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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야 할 것, 취해야 할 것(연중 16주일, 최도미닉 신부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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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7. 21 (연중16주)/ 아모8:1-12, 골로1:21-28, 루가10:38-42

 

 

                                        버려야 할 것, 취해야 할 것

도종환 씨의 산문집을 보면 “나무보살, 물보살”이란 제목의 글이 있습니다.

시인은 나무를 보며 이렇게 찬양합니다. “애당초 흙이나 바람이나 물이나 햇빛에게 받은 게 있으니 받은 것 이상으로 되돌려준다고 하지만, 사람에게는 받은 게 없이도 제 몸을 내준다. 그저 끊임없이 주는 삶으로 일생을 살아간다. 이 어찌 보살이 아닌가. 나무의 삶이 보살행위요, 나무가 바로 보살이다”

이 글을 보니 정말 나무에게서 예수의 향기를 느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도 이 나무처럼 사심 없이 남에게 자신을 내어 준다면, 자신이 삶을 나눌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이 얼마나 아름다울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사실 남을 위해 봉사하고 헌신하는 것처럼 아름다운 삶은 없습니다. 그런데 때로는 이런 아름다운 행위들이 아름답지 못하고 악취가 될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상처가 될 때가 있음을 경험하게 됩니다. 저는 우리가 바치는 헌신과 봉사들이 아름다운 향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버려야할 것은 버리고, 취해야할 것은 취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가 헌신과 봉사가 아름답게 드러나기 위해 우리가 버려야할 것과 취해야할 것이 무엇인지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가 어느 날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시자 마르타는 시중드는 일에 분주했고,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서 주님의 말씀을 듣기에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마르다가 살짝 보니까 자기는 힘들여 일하고 있는데 마리아는 예수님님 발치에 앉아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마르다는 주님을 찾아가 마리아에게 자신의 일을 돕도록 타일러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마르다는 이렇게 부탁을 하면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야, 지금은 언니가 매우 바쁘니 언니를 도와주고 다음에 이야기를 하자” 이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뜻밖에 말씀을 하십니다.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에 다 마음을 쓰며 걱정지만 정말 필요한 것은 한가지뿐이다.”라고 하시고는 “마리아는 참 좋은 몫을 택했다. 그것을 빼앗지 말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렇다면 “마음을 쓰며 걱정하는 것”은 무엇이고, “참 좋은 몫, 빼앗기지 말아야할 것”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무엇보다도 주의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흔히 마르다처럼 시중드는 일은 나쁜 것, 마리아처럼 말씀을 듣는 행위는 좋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오늘 본문을 아주 잘못이해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의 일행이 방문한 곳을 마리아가 아닌 마르다의 집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는 마르다의 시중드는 행위가 얼마나 아름다운 행위인지를 전제하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마르다의 행위는 신앙의 열매와 같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주여, 주여 하는 자가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드리는 예배와 기도, 봉사와 헌신, 그리고 전도와 교회를 부흥시키는 이 모든 일이 다 마르다의 시중사역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가정에서 아버지로써 일하고 가정을 부양하는 것도, 가족의 건강을 위해 열심히 음식을 마드는 것도 다 마르다와 같은 사역입니다. 이처럼 마르다의 헌신이 없다면 마리아의 듣는 신앙도 죽은 믿음이 되고 맙니다.

그런데 41절 말씀입니다. 주님은 “그러나”라고 전제하고 있습니다.

시중을 드는 일이 중요합니다. 기독교인라면 누구나 주님을 위해 헌신과 봉사해야 합니다. 예배해야 합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성경도 열심히 읽어야 합니다. 교회를 부흥시키기 위해 자신을 투신해야합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충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 일을 하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우선은 주님이 지금 보시기에 지금 마르다의 행위에는 뭔가 버려야할 것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뭐가 문제인가요. 분주하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많은 일에 마음을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뭔가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다는 말입니다.

저는 요즘 고든 맥도날드가 쓴 “내면세계의 질서와 영적성장”이란 책을 보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 현대인들을 한마디로 “일 중독증”에 걸린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때문에 성공을 해도, 그리고 교회를 성장시키고 유명한 목사라고 존경을 받아도 늘 공허한 삶을 살아간다고 합니다.

저자는 바로 이런 사람을 “쫓겨 다니는 사람”이라고 표현합니다. 그 쫓겨 다니는 사람의 특징을 몇 가지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우선 오직 무엇인가를 성취했을 때만 만족감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격에는 별 관심이 없고, 대인 관계를 바르게 하는데도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직 자신의 목적과 목표만을 위해서 정신없이 산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시중을 들던 마르다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열심히 시중은 들지만 기쁨이 없습니다. 뭔가 불만에 가득 찬 모습이 아닌가요. 왜 그런가요. 오직 자신의 목적과 목표에 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시중을 들던 마르다는 마리아가 자신을 돕지 않고 예수님 발치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 화가 났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에게도 화가 나 있습니다. 예수님도 한심하시지. 지금은 마리아를 데리고 말씀을 할 때가 아니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때문에 마르다는 예수님을 향해 따지듯 말합니다.

“이것을 보시고도 가만 두십니까?”

가만 두지 않으면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마리아의 행실이 잘 못 되었으니 좀 혼 좀 내주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일을 거들도록 타일러 달라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마르다의 분주함이 보이십니까? 남에 대한 배려 없는 헌신, 나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헌신이 바로 분주함입니다. 때문에 일하면서 화가 나오고, 미움이 나오고, 오해가 나옵니다. 일을 통해 향기가 나오는게 아니라 악취가 나옵니다.

여러분, 이런 분주함은 모두가 공로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공로의 특징은 언제나 내가 중심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의 생각도, 마리아의 마음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직 내가 중요할 뿐입니다. 때문에 주님을 위해 시중을 드는 아름다운 행위를 하면서도 결국은 그 아름다움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일 만이 아닙니다. 나랏일도 그렇고 가정 일이 그렇고 모든 일이 다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마르다의 일이 중요하지요. 그런데 문제는 자신의 일만이 중요하다고 여기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때문에 자신의 일만 중요하고 마리아의 듣는 일을 별로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니까 예수님의 일마저도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마치 남편이 바깥일만 중요하고 아내의 일은 별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되면 부부간에 대화는 단절되고 관계가 냉랭하게 됩니다.

어떤 일을 하든지 그 중심에는 언제나 자신이 있습니다. 내 생각이 앞섭니다. 때문에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가 없습니다. 자신의 일로 남을 평가하고 판단합니다. 이렇게 되면 마르다처럼 불평과 불만을 쏟아놓게 되어 있습니다.

마르다는 마리아가 예수님의 말씀을 얼마나 듣기를 얼마나 갈망하고 있는지 마리아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지금 말씀을 전해야할 예수님의 사역이 얼마나 중요한지 예수님 입장에서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내가 하는 일이 제일 중요하고 남이 하는 일은 별 볼일 없는 일로 생각합니다. 때문에 내가 하는 일로 남을 판단합니다. 그래서 내 일에 협조하지 않은 다고 분노하고, 그것을 타이르지 않는다고 것 분노합니다.

어떻습니까? 결국 마르다는 어디까지 가나요. 예수님에게까지 불평합닙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힘을 빌어, 다시 말하면 신앙의 이름으로 마리아를 책망합니다. 바로 이런 것들을 버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행위들은 그 아름다운 봉사, 봉헌, 시중들기를 변질시켜 버리기 때문입니다.

마치 다 쑨 죽에 코 빠뜨리는 격입니다. 이런 이기적인 마음과 욕심은 마르다의 아름다운 시중들기를 변질시켜 버립니다.

때문에 주님은 이런 마르다에게 “마리아는 참 좋은 몫을 택했다. 그것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하겠다는 분주함을 내려놓으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 분주함, 우리가 버려야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버려서는 안 될 좋은 몫”이 있다고 하십다.

여러분은 마리아의 모습에서 우리가 선택해야할 좋은 몫이 보이십니까? 마리아가 선택한 좋은 몫이란 무엇일까요? 우선 마리아의 모습을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 앉아서 예수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마르다, 너의 시중드는 일, 참으로 아름다운 행위야. 그리고 나는 너의 시중을 정말 기뻐한단다. 그런데 너에게 부족한 게 딱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은 마리아가 지금 내 발치에 앉아서 나의 말을 듣고 있는 바로 이 모습. 네가 이 모습을 간직한다면 너는 참으로 내 제자가 될 수 있다.”

그렇습니다. 정말 필요한 것 한 가지, 발치에서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시중드는 행위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발치에 머무는 마음이 없다면 우리의 헌신이, 우리의 봉사는 결코 아름다운 향기가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마리아는 왜 예수님의 발치에 앉았을까요?

발치는 주님께 다가갈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곳입니다. 멀리 있을 때에는 희미하게 보이지만 가까이 가면 또렷이 볼 수 있습니다. 이곳에 서면 예수님의 얼굴, 숨소리, 표정까지 분명하게 보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내 분주함을 내려놓고, 내 생각과 판단을 내려놓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왜 문제가 생깁니까? 주님의 뜻과 멀리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 일을 할 때 주님과 멀리 떨어져 있을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사실 무슨 일을 할 때 그 일이 주님의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내 생각, 내 욕심에서 나온 것일 때가 많습니다.

때문에 바울로는 이런 세상 풍조를 버리고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마음에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뜻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정신이 바로 서야 합니다. 뜻이 바로 서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서지 않고는 우리의 신앙도 봉사도 예배도, 기도도 교회의 성장도 선교도 다 여기에서 허물어지고 말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성경을 보고 기도도 합니다. 그런데 말씀을 듣지 못합니다. 아모스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야훼의 말씀을 들을 수 없어 굶주렸다”라고 합니다. 늘상 듣는 말씀이 아닙니까? 그런데 왜 듣지 않는다고 하는 걸까요? 뜻을 새기며 듣지 않습니다. 주님의 음성보다는 나에게 필요한 말만 들으려 합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그렇습니다. 발치에 머물러야 합니다. 이것만은 결코 잃어버려서는 안 될 시간입니다. “사람이 일하면 사람이 일할 뿐이지만, 사람이 기도하면 하느님이 일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분주함을 내려놓고 주님의 발치에서서 그분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또 하나 눈에 들어옵니다. 발치에 앉아 있는 모습에서 겸손과 순종의 모습을 봅니다.

우리가 수많은 일을 하지만 대개 여기에서 허물어집니다. 아마 예수님은 의자에 앉으셨거나 아니면 서서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발치에 앉았다는 것은 땅바닥에 앉았다는 말입니다. 땅바닥에 앉지 않고는 발치에 앉을 수가 없습니다. 이 말은 자기의 모습을 낮추었다는 말이요, 그 말씀 앞에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를 버렸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서 배우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말씀하신 온유하고 겸손하신 멍에란 무엇일까요? 바로 십자가입니다. 주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신을 버리고 자신의 십자가 메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발치에서 듣는 마음, 곧 나의 십자가를 지고 듣는 자세입니다. 나를 주는 자세입니다. 남이 아니라 내가 죽는 마음입니다.

내가 뭔가 해야 하겠다고 했을 때, 내 생각이 아니라 남의 소리를 들어보십시오. 발치에 앉아보면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고, 들리지 않던 음성이 들려옵니다. 때문에 마리아는 마르다처럼 “주님, 언니에게 시중드는 일을 멈추고 여기서 주님의 말씀을 들으라고 타일러 주세요!”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발치에 앉는 마음, 우리가 꼭 간직해야할 마음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하든지 나를 버리고 주님의 발치에 앉아 보십시오. 그리고 난후에 사도 바울의 말씀처럼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으로 채워 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시중이 얼마나 아름답게 빛날까요?

 

여러분 마리아와 마르다가 한 자매인 것을 기억하십시오. 이처럼 신앙에 있어서도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던 마리아의 신앙과 예수님을 위해 시중을 들었던 마르다의 신앙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가 될 때 비로소 우리의 모든 헌신은 아름다운 향기가 됩니다. 가정에서도, 교회에서도, 우리가 얼굴을 맛대로 살아가는 이웃 속에서도 그렇게 해야합니다.

이제 우리가 버려야할 것이 무엇인지, 지켜야할 것이 무엇인지 분별했다면 주님을 위해 시중을 드십시오. 그 시중들기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어 온 세상에 퍼져 나갈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