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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효율성]효율성만 남은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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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율성만 남은 나라

박태식 신부(성공회 장애인센터 ‘함께사는세상’ 원장)

예수의 제자들 중의 하나이며 후에 그분을 넘겨 줄 유다 이스가리옷이 말했다. “어찌하여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지 않았는가?”……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 장례 날을 위해 그것을 하도록 그 여자를 두시오. 사실 여러분은 주변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항상 만나게 되지만 나하고 언제까지나 함께 있는 것은 아닙니다.”(요한 12,4-8)

내가 강의 기계인가?

요즘 들어 강의를 하면서 좌절감을 느끼는 경우가 종종 있다. 몇 해 전인가 ‘고전 그리스어 문법과 강독’이라는 과목이 수강생이 불과 두 명 부족해 폐강됐다. 교양과정 수강생 15명 규정에 걸려 그리 된 것이다. 억울했지만 참았다. 시간강사 신세가 다 그렇기 때문이었다. 그저 교무처장이라는 사람이 경영학과 교수라 등록금 대비 학생 수로 냉정하게 개/폐강 인원을 정했으려니 하고 추측만 할 뿐이었다. 사실 필자는 성서학이 전공이라 일반대학에서 과목을 맡을 때면 가능한 한 학생들의 기대에 맞추려 노력하는 편이다. 신학 전공도 아닌 학생들에게 학문적인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다. 그런데도 15명에 못 미친 것이었다.

같은 학교에서 ‘신약성서개론’과 ‘구약성서개론’과 ‘종교와 예술’이라는 과목을 개설했었다. 반응이 좋은 편이어서 꾸준히 수강생 숫자가 평균 100명을 넘었고, 덕분에 최우수 강사라는 명목으로 몇 년간 포상금까지 받았다. 시간강사 주제에 총장님과 악수를 나누는 영광도 누렸고 말이다. 그런데 한두 명씩 수강생이 줄기 시작하더니 종국엔 이들 강의 역시 한심한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요즘도 가끔씩 찾아오는 졸업생이 “교수님 강의는 여전히 인기가 좋죠?”라고 물을 때면 그저 “자네 요즘도 술 좋아하나?”라며 얼버무릴 뿐이다.

언제부터 효율성이 우리 사회를 온통 지배하게 되었는가? 도대체 언제부터 우리가 모든 가치를 계량적으로 판단하게 되었는가? 예수님은 거기에 대해 무엇이라 말씀하셨는가?

아니 저 아까운 기름을

요한복음서는 흔히 ‘영적인 복음서’로 불린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가 “요한복음서는 ‘육적인 것들’에만 관심을 쏟는 초대 주석들(공관복음서)을 보충하여 ‘영적인 복음서’를 쓰는 것이 목적이었다.”고 한 까닭이다. 그런 별명에 걸맞게 실제로 요한복음서에는 알 듯 말듯 한 표현들이 많이 등장하고 심안心眼이 떠져야 깨달을 법한 내용이 심심찮게 나온다.

요한 12,1-8에 보면 잔치 자리에 등장한 마리아가 돌연 예수님의 발에 한 리트라의 나르드 향유를 붓고 머리카락으로 닦는 일이 벌어졌다. 이스라엘은 광야 성 기후인지라 외출했다 들어오면 반드시 먼지 묻은 발을 씻어야 한다. 나르드 향유는 전량 동방에서 들여왔기에 이스라엘에서 아주 귀했는데 좋은 향기와 더불어 피부병 치료에 효과가 있었다고 한다. 한 리트라는 327.45 그램으로 로마식으로 따져 한 파운드에 해당하며, 값으로는 약 삼백 데나리온이다.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 한 데나리온이었으니까(마태 20,2) 삼백 데나리온이면 거의 일 년 치 수입에 해당한다. 서민들은 만져볼 수조차 없는 정도의 액수에 해당했다.

유대인의 전통적 율법해석이 모음집인 <미드라쉼>에 보면 “좋은 기름(나르드: 성유)의 향기는 온 방안에 퍼진다. 그처럼 아름다운 이름도 온 세상에 퍼져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알려진다.”(코헬렛 7,1)라는 말이 나온다. 이는 큰 인물이 마치 기름 향기가 퍼지듯 명성을 세상에 날리리라는 뜻이다. 그리 보면 마리아의 기름부음은 예수님의 지고하심이 장차 온 세상에 널리 퍼지리라는 예고이자 그에 걸 맞는 존경심 가득한 봉사로 설명할 수 있다. 같은 맥락에서 머리카락을 사용해 예수님 발에 부은 기름을 닦은 행동도 이루어졌다. 그러나 마리아의 행동을 바라보는 유다의 눈길은 곱지 않았다. “어찌하여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지 않는가?”

유다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차갑기 짝이 없다. “내 장례 날을 위해 그것을 하도록 그 여자를 두시오. 사실 여러분은 주변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항상 만나게 되지만 나하고 언제까지나 함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지존함을 깨닫고 귀한 물건을 바쳤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행동을 막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죽음이 갖는 의미를 주변인들로 하여금 되새기게 만들었다. 비록 지금 나르드 기름을 팔아 돕는다 할지라도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나 남아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며칠 내로 죽음을 맞을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임박한 죽음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내 장례날을 위해”). 마리아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며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심오한 헌신의 방법으로 예수님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표현한다. 마리아의 행동은 믿음의 웅변적인 증거이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마리아의 행동에 주목하시오!

그대로 두시오

유다의 질문을 풀어나가는 예수님의 시각은 무척 재미나다. 인간은 종종 효율성이 모든 모순을 풀 수 있는 열쇠라고 생각한다. 주머니가 두둑해지면 만사 해결이라는 식이다. 그래서 취직에 도움이 되지 않는 강의는 들을 필요가 없고, 대학입시에 영향이 적은 체육, 음악, 미술은 아예 교과목에서 제외시키고, 경제만 살릴 수 있다면 모든 잘못을 눈감아 준다면서 나라의 지도자를 뽑기도 한다. 그리고 경제만 활성화시킬 수 있으면 강줄기를 바꿔도 괜찮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보통 가난하고 병든 사람이 단 한명도 없는 이상 사회를 꿈꾼다. 분배를 적절히 하고 복지국가를 설립하고, 더 나아가 평균소득을 3천불로 끌어올려주면 북한 문제마저 해결된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르다. 가난한 이들은 언제나 우리 주변에 있다는 것이다.

유다의 불평은 마리아의 행동과 극적인 대비를 이룬다. 마리아는 삼백 데나리온 어치의 값비싼 나르드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들어부었지만 유다는 향유를 팔아 가난한 이들 돕지 못한 게 못내 아쉬웠다. 사실 삼백 데나리온이면 예수님을 모시고 다녔던 제자들 처지에 어마어마한 돈이 아닐 수 없다. 유다는 빈자들을 돕자고 말하면서 내심 ‘저 정도 돈이면 우리도 이렇게 궁색하게 살 지 않을 텐데.’ 라는 회한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이야기를 통해 여성 제자 마리아가 예수님에 대한 존경심이라는 가치로 나르드 기름을 평가한 반면, 남성 제자이자 훗날 예수를 배반한 유다는 기름을 경제적인 가치로 평가했음이 극명하게 드러난 셈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효율성으로 평가될 수 없는 가치들이 있다. 사랑, 경외심, 자존심, 존중, 우정, 생명, 역사 등등. 이런 가치들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고 매매도 불가능하다. 임마누엘 칸트는 모든 인간은 다른 사물과 다르게 스스로 목적이 지닌 존재이니 존중되어 마땅하다고 정의 내렸다. 효율성을 기준으로 인간을 평가하는 경우 보편적인 가치들은 설 자리를 잃고 만다. 결국 인간과 사회와 세계가 심각한 위기 상황에 빠지게 될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하느님 앞에서 그리스도인이 내려야 할 실존적 결단의 요구이다. 사람은 자신의 존재 이유를 종종 자기 외부에서 찾으려 한다. 하지만 한 세상 그렇게 정신없이 쫓아다니다 보면 빈껍데기만 남기 마련이다. 예수님은 베다니아에서 자신을 완전히 포기하고 예수님에게 온전히 헌신하는 여인을 만났다. 여인의 행동을 보면서 예수님은 추종자들 중 그 누구에게서도 발견하지 못했던 참다운 믿음을 보았던 것이다. 그 여인이 자신의 일을 하도록 놓아두어야 한다(“내 장례 날을 위해 그것을 하도록 그 여자를 두시오.”).

효율성만 남아있는 나라

다시 강의 이야기로 돌아가겠다. 독일에서 공부할 때 ‘고대 지중해 종교’라는 과목이 개설되었던 적이 있었다. 학생은 나를 포함해 불과 세 명! 그러나 교수님은 한 학기 내내 최선을 다해 폭넓은 지식과 풍부한 경험을 제공했다. 그 때 습득한 가르침의 결과로 나 역시 한국에 돌아온 후 이제껏 강의를 하고 있다. 만일 독일 대학에서 효율성의 기준으로 그 강의를 평가했다면 당연히 ‘고대 지중해 종교’는 폐강되었을 테고, 나는 그 지식을 우리나라에서 전달할 기회를 놓쳤을 것이다. 적어도 내게 있어 효율성이란, 추구해야 할 가치가 아니다.

이런 상태로 앞으로 수 십 년이 지나고 난 후, 지중해 권에서 고고학적으로 귀중한 발견이라도 있으면 한국은 지역 전문가 한 사람도 찾을 수 없는 나라가 되고 말 것이다. 모두 ‘고전 그리스어 문법과 강독’을 폐강시키고, 그런 강의 들을 시간 있으면 부지런히 스펙이나 쌓으라고 학생들을 내몰았던 학교와 사회 탓이다. 이제라도 서둘러서 젊은이들에게 효율성으로 평가될 수 없는 가치들이 무엇인지 열심히 가르쳐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산다.

  1. 모든 사람은 그 사회의 문화생활에 자유롭게 참여하고 예술을 즐기며 과학의 진보와 그 혜택을 공유할 권리를 가진다.
  2. 모든 사람은 자신이 창작한 과학적, 문화적 또는 예술적 작품에서 생기는 정신적 및 물질적 이익을 보호받을 권리를 가진다.

(1948년 선포된 세계 인권 선언 27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