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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다니아의 도유(塗油)사화 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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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다니아의 도유(塗油)사화 풀이

박태식 신부(성공회 장애인센터 ‘함께사는세상’ 원장)

요한 12,1-11: 과월절 엿새 전에 예수님은 베다니아로 가셨다. 그곳에는 예수님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살리신 라자로가 있었다. 거기에서 예수님을 위해 잔치를 베풀었는데 마르타는 시중을 들었고 라자로는 예수님과 함께 음식상을 받고 있던 사람들 가운데 끼여 있었다. 마리아는 값진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발에 바르고 자기 머리털로 그 발을 닦아 드렸다. 그러자 그 집은 향유의 향기로 가득 찼다. 이 때 예수님의 제자들 중의 하나이며 후에 그분을 넘겨 줄 유다 이스가리옷이 말했다. “어찌하여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지 않았는가?”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사람들을 염려해서가 아니라 그는 도둑이어서 돈주머니를 맡아 가지고 있으면서 거기에 집어넣었던 돈을 가로채곤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 장례날을 위해 그것을 하도록 그 여자를 두시오. 사실 여러분은 주변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항상 만나게 되지만 나하고 언제까지나 함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께서 거기에 계시다는 것을 알고 유대인들의 많은 군중이 몰려왔다. 그것은 단지 예수 때문이 아니라 그분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살리신 라자로도 보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대제관들은 라자로도 죽이기로 결의하였다. 그 사람으로 말미암아 많은 유대인들이 그들에게서 떠나 예수를 믿었기 때문이다.

본문 분석

1절: 과월절 엿새 전에 예수님은 베다니아로 가셨다. 그곳에는 예수님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살리신 라자로가 있었다. 2절: 거기에서 예수님을 위해 잔치를 베풀었는데 마르타는 시중을 들었고 라자로는 예수님과 함께 음식상을 받고 있던 사람들 가운데 끼여 있었다.

1절은 ‘베다니아의 도유사화’를 여는 도입문으로, 장소와 시간에 대한 언급이 나오고 앞뒤 상황을 연결시키는 구실을 한다. 과월절(유월절, 해방절) 엿새 전은 예수님의 공생애 마지막 한주일이 시작되는 시점을 가리킨다. 요한 19,14에 보면 예수님이 처형된 날이 과월절 전날이니까 유대인의 달력으로 니산월 14일이 된다. 따라서 과월절 엿새 전은 니산월 9일이고 오늘날의 주간 개념으로는 일요일, 곧 종려주일에 해당한다. 여기서 독자들은 의문이 생길텐데 9일에서 14일까지는 닷새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대인의 날짜 계산법에 따르면 셈이 시작되는 날도 포함된다. 쉬운 예로 예수님이 사흘만에 부활했다고 하는데 이는 금요일에서 일요일까지의 기간이다. 금.토.일, 사흘이라는 뜻이다.

복음서작가들이 예수 전승을 물려받을 때 그 전승에 시간과 장소에 대한 언급이 없는 일이 허다했다. 입에서 입으로 이야기를 전하기도 바쁜 마당에 정확한 장소와 시간에 대한 정보까지 전승에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을 테니 말이다. 그래서 흔히 장소와 시간에 대한 언급은 복음서작가의 창작물로 여기는데, ‘베다니아의 도유사화’는 예외이다. 왜냐하면 바로 앞인 요한 11,54절에서 예수님이 살해 음모를 피해 에브라임으로 갔다고 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예수님이 다시 베다니아에서 공개적인 자리(잔치)에 그 모습을 드러낸 셈이 되기 때문이다(9-11절 잠조). 따라서 베다니아는 원래 전승에 포함되어 있었던 정보로 보인다. 하지만 베다니아가 예수님이 죽음에서 살려낸 나자로의 고을이라는 1b절의 내용은 2절부터 뒤따르는 보도를 감안해 복음서작가 요한이 만들어 넣은 것이다.

1-2절은 도유사화 전체의 성격을 규명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요한은 시간 정보를 제공할 때 항상 무엇인가를 암시하려 애쓴다. 이를테면 가나의 혼인잔치를 “이런 일이 있은 지 사흘만에 일어난”(2,1) 사건으로 하여, 잔치 집에서 물이 포도주로 변한 기적이 실은 예수의 부활을 암시하는 표징(세메이온: 2,11)이 된다는 사실은 넌지시 알려준다는 식이다. “과월절 엿새 전”이라는 시간 정보는 ‘수난주간’의 시작을 가리키며, 이는 예수의 수난이 ‘도유사화’로부터 시작된다는 요한 고유의 해석을 보여주는 실례가 된다. 또한 나자로와 마르타를 등장시켜 독자들로 하여금 11장의 소생기적사화를 연상시키게 함으로써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동시에 암시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모두 예수의 수난이 갖는 의미를 부각시키려는 복음서작가 요한의 치밀한 편집작업으로 여겨진다.

2절을 해석할 때 어려운 것은 잔치의 제공자가 누구인가? 하는 점이다. 요한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는 공생애 기간에 최소한 세 차례 예루살렘을 방문했다(2,13;5,1;7,10). 베다니아는 예루살렘에서 약 3km 떨어진 곳에 있는 고을로 예수님이 상경 길에 즐겨 거쳐가는 곳이었다(요한 11장;마가 11,1). 그곳에 살았던 라자로와 마리아, 마르타 삼남매가 예수 일행에게 편의(숙소, 식사)를 제공했으니(루가 10,38-42) 당연히 잔치 제공자도 나자로였으리라는 주장이 가능하다. 그러나 라자로가 예수와 함께 식사자리에 끼어 있었다는 언급을 미루어 볼 때 제 삼의 인물이 잔치 제공자였다는 추측도 할 수 있다. 실제로 병행문이 마가 14,1에 보면 나병환자 시몬이 집주인으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2절도 요한이 만들어 넣은 구절로 볼 수 있으며 ‘도유사화’를 11장과의 연장선상에 놓아 라자로와 마르타를 등장시켰을 법하다. (이 문제는 글의 후반부에서 다시 다루겠다).

요한은 ‘도유사화’를 자신의 복음서에 옮기면서 전승의 자리 매김을 해 주었다(1-2절). 그는 도유사화에서 가능한 한 많은 뜻을 읽어내려 했고 그에 대한 암시를 1-2절에 포함시켰다. 1-2절에서 찾을 수 있는 전승 요소로는 ‘베다니아’라는 장소이름 정도이다.

3절: 마리아는 값진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발에 바르고 자기 머리털로 그 발을 닦아 드렸다. 그러자 그 집은 향유의 향기로 가득 찼다.

나르드 기름은 예수님 시대의 이스라엘서 매우 귀한 것이었다. 나르드 기름은 모두 동방에서 수입된 것으로 좋은 향기와 치료의 효과가 있었다고 한다. 함부로 쏟아 부을 만한 물건이 못된다는 말이다. 한 리트라는 한 로마 파운드로 우리 식으로 계산하면 327.45 그램에 해당한다. 당시로서는 보통사람이 만져볼 수 없는 정도의 양이었다. 마리아가 잔치 자리에 나타나 그 비싼 기름을 부은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예수님에게 오빠를 살려준 데 대한 보답으로 그리했을 수 있다. 그렇다면 동기간이 라자로의 시신이 썩던 냄새(11,39)를 나르드 향으로  무마시킨 것이 된다. 기름부음이 예수님이 자신의 동기를 살려준 데 대한 감사의 표시라는 해석이다. 하지만 3b절에서 나르드 기름 향기가 온 집에 퍼졌다는 언급에서 무엇인가 다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는 인상을 풍긴다. 다른 해석으로 마리아의 기름부음이 예수님의 메시아 임명식을 뜻할 수도 있다. 하지만 메시아로 임명을 받을 때는 기름을 머리에 붓는다는 점을 고려할 때(삼상 16,13), 발에 기름을 부었다는 것은 메시아 임명식에 맞지 않는다. 두 가지 해석 모두 상황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못된다.

유대인의 전통적인 율법해석을 모은 ‘미드라쉬’라는 책에 보면 “좋은 기름(나르드:성유)의 향기는 온 방안에 퍼진다. 그러나 좋은 이름은 온 세상에 퍼져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알려진다.“(Koh 7,1)라는 말이 나온다. 이는 사람의 좋은 이름이 마치 기름의 좋은 향기가 널리 퍼지듯이 널리 알려진다는 은유이다. 그렇게 보면 3b절은 예수님의 지고하심이 장차 온 세상에 퍼질 것이라는 뜻이 되고 따라서 마리아의 기름부음은 예수님의 지고하심에 대한 존경심 가득한 봉사로 볼 수 있다. 자신의 머리카락을 사용해 예수님 발에 부은 기름을 닦은 행동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스라엘은 광야성 기후인지라 외출했다가 들어오면 반드시 발을 씻어야 하는데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음으로써 (종으로서) 봉사의 자세를 보여준 바 있다(13,1-20). 마리아가 최고의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머리카락으로 발을 닦았다는 사실은 베다니아의 잔치 자리에서 대단히 예외적인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마리아의 행동을 바라보는 주위의 눈길을 곱지 않았다.

4절: 이 때 예수님의 제자들 중의 하나이며 후에 그분을 넘겨 줄 유다 이스가리옷이 말했다. 5절: “어찌하여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지 않았는가?” 6절: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사람들을 염려해서가 아니라 그는 도둑이어서 돈주머니를 맡아 가지고 있으면서 거기에 집어넣었던 돈을 가로채곤 했기 때문이다.

4-6절은 기름부음에 대한 유다의 반응에 집중되어 있다. 우선 유다는 마리아와 극적인 대비를 이룬다. 마리아는 삼백 데나리온 어치의 나르드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들이부었지만 유다는 향유를 팔아 가난한 이들 돕지 못하는 것을 아쉬워한다. 마리아가 나르드 기름을 에수님에 대한 존경심이라는 가치로 평가한 반면 유다는 기름을 세상적인 가치로 평가했다.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 한 데나리온이었으니까(마태 20,2) 삼백 데나리온이면 거의 일년 치 수입에 해당한다. 당시의 경제상황이나 예수님을 모시고 다녀야 하는 제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어마어마한 돈이 아닐 수 없다. 유다가 그 돈을 가난한 자들을 위해 사용하자고 말한 것이다.

특별히 유다를 거론한 것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명이 가능하다. 우선 ‘유다 이스가리옷’이라는 호칭이 요한 식의 어법이 아니라는 견해가 있다. 요한이 즐겨 쓰는 어법은 ‘시몬 이스가리옷의 아들 유다’(6,71;13,2.26)이며 ‘유다 이스가리옷’은 오히려 공관복음 식의 호칭을 연상시킨다(마태 10,4;마가 14,13;누가 22,3). 따라서 이 이름을 전승에서 물려받았다는 견해가 성립될 수 있다. 그러나 요한 14,22에 보면 유다가 아버지 시몬 없이 직접 이스가리옷과 연결되는 경우도 있기에 확실한 견해는 되지 못한다.

다음 견해는 유다 이스가리옷이 복음서작가 요한이 만들어 넣었다는 것이다. 요한복음의 도유사화와 비슷한 내용을 담은 병행문들을 살펴보면 마가 14,4에서는 ‘어떤 이들’이, 그리고 마태 26,8에서는 ‘제자들’로 되어 있다. 따라서 원래 전승에서는 익명이었던 사람을 요한복음서 작가가 유다로 딱 집어내는 편집작업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 이유는 6절에서 밝혀진다. 유다는 가난한 이를 위했던 것이 아니라 원래 돈 욕심이 많았던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겉으로는 비록 가난한 사람을 위하는 척 했지만 실은 돈을 뒤로 빼돌리려는 흑심을 품고 있었고 이는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한 이유와도 잘 맞아떨어진다(13,29).

사실 유다가 돈 욕심 때문에 예수님을 배신했다는 말은 당시 그리스도인들에게 널리 퍼져있었다(마태 16,15;27,3-10;마가 14,10-11;누가 22,3-6). 그렇게 보면 6절은 요한이 4-5절에 나오는 유다의 발언을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 넣은 구절로 보는 게 마땅하다. 왜냐하면 ‘가난한 이를 돕자’는 말 자체로는 그리스도교의 정신과 하등 차이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유다가 예수님 일행의 회계였다는 보도는 요한복음에만 나오는데(13,29), 역사적으로 사실이었는지 확인할 길이 없다. 유다의 배신을 추측하는 과정에서 유다가 회계였다는 말이 전설처럼 떠돌았을 가능성이 있다.

7절: 그러니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 장례날을 위해 그것을 하도록 그 여자를 두시오. 8절: 사실 여러분은 주변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항상 만나게 되지만 나하고 언제까지나 함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유다의 말을 받아 예수님은 여인의 행동을 방해하지 말라는 말씀을 한다. 7절에서 문제가 되는 곳은 ‘그것을 하도록’인데 헬라어로 보면 접속사 ‘히나’가 이끄는 목적절 ‘히나 ~ 테레세 아우토’이다. ‘테레세’는 지키다, 관찰하다의 뜻을 가진 ‘테레오’의 가정법이고 ‘아우토’는 ‘그것을’이라는 뜻의 인칭대명사이다. 최소한 세 가지 해석이 다양하다.

① 만일 장례날에 쓰도록 지켜두라는 뜻이라면 그것은 예수님에게 붓고 난 나머지 나르드 기름이 될 테고 남겨진 기름은 예수님의 장례를 위해 쓰여지게 된다(불트만, 뷔켄하우저). 공관복음에 보면 여인들이 예수님이 죽은 지 사흘째 되는 날 새벽에 향료를 준비해 무덤으로 향하는데 이는 풍습에 따른 것이다(마가 16,1). 죽은 지 사흘이 되면 시신에서 썩는 냄새가 나기 시작하고 그 냄새를 없애기 위해 시신에 향료를 바르는 풍습이 이스라엘에 있었다. 하지만 요한 19,39-40에 보면 니고데모가 몰약에 침향을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져와 예수님의 시신을 모셔다가 염을 했다니 구태여 마리아가 나르드 기름을 남겨둘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② 만일 마리아가 하는 일(아우토)을 그대로 지키게 하라는 뜻이라면 이는 마리아가 예수님의 죽음을 예견하고 자신의 가장 귀한 것을 바치는 행위를 칭찬하는 말이 된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지극히 존경하고 따랐기에 그 큰돈에 해당하는 나르드 기름 한 리트라를 바칠 수 있었다. 이는 겉으로는 비록 나르드 기름이지만 사실 마리아의 전 존재를 예수님에게 바친 셈이다. ①의 견해가 예수님의 장례에 중점을 둔 것이라면 이 견해는 마리아의 정성을 강조한 것이다(호스킨스, 헨헨). 그러나 “내 장례날을 위해”라는 바로 앞의 전치사구는 7절이 온전히 마리아의 사랑을 강조한 말씀이라는 견해에 장애물이 된다.

③ 마리아가 예수님의 지고함을 깨닫고 자신이 가진 가장 귀한 것을 바쳤다. 그럼으로써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그 행동이 갖는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다. 즉, 마리아의 행동을 막지 않음으로써 예수님의 죽음이 갖는 의미를 되새기에 만들었다는 뜻이다(슈나켄부르크). 이 견해는 특히 8절을 연두에 둔 것으로 예수의 임박한 수난을 예고한다는 측면을 강조한 것이다. 비록 지금 나르드 기름을 팔아 도와도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나 남아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며칠 내로 죽음을 맞게 된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마리아의 행동에 주목하라!

8절은 ‘도유사화’의 결론으로 신학적인 반성이 십분 들어가 있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임박한 죽음을 확실히 알고 있었다. 마리아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심오한 헌신의 방법으로 예수님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표현했다. 마리아의 행동은 극적인 믿음의 증거이다. 물론 여기서 가난한 이들에게 베푸는 자선과 예수님에 대한 헌신을 비교해서 자선보다는 헌신이 낫다는 식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 장례준비 역시 자비로운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예레미아스). 7-8절은 병행문인 마가 14,7-8과 비교할 때 어휘적인 공통점이 상당히 눈에 띄는 것으로 보아 요한이 전승으로 물려받는 내용이다.

예수님은 바야흐로 죽음을 행한 수난의 길에 들어서고 마리아의 기름부음은 그 시작을 알려주는 표징이다.

9절: 예수께서 거기에 계시다는 것을 알고 유대인들의 많은 군중이 몰려왔다. 그것은 단지 예수 때문이 아니라 그분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살리신 라자로도 보기 위함이었다. 10절:  그래서 대제관들은 라자로도 죽이기로 결의하였다. 11절: 그 사람으로 말미암아 많은 유대인들이 그들에게서 떠나 예수를 믿었기 때문이다.

9-11절은 나자로의 기적(11장)과 ‘도유사화’에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장면(12,12-19)을 연결하기 위해 요한이 만들어 넣은 구절이다. 요한의 편집으로 볼 수 있는 이유로 우선 요한이 즐겨 사용하는 어휘들이 많이 등장하고,  ‘예수님의 인기->살해모의’와 ‘기적과 믿음의 관계’가 요한복음에서 여러 번 반복되는 모티브들이며(11,53;20,24-29 등), 라자로의 운명을 보여줌으로써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암시하려는 복음서작가의 의도가 충분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과월절을 엿새 앞둔 시점에서 잔치가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여기에 등장하는 군중(오클로스)은 축제를 맞아 예루살렘에 순례차 온 이들이며 그 군중은 12,17-18에 다시 등장한다. 군중이 라자로의 기적에 대한 증인 역할을 하고 그 일을 계기로 예수님을 믿게되었다는 사실은 요한이 오클로스라는 단어를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요한 7,31;11,42;1217-18 등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