들이 나라 없이 2천년을 헤매면서도 세계의 초고의 사람이 되었는지 알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교육입니다. 정말 이들을 교육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겁니다. 그런데 그 교육보다 더 우선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신앙입니다. 돈을 버는 것, 명예를 얻는 것, 교육도 중요하지만 신앙을 지키는 일이라면 이 모든 것을 아낌없이 포기합니다.

왜 이렇게 포기할까요? 하늘나라에 대한 확신 때문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주인을 맞이하는 종은 행복하다”라고 했습니다.

왜 주인을 맞이한 종이 행복할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늘나라를 선물로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늘나라를 받게 되면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37절 말씀입니다.

“곁에 와서 시중을 들어줄 것이다.”

이보다 더 분명한 말씀은 없습니다. 내가 하느님의 시중을 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나의 시중을 들어주십니다. 내 앞길을 열어주시고, 나의 상처를 싸매 주시고,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제1독서의 말씀을 보십시오. 아들이 없어 희망이 없던 아브라함에게 어떤 위로와 희망을 주셨나요.

“무서워하지 말라, 아브람아, 나는 방패가 되어 너를 지켜 주며, 매우 큰 상을 내리리라.”

이처럼 주님은 우리를 치유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고, 기쁨, 참된 자유 함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너희 아버지께서는 하늘나라를 너희에게 기꺼이 주시기로 하셨다”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재물을 잃으면 조금 잃은 것이요, 명예를 잃으면 많이 잃은 것이요, 건강을 잃으면 전부를 잃은 것이라고 하지만, 신앙인들은 아닙니다. 하느님을 잃으면 전부를 잃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선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분명해집니다.

주인을 맞이하는 사람입니다. 이게 선택에 있어서 핵심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주인이 언제 올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항상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맛없는 반찬이 나왔습니다. 반찬 투정을 해야할지, 아니면 감사하며 먹어야할지 결정해야합니다. 이 때 주님이 오실 수 있도록 준비해야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주인이 문을 두드릴 때 문을 열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우선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놓고 준비하는 사람이라야 합니다.

밤에 어둠을 밝히기 위해 등불을 밝혀야 하듯이 우리가 바른 선택을 하려면 밝고 맑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든지 그 선택은 우리의 마음에 무엇을 품고 있는 가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그런데 우리 조상들은 우리 마음을 어둡게 하는 세 가지가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바로 탐. 진. 치입니다. 이기적인 욕심과 분노와 어리석음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마음을 어둡게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것을 육체적인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육체적인 것에서 죽음이 온다고 했습니다. 불행과 싸움과 다툼이 다 여기에서 옵니다. 그러므로 이 육체적인 어두움을 영적인 불로 밝혀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믿음을 갖고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육체적인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고는 결코 하느님을 선택할 수 없습니다. 때문에 주님은 등불을 켜놓는 사람이라야 문을 열 수 있다고 하십니다.

여러분은 지금 등불을 켜놓고 있습니까? 그런데 기름이 떨어져서 꺼져 있는 것은 아닙니까? 신앙의 등은 있는데 기름이 떨어져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빛의 자녀이지만 빛의 자녀답게 살아 갈 수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어두워 지지 않도록 등불을 켜 두어야합니다. 그런데 이 영적인 불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준비되어야 합니다. 만들어야 합니다. 이런 성도가 슬기로운 종입니다. “주인이 돌아올 때까지 자기 책임을 다하고 있다가 주인을 맞이하는 종”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마음의 어둠을 밝힐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바로 말씀입니다.

시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복되어라, 야훼께서 주신 법을 낙으로 삼아 밤낮으로 그 법을 되새기는 사람, 그에게 안 될 일이 무엇이랴! 냇가에 심어진 나무 같아서 그 잎사귀가 시들지 아니하고 제 철 따라 열매 맺으리”

그렇습니다. 우리가 악을 꾸미는 자리에 머물지 아니하고, 죄인들의 길을 거닐지 아니하고, 조소하는 자들과 어울리지 아니하려면, 빛의 세계에 머물려면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말씀을 우리의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말씀과 기도로 날 단련시키지 않고는 주인을 맞이할 수 없습니다.

맹자의 어머니가 아들을 바르게 교육하기 위해 좋은 환경을 찾아 세 번이나 이사한 것처럼 신앙인은 말씀이 있는 곳을 찾아가야 합니다. 목이 타는 사슴처럼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왜 우리가 주일을 지켜야 하고, 말씀을 배우고, 주야로 묵상해야 합니까?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등불을 켜두지 않고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 선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뜻을 선택하지 못하고는 하느님의 나라를 선물로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등불을 꺼두는 어리석은 신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깨어 있다가 주인을 맞이하는 종”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깨어 있으란 말은 잠자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잠자지 않고 어떻게 살 수 있겠습니까? 자야할 때 자야지요. 그래야 내일을 준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깨어 있으란 말은 등불을 사용하기 위해 깨어 있으라는 말입니다. 등불을 켜놓고 잠자버리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등불은 쓰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도 뭔가 말하고 행동하며 살아갑니다. 이 때 나는 선택해야 합니다.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 그분에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지를 분간해야 합니다.

그런데 기껏 준비해 놓고는 잠자버리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지금 누군가가 나의 위로를 필요로 합니다.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쓰지 못하고 잠자 버린다면 지금 내가 갖고 있는 지식과 믿음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종은 울려야 하고, 악보는 불리어 질 때 비로소 빛이 나는 법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배운 것을 지금 쓰기를 원하십니다. 내가 가진 재물과 능력을 지금 쓰기를 원하십니다.

스펜스 존슨이란 사람이 쓴 “선물”이란 책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선물은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선물은 바로 현재의 순간이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선물은 바로 지금이다!”라고 말입니다. 따라서 매 순간을 소중히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주인을 맞이하여 문을 열어 줄 수는 있는 종은 언제나 지금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입니다. 내일 선하게 살아야지 하는 사람은 영원히 선하게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지금 선하게 살아야 합니다.

나누며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종처럼 자신을 낮추어 섬기는 모습이 얼마나 선해 보입니까? 그리고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 비추어 회개하며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모습이 얼마나 진실해 보입니까? 이 모든 삶은 과거의 삶도, 미래의 삶도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야 삶이 되야 합니다.

끝으로 예수를 닮아 가야 합니다.

소박한 삶을 살기 위해 교수직을 버리고 시골에 묻혀 살고자 했던 윤구병 교수님은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풀잎 끝에 맺힌 이슬이 가장 영롱하고 아름답다. 뒤돌아보지 않고 온몸을 던지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렇게 살고 싶어 산중에 들어온 것이다.”

산이 좋아 산에 사는 사람은 산의 모습을 닮으려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이 좋아 주님을 따르려 한다면 우리도 주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주님처럼 진실 하게, 아름답게, 선하게 살아가려고 하는 몸부림입니다. 이런 몸부림이 없이 어떻게 우리가 주님을 맞이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은 우리의 나약함을 아십니다. 부족함을 아십니다. 있는 그 모습 그대로 몸부림치십시오.

“나는 이 희망을 이미 이루었다는 것도 아니고 또 이미 완전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달음질칠 뿐입니다.”

바울로의 고백처럼 오실 주님을 맞이하기 위하여 깨어 몸부림치는 종처럼 되십시오. 슬기롭고 충성된 종이라 하실 것입니다.

자, 내가 받을 영광이 얼마나 놀랍고 큰지 확신을 가지십시오. 주님을 따르는 나에게 주님을 시중을 들어주십니다. 그러므로 등불을 들고 늘 깨어 있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주님은 이런 나에게 당신의 모든 영광을 주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기꺼이 주실 것입니다. 천지가 없어지는 한이 있어도 이 약속은 이루어집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