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말씀과 신앙나눔 벽을 허무는 영적 예배가 되게 하라(사순 3주일, 최도미닉 신부 말씀)

벽을 허무는 영적 예배가 되게 하라(사순 3주일, 최도미닉 신부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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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 3주일)/ 출애17:1-7, 로마5:1-11, 요한5:5-42

벽을 허무는 영적 예배가 되게하라

 

한 시인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진정한 만남은 상호간의 눈뜸이다.”

 

상호간에 서로를 소중한 사람으로 여기며 살아가는 길, 참된 신앙의 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가 배운 사람이건, 배우지 못한 사람이건, 가진 사람이건 갖지 못한 사람이건 서로가 서로에게 소중한 사람들임을 눈뜨는 일, 참 믿음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은 상호간에 막혀있는 담을 헐고 서로 소통하는 관계로 가는 길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사마리아 지역을 여행하실 때의 일입니다. 주님은 사막을 걸어오셨기 때문에 타는 갈증으로 몹시 물을 마시고 싶으셨습니다. 그런데 마침 우물이 하나 보이는 것입니다. 이제는 물을 마실 수 있겠구나 생각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막상 우물에 도착해 보니 우물은 너무 깊었고 물을 길어 올릴 수 있는 두레박도 없어 마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한 여인이 물을 길러 우물을 향해 오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런데 선뜻 물을 내어주기 보다는 “유다인 남자가 어찌하여 사마리아인이고 더군다나 여자인 자신에게 물을 달라”고 하느냐? 고 반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레박만 내리면 얼마든지 물을 줄 수 있었을 텐데 여인은 그렇게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 이 유는 두 사람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벽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종교적인 벽, 지역적인 벽, 성(姓)적인 벽들이 두 사람 사이를 이웃이 아닌 타인으로 만들어놓은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이 두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벽은 물을 마시지 못해 느끼는 갈증보다 더 심각한 갈증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예수님은 그토록 목이 마르셨지만 이 여인으로부터 물을 얻어 마셨다는 말씀이 없습니다. 다만 이 여인이 갖고 있는 마음의 벽을 허무셨을 뿐입니다.

 

우리도 이랬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사회 안에 놓인 벽을 허물었으면 좋겠습니다. 종교 때문에, 신분 때문에, 이념 때문에, 지역 때문에, 학벌 때문에, 성 때문에 생기는 갈등을 허물고 모두가 서로 하나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모두가 서로 이웃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가정도, 우리의 이웃도 서로가 서로를 이해해 주고, 보듬고 감싸 줄 수 있는 관계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은 이 시대를 두고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 사회는 지금 모두가 자기를 내세우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고, 결국은 서로가 서로를 불행하게 만드는 그런 지경에 이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람을 존경할 줄 아는, 구체적으로 이웃의 생명을 존중할 줄 아는 정신이 정말 필요합니다.”

 

정말 정확한 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편견과 이기적인 마음을 내려놓고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관계를 만들어가는 것, 진정한 신앙의 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여인과 예수님 사이에 있었던 장벽이 허물어졌을까요? 저는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안에 있는 이런 장벽을 허물고 서로 하나가 되는 길, 서로가 행복할 수 있는 길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우선 뜻을 바로 세워야 합니다.

뜻이 바르지 못하면 그 어떤 길도 바르게 갈 수 없습니다. 신앙이란 뜻을 바로 세우는 일에서 시작합니다. 그래서 종교, 가르침 중의 가르침, 배움 중의 배움입니다. 주님은 뜻을 세울 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에 뜻을 두지 말고 하느님께 뜻을 세우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주님은 물을 내어주지 못하는 여인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이 무엇인지, 또 너에게 물을 청하는 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오히려 네가 나에게 청했을 것이다.”(요한4:10)

이 말씀은 뜻을 바로 세우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이 주시고 싶어 하는 선물이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이게 뜻입니다.

 

하느님의 선물, 한마디로 말하라면 그것은 하느님의 나라요, 그것은 평화입니다. 평화는 축복이고, 기쁨이고, 자유이고, 생명입니다. 그런데 그 평화는 나눔과 섬김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의 목표는 가짐이 아니라 나눔을, 누림이 아니라 섬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가짐과 누림이 세상풍조라면 나눔과 섬김은 아버지의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을 청해야 하는지 그 길을 잃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사람들을 평화를 얻기 보다는 남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지려하고, 남보다 더 높은 곳을 추구하면서 서로 높은 담을 쌓고 갈등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한 수도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크게 버리는 사람만이 크게 얻을 수 있다. .. 우리가 걱정해야할 것은 늙음이 아니라 녹스는 삶이며, 인간의 목표는 풍부하게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풍성하게 존재하는 것이야 한다.”

참으로 많은 깨달음을 주는 말씀입니다. 우리도 이런 목표를 정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를 녹슬게 하는 삶을 버리기 위해 기꺼이 욕심을 십자가에 죽일 수 있는 그런 목표를 정했으면 좋겠습니다. 때문에 주님은 나를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를 아는 것, 내 인생의 목표가 되야합니다.

그런데 예수를 알려면 예배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예배는 신앙의 핵심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예배하는 사람을 찾고 계신다.”라고 하셨습니다. 예배 없이는 예수님을 알 길이 없습니다. 저는 여러분 모두가 예배하는 성도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살기 위해 배워야 하고, 일해야 합니다. 그리고 때로는 구제도 하고 선행도 해야합니다. 다 중요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예배입니다. 예배는 예수를 아는 샘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원하시는 예배는 “영적으로 참되게 드리는 예배”입니다. 개역성경은 이 부분은 “신령과 진정”이라고 했습니다. 온 마음으로, 그리고 정성을 다해 드려야 합니다.

 

여인은 주님께 묻습니다. “우리 조상은 저 산에서 하느님께 예배를 드렸는데 선생님들은 예배드릴 곳은 예루살렘에 있다고 합니다.”라고 묻습니다. 이것은 그 당시 사람들이 갖고 있는 보편적인 생각입니다. 사실 지금도 이런 식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예배의 본질이 뭘까요? 대형교회에 가면 은혜가 될까요? 성가대가 있고, 오케스트라가 있는 곳에서 예배를 드리면 은혜가 될까요? 우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개신교나 천주교 예배가 아니라 성공회 예배에 참석해야 더 은혜가 충만하다고 말합니다. 과연 그런가요? 아닙니다. 어느 교회, 어떤 성당에 참석하느냐? 가 아닙니다. 어떤 설교를 듣느냐가 아닙니다. 예배의 본질은 하느님의 마음을 느끼고 경험하는 것입니다. 말씀 속에서 그리고 성사 안에서 예수님의 마음을 체험하고, 나도 그 삶을 살아야지 하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다 인들도, 이 사마리아 여인도 그릇되게 예배해 온 것입니다. 하느님을 향한 예배가 아니라 자신의 영역을 자랑하는 예배, 자기를 과시하는 예배가 되어 버렸습니다. 저는 오늘 이 시대의 예배가 여기에 빠져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인은 예배를 통해 하느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예배를 통해 하느님 사랑으로 서로 화해하고 일치를 이룬 것이 아니라 예배를 드리면서도 여전히 서로 미워하고 증오하였습니다.

 

지금 여인이 주님께 물을 떠주지 못했던 것은 잘못된 예배요, 잘못된 신앙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때문에 주님은 예배의 방식을 새롭게 제시해 주십니다. 그것은 바로 영적으로 참되게 예배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말씀하시는 영적예배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느님과 인격적인 만남이 이루어지는 예배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거룩한 성체와 보혈을 먹고 마십니다. 그것으로 끝난다면 여인이 드린 예배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것은 영적이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영적인 예배인가요? 성체와 보혈을 영하면서 그리스도의 마음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이 예배를 통해 예수님의 마음을 느끼고 계십니까? 사도 바울로는 예수 마음을 우리의 마음으로 간직하라고 했습니다. 만약에 이 예배를 통해 예수님의 마음이 느껴지셨다면? 그래서 나도 주님처럼 살아야지 하는 마음이 드셨다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1서 4장 15절 말씀을 보면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있으며 하느님께서는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그 사랑을 느끼는 사람, 영적 예배를 드리고 있는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우리가 천사의 말을 하고, 온갖 신비를 꿰뚫어 보고 지식을 가졌고,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을 가졌고 내 재산을 다 나누어주고 남을 위하여 불속을 뛰어드는 희생을 했다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했습니다. 사랑이 없는 천사의 말, 사랑이 없는 믿음, 사랑이 없는 헌신 모두가 야곱의 우물입니다. 이런 믿음은 벽을 허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벽을 만들게 합니다.

 

그렇습니다. 여인은 하느님을 믿고 있었습니다. 예배도 드렸고 기도도 할 줄 아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인은 사막을 가로질러온 나그네에게 물 한 방울 건네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과 인격적인 교제가 없는 신앙생활을 해왔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주님은 여인에게 말합니다. “너희는 무엇인지도 모르고 예배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예배드리는 분을 잘 알고 있다.”(4:22)

 

입으로만 주여! 주여! 예배가 아니라 하느님의 마음을 느끼는 예배, 그래서 그 예수가 내 마음 안에 살아 있는 예배가 되야합니다.

 

이제 우리 안에 있는 벽을 허물기 위해 마지막 남은 과제가 있습니다. 예수님 마음으로 남이 아니라 나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남의 눈에 있는 티가 아니라 내 눈에 있는 들보를 보라고 하십니다. 그래야 맑은 마음, 맑은 눈으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여인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물은 두레박으로 퍼 올릴 수 있는 그런 물이 아니었습니다. 이 물은 밖에서 떠 올리는 그런 물이 아니라 내 안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 14절 말씀입니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샘물처럼 솟아올라 영원히 살게 할 것이다.”

이 물은 다른 곳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내 안에서 나옵니다. 예수 마음이, 예수님의 인격이, 예수님의 말씀이 내 안에 들어오면 내 안에서 그 물이 흘러나옵니다.

 

지금까지는 우리는 행복의 조건은 밖에서 찾았습니다. 남보다 더 많은 것을 가져야, 남보다 다 높아져야 행복해 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행복의 조건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었습니다. 내 안에 예수 마음을 품을 수 있다면 어떤 조건에서도 깨지지 않는 축복의 샘물이 내 안에서 흘러나온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때문에 여인은 더 이상 두레박이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이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마셨지만 이제는 필요 없게 된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주님께서 내 마음에 성령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한 때는 여인 이란 것 때문에, 사마리아인 이란 것 때문에 미워하기도 하고, 상처도 받았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얼마 전 어머니께서 작은 선물을 하나 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네 생각이 나서 샀다.” 참은 좋은 말입니다. 당장 따라서 해 보고 싶은 말입니다. 당신 생각이 나서 꽃 한 송이 샀소. 당신 생각이 나서 빵집에 들러 빵 몇 개 샀소. 당신이 생각나서 기도했소.

 

이제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남이 해주기를 기다리지 않습니다. 내가 먼저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사이에 막혀 있던 담을 헐고 주님의 사랑을 함께 나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행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랬으면 좋겠습니다.

“이 우물물을 우리 조상 야곱이 마셨고 그 자손들과 가축까지 마셨습니다.”(요한4:11) 지금까지는 이랬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져야합니다. 사마리아 여인처럼 이제는 물을 길러 올리던 두레박도 그리고 물을 떠 나르던 물 단지도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참된 구원은 오직 예수로부터 나온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 그러면 이제는 우리의 차례입니다. 이제는 성공회에서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 예수 마음을 느끼는 영적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이 예배를 통해 우리 안에 있는 벽들을 허물어야 합니다. 미움의 벽, 편견의 벽, 욕심의 벽을 허물고 주님 사랑으로 서로 하나가 되야 합니다. 그래서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고 그분의 일을 완성하는 것이 내 양식이다.”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처럼 내가 사는 가정에서, 일터에서, 이 사회에서 우리 모두가 주님 사랑으로 축복을 나누는 성도가 되어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