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말씀과 신앙나눔 보지 않고 믿는 이들의 행복(부활 2주일, 최도미닉 신부 말씀)

보지 않고 믿는 이들의 행복(부활 2주일, 최도미닉 신부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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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2주일)/ 사도2:14,22-32, 1베드1:2-9, 요한20:19-31

보지 않고 믿는 이들의 행복

 

이동식 시인이 쓴 “하늘”이란 시가 있습니다. 예수가 나에게 어떤 분인지 알게 하는 시라서 잠깐 소개하고자 합니다.

“친구야,

길을 가다가 지치면 하늘을 보라

하늘은 보라고 있는 거야

사는 일이 무엇보다 힘든 일이니까

살다보면 지치기도하겠지만

그러더라도 그러더라도

체념해 고개를 떨구지 말라고

희망마저 포기해 웃음마저 잃지 말라고

하늘은 저리 높은 곳에 있는 거야”

시인은 하늘을 보며 지치고 힘든 삶을 이겨내라고 합니다. 상처 받은 아픔을 이겨내고 세상 속에서 인간으로 살아가야할 길을 잃지 말라고 합니다. 시인이 하늘을 보며 자신의 존재와 삶의 의미를 찾으려 했던 것처럼 주님은 우리의 하늘이 되어 주십니다. 고개를 들기만 하면 누구나 볼 수 있는 하늘이 되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바라보라 하십니다. 그 약속의 징표가 바로 부활입니다.

 

저는 세월호 참사를 보면서 지금이야 말로 고개를 들어 예수를 볼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순결하게 죽어간 그 죽음을 통해 부활하게 하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몫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닫아걸고 있던 문을 활짝 열 수 있는 용기와 지혜가 필요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겠습니다.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들었다면 문을 활짝 열고 기뻐해야할 텐데, 기뻐하기는커녕 그들은 두려워 문을 닫아걸고 있었습니다.

 

왜 주님의 부활이 나의 기쁨이 되지 못하고 두려움이 되었을까요? 그것은 의심과 두려움, 죄책감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마리아가 전해준 주님의 부활 소식은 제자들에게는 스승을 배반한 죄책감, 그리고 그 소식은 또 다른 두려움이 되어 엄습해 왔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렇게 문을 닫아걸고 있는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이 부활의 기쁨을 함께 누리자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부활의 기쁨을 주님과 함께 누릴 수 있을까요?

 

첫째, 십자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제일 먼저 보여주신 것은 십자가의 흔적이었습니다. 지금 이 제단에서 타고 있는 부활초는 부활하신 주님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위에서 당하신 상처를 그대로 보여주신 사건을 기억하게 합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왜 이 십자가의 흔적을 보여주셨을까요? 부활하면 몸의 상처를 갖고 부활하니 몸을 잘 보존하라고 보여주었을까요?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화재로 죽은 사람은 큰일이 아닙니까? 모진 고문으로 죽은 사람은 어떻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은 무엇을 보라고 이 상처를 보여주셨을까요?

예수님의 상처를 보면 뭐가 보입니까? 저는 이 상처를 볼 때마다 두 가지의 진실이 보입니다.

 

하나는 나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나를 나무나 사랑하셔서 자신의 생명까지 아낌없이 내어 주신 하느님의 사랑이 보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이 상처는 길가다 넘어져서 생긴 상처가 아닙니다. 누구와 싸우다 난 상처가 아닙니다. 나를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바친 사랑의 상처입니다.

 

그런데 또 다른 모습이 보입니다. 그것은 바로 내 자신의 배반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던 나의 모습이 보입니다. 때문에 주님의 십자가를 보면 하느님의 사랑과 회개해야할 나의 모습이 떠올려집니다.

지금 우리는 세월호 참사로 인해 깊은 신음에 싸여 있습니다. 저는 이 사건을 통해 우리가 부활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다면 이 어둠으로부터 나와 십자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은 이 민족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속으로 썩어 들어가고 있는 이 병을 치유하지 않으면 세월호처럼 어느 날 갑자기 침몰할 모릅니다. 사실 세월호는 우리 사회의 축복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우리 자신이 얼마나 썩고 부패했는데 절절하게 보고 느끼게 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십자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부활합니다. 이 상처를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볼 수만 있다면, 그리고 이 상처를 통해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돌아설 수만 있다면 부활의 승리와 영광을 언제나 주실 것을 확신합니다. 때문에 이제는 두려움, 분노를 넘어 희망을 볼 때입니다.

둘째, 주님이 가르쳐주신 삶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믿는 것입니다. 부활은 눈으로 보고 만져 보는 경험을 통해서가 아니라 주님의 약속을 믿을 때만 주어어지는 축복입니다.

저는 한국 교회는 부활을 상실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말씀을 상실한 채 체험과 이적을 쫓고 있기 때문입니다. 순복음교회가 60만이 모이는 세계 최대의 교회가 되었다고 부러워해도, 사랑의 교회가 3천억을 드려 교회를 진다해도 여기에는 부활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말씀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세월호 선원들이 기독교인들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왜 결정적인 곳에서 예수를 찾지 못했을까요? 이적과 체험을 쫓다가 말씀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지금 한국교회가 그렇습니다. 저는 우리 성공회, 강동교회만이라도 말씀 앞에 서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어떤 기적과 표적이 없어도 말씀을 사모하는 교회가 되었드면 좋겠습니다.

 

도마는 주님이 부활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믿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 손으로 못 자국에 넣어보고 자신 손가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만지지 않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도마처럼 예수님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만져보고, 또 예수님의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고 부활하신 주님을 믿을 수는 없습니다. 부활은 손으로 만지고 눈으로 보고 믿는 것이 아니라 귀로 듣고 마음으로 믿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미 3번씩이나 자신은 십자가에서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도마가 이 약속을 믿었더라면 도마는 형제들의 증언을 믿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도마는 믿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도마는 주님의 말씀과 약속보다는 자신의 경험과 체험을 더 중요시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 전서 1장 8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초대교인들이 어떻게 믿었습니까? 그들은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으면서도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을 보지 못하면서도 믿고 있으며 또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으로 넘쳐 있다”고 했습니다. 이게 부활신앙입니다.

 

부활은 체험 신앙이 아닙니다. 부활은 말씀 신앙입니다. 십자가에 수난하시고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사신 예수님에 관한 말씀을 믿고 신뢰하고 확신하며 살아가는 길이 부활신앙입니다. 말씀을 믿고 따르다 보면 체험 되는 것이지, 체험을 먼저 하고 말씀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앞으로 올 축복을 미리 맛보고 떠난 게 아닙니다. 장차 주실 축복을 믿고 떠난 것입니다. 비록 그 길을 사막이요, 황량한 벌판이라 할지라도 하느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따랐을 때 비로소 하느님의 축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바로 이점이 롯과 다른 점이었습니다. 롯은 표적을 따랐지만 아브라함은 말씀을 따랐습니다. 결국 최후의 승리는 아브라함이 한 것입니다.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부활은 주님이 보여주신 삶, 주님이 들려주신 말씀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믿고 따라가는 삶을 통해서 주어지는 하느님의 은총이요 선물입니다.

 

셋째, 부활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느끼고 그것을 몸으로 살아가는 사람에게 주시는 축복입니다.

도마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로 결심하셨을 때 다른 제자들은 위험하니까 주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고 말렸지만 도마만은 “우리도 주님과 같이 생사를 같이 합시다”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대단한 믿음입니까? 그런데 이런 도마가 주님의 부활을 의심하고 말았습니다. 머리로는 알았지만 그것을 자신의 삶으로 가져가지는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매주 부활을 선포하는 예배를 드립니다. 그 핵심은 말씀과 성찬입니다. 말씀의 전례는 오늘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습니다.

그리고 곧 이어 성찬의 전례가 이어집니다. 성찬은 예수님의 삶입니다. 예수님은 사랑을 말로만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모든 것을 자신의 삶으로 가르치셨습니다. 바로 말씀과 삶이 하나가 될 때 부활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부활을 제대로 이해라면 말씀을 가슴으로 느껴야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자신이 삶으로 가져야합니다. 주님의 진리를 몸으로 부닥치며 그 말씀을 자신의 삶으로 가져가려는 자신과의 치열한 싸움이 없이는 부활의 진리를 깨달을 길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부활은 몸의 언어, 삶의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주님은 거룩한 산제를 드리라고 하십니다. 자신의 전 존재를 바치는 거룩한 산제사로 바쳐질 때만 체험될 수 있는 진리가 부활이기 때입니다.

 

넷째, 성도의 교제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부활은 관계 속에서 깨달을 수 있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 둘 셋이 모인 곳에 나도 함께 있겠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24절의 말씀을 보면 도마가 의심에 빠진 첫째 이유를 도마가 제자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강조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부활 신앙은 성도와 함께하는 교제를 통해 성숙합니다. 저는 우리 강동교회가 활발한 성도의 교제가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성도의 교제는 희미하게 보이던 진리를 얼굴을 마주보며 보이는 것처럼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도록 이끌어 주기 때문입니다.

 

부활을 경험한 초대교인들의 특징은 날마다 성전에 모였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모여서 사도들의 가르침을 들었고 기도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의 것을 공동체 앞에 내놓고 필요한 사람들에게 자기의 것을 함께 나누며 순수한 마음으로 함께 성체를 나누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삶은 부활의 경험을 더 풍성하게 해 주었습니다.

 

끝으로 부활은 혼자 누리는 축복이 아니라 함께 나누어야할 축복입니다.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주님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나뿐만 아닙니다. 세상 모든 사람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 내 가족과 내 이웃, 내 나라, 세상 모든 나라와 함께 나누어야할 축복입니다.

 

오늘 사도행전은 분명히 말합니다. “그 때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그 때는 어느 때일까요? 예수가 필요할 때입니다. 바로 지금입니다. 시인이 하늘을 보고 삶의 의미와 희망을 찾으려했던 것처럼 우리는 예수 이름을 부를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이름을 부를 때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부활로 이끌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내가 불러야할 이름이요, 우리가 불러야할 이름입니다. 때문에 주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 주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예수의 이름을 부르며 부활의 기쁨을 함께 누리도도록 우리를 보내셨다는 것을 기억하는 이 자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특히 세월호 참사로 죽어간 영혼들이 하느님 품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하시고, 이 사고를 통해 부활하는 우리 대한민국이 되기를 간질히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