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말씀과 신앙나눔 부활의 승리를 맛볼 수 있는 사람들(부활주일, 최도미닉 신부 말씀)

부활의 승리를 맛볼 수 있는 사람들(부활주일, 최도미닉 신부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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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승리를 맛볼 수 있는 사람들

 

부활의 기쁨과 승리가 교우 여러분과 가정에 충만하시기를 빕니다.

주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네 개의 기둥을 세워주셨습니다.

첫째 기둥은 하느님께서 친히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유대 땅 베들레헴 마굿간에 태어나신 임마누엘의 기둥, 곧 성탄의 기둥이요,

둘째는 갈보리산 언덕에서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기 위하여 죽으신 십자가의 기둥이요,

셋째는 장사 지낸지 사흘 만에 무덤의 돌문을 굴리시고 부활하신 부활의 기둥입니다.

마지막으로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주께서 만왕의 왕으로 심판의 권세를 가지시고 천군천사의 나팔소리와 함께 이 땅에 재림하실 재림의 기둥입니다.

 

그런데 이 네 기둥 중에 핵심이 되는 기둥은 바로 부활의 기둥입니다. 이 기둥이 없다면 주님의 탄생도, 십자가의 고난도, 주님의 재림도 아무런 의미가 없었을 것입니다.

바울로는 고린도 전서 15장에서 예수님의 부활이 없으면 1)우리가 전파하는 복음도 헛된 것이요 2)믿음도 헛된 것이며 3)우리가 하느님의 거짓 증언자가 될 것이며,4)모든 사람 가운데 가장 불쌍한 자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부활이 길을 우리 모두에게 보여주셨습니다. 만약에 부활이 예수님의 부활로 끝났다면 그 부활은 우리와 아무런 상관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의미 있는 것은 우리도 주님처럼 부활할 수 있는 길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부활절은 주님의 부활이자 우리 모두의 부활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이 초대에 응답하시는 오늘이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간디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에게 불이 있어도 돌맹이에 불을 붙일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우리에게 부활의 신비를 전해주고 싶어도 우리의 마음이 돌처럼 굳어 있다면 부활의 신비가 우리의 삶속에서 타오를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부활의 승리를 맛볼 수 있는 사람일까요?

 

첫째, 불신과 두려움의 돌을 치울 수 있어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일 먼저 하신 일은 무덤을 막고 있는 커다란 돌을 치우는 것으로 부터 시작 됩니다. 그렇다면 이 돌은 무엇일까요? 바로 불신과 두려움입니다.

 

안식일 다음날 이른 새벽의 일이었습니다.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무덤에 가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이미 치워져 있었습니다. 너무나 기가 막혀 막달라 마리아는 울고 말았습니다. 주님을 잃은 것도 슬프고 기가 막힌 일인데 이제는 예수님의 시신마저 빼앗기고 말았다고 생각하니 얼마나 기가 막히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절망하여 울고 있는 여인에게 “왜 울고 있느냐? 누구를 찾고 있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냥 “나다!”라고 하면 될 것을 왜 이렇게 물으셨을까요? 그것은 주님이 하신 약속을 상기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주님은 어떤 약속을 하셨나요? 주님은 이미 제자들에게 자신은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세 번씩이나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번씩이나 말씀하신 것은 이 일은 반드시 일어나리라는 것을 확증하기 위해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이 약속을 잊고 있었던 것입니다. 설마 부활하실까? 라고 의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우리 안에도 이런 의심이 있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떤 상황이 벌어지면 의심하며 떨고 있습니다.

 

구상 시인은 “꽃자리”라는 시를 통해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 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가시 방석처럼 우리 앞에 닥친 어둡고 고통스러운 현실, 어찌 그것이 꽃자리가 될 수 있을까요? 시인은 말합니다. 지금 내가 앉은 자리가 비록 가시 방석이라 할지라도 꽃자리 인 것은 자신이 지금 하느님의 사랑 안에 살고 있음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라고 고백합니다. 때문에 그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땅이 꺼지는 이 요란 속에서도

언제나 당신의 속삭임에

귀 기울이게 하옵소서.

 

내 눈을 스쳐가는 허깨비와 무지개가

당신 빛으로 스러지게 하옵소서.

 

부끄러운 이 알몸을 가리울

풀잎 하나 주옵소서.

나의 노래는 당신의 사랑입니다.

당신의 이름이 내 혀를 닳게 하옵소서.

시인은 가시 방석과 같은 현실 속에서도 예수를 바라봅니다. “땅이 꺼지는 요란 속에서도 당신의 속삭임에 귀 기울이게 하옵소서.”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종종 잊습니다. 가시 방석과 같은 현실 앞에서, 그리고 유혹하는 세상 앞에서 우리는 주님이 내 곁에 계심을 잊고 살아갑니다. 지금 내가 누릴 부활의 영광을 잊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님은 곁에 계십니다. 이것을 믿고 손을 내미는 자는 부활의 기쁨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돌이 가진 또 하나의 벽이 있습니다. 두려움입니다.

저는 이번 세월호 여객선 조난 사건을 보면서 두려움이 우리를 얼마나 어리석게 만드는지 알았습니다. 이번 사고의 원인이 조종 실수라 합니다. 실수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선장이 두려워하지 않고 침착하게 대처했다면 한사람도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두려움이 생명으로 가는 길을 막아버린 것입니다.

왜 사람들이 무덤을 돌을 막았을까요? 두려움 때문입니다. 그들은 두려움 때문에 주님을 무덤에 가둬놓고 돌로 막았을 뿐만 아니라 병정들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습니다. 이처럼 두려움은 부활의 희망을 막는 돌입니다.

 

다음으로 주님이 무덤의 문을 여신 때를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무덤의 문을 여신 때는 날이 밝았을 때가 아닙니다. 아직 어둠이 깔려 있을 때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왜 아직 어두울 때 문을 여셨을까요? 좀 더 기다리셨다가 날이 밝을 때 무덤을 나오셔도 될 터인데 말입니다. 비록 어둠 속에 있다 할지라도 언제나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에게 희망을 두는 사람입니다. 비록 지금은 작은 냇가로 흐르지만 마침내 큰 바다에 이르는 것처럼 우리의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에게 희망을 두는 믿음은 지금은 작을 지라도 나중에는 창대해 집니다.

그러므로 꿈이 없는 것은 부활신앙이 아닙니다. 말씀 속에 비전이 있습니다. 말씀 속에 우리의 꿈이 있습니다. 거기에 부활이 있고, 생명이 있고, 축복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지금 어떤 꿈을 갖고 있는가를 묻고 있습니다.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에 인생의 목표를 둔 사람에게는 부활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죽은 나무는 오는 봄을 맞이할 수 없는 것처럼 부활은 예수 안에서 비전을 보는 사람에게 주시는 하느님의 축복이요,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주님을 통해 나타난 비전을 보면서 살아갑니다.

다윗이 언제 “내가 오고 있는 새벽을 깨우겠다.”고 했습니까? 어제 새나라 새 땅을 이룩하겠다고 꿈을 꾸었습니까? 사울에게 쫓기어 아둘람이라는 동굴에 갇혀 있을 때입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마지막 상황에서 그는 절망하지 않고 “야훼여, 당신만이 나의 힘이 오니 당신만을 의지합니다.”라고 외치며 미래의 이스라엘 미래, 새로운 왕국을 꿈꾸었습니다.

 

여러분 지금 이 세상은 바른 가치관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이번 세월호의 비극은 이런 우리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무엇을 보고 감동했고, 무엇을 보고 분노했습니까? 남을 위해 자기를 희생한 사람들은 이 시대의 희망이요, 기쁨이 아니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느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 안에서 미래의 비전을 꿈꾸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 부활을 맛볼 수 있습니다.

끝으로 예수를 닮아 자신의 삶을 바꾸어 가는 사람입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살아계신 분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찾고 있느냐? 그분은 여기 계시지 않고 다시 살아나셨다.”(루가24:5)고 했습니다.

교인은 머물어야 할 곳에 머물 줄 알아야 합니다. 부활은 누구에게 맛볼 수 있는 은총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에게 열려있기는 하지만 누구나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부활은 있어야 할 곳에 있는 사람에게만 주시는 은총입니다.

그러므로 무덤에서 나와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어둡게 하고, 우리의 마음을 어둡게 하는 무덤을 떠나야 합니다. 그래야 사도 바울로 말씀처럼 “썩을 몸으로 묻히지만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약한 것으로 묻히지만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것”입니다.

 

아직도 이기심, 교만, 질투, 증오 안에 있습니까? 그것은 무덤입니다.

남을 생각하는 사랑이 없고, 남을 용서하는 이해가 없고, 남을 존경하는 겸손이 없다면, 그 마음은 여전히 냉냉 무덤입니다. 뿐만 아니라, 누구를 사랑해야 하고, 누구를 용서해야 하고, 어떤 것을 고쳐야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돌아서지 못한 채 예수님을 믿고 있다면 그는 아직도 예수님을 무덤 속에서 찾고 있는 막달라마리아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무덤에서 나와 갈릴리로 가야합니다. 갈릴리, 그 곳은 예수님의 삶이 있는 곳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치유하시고 용서하셨던 곳입니다. 여기가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부활을 꿈꾸며 살아가야할 곳입니다. 부활의 현장은 죽은 다음에 가는 저 천국이 아니라 지금 서로의 아픔을 감싸고 보듬고 사랑하는 현장이 바로 부활의 현장입니다.

 

정채봉 선생님이 쓴 “만남”이란 글이 아주 인상적입니다.

 

‘가장 잘못된 만남은 생선과 같은 만남이다.

만날수록 비린내가 묻어오니까.’

 

‘가장 조심해야할 만남은 꽃송이 같은 만남이다.

피어 있을 때는 환호하다가 시들면 버리니까.’

 

‘가장 비천한 만남은 건전지와 같은 만남이다.

힘이 있을 때는 간수 하고 힘이 다 닳았을 때는 던져 버리니까?’

 

‘가장 시간이 아까운 만남은 지우개 같은 만남이다.

금방의 만남이 순식간에 지워져 버리니까.’

 

‘가장 아름다운 만남은 손수건과 같은 만남이다.

힘이 들 때는 땀을 닦아 주고 슬플 때는 눈물을 닦아 주니까.’

 

여러분은 여기에서 갈리리가 보이십니까? 꽃송이 같은 만남, 건전지 같은 만남, 생선과 같은 만남을 이루며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손수건과 같은 삶을 살아가는 곳, 바로 갈릴리입니다.

예수님처럼 힘들 때 땀을 닦아 주고 슬플 때 눈물을 닦아 줄 수 있는 사랑의 자리로 나와야 합니다. 이 때 부활의 신비를 알게 됩니다.

돌아서야 합니다. 무덤에 머무는 한 부활의 신비를 맛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무덤을 떠나십시오. 그러면 사도 바울로의 말씀처럼 “썩을 몸으로 묻히지만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약한 것으로 묻히지만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날”것입니다.

주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기꺼이 부활과 생명이 되어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단순히 당신의 부활을 기념하는 부활절이 되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의 부활만을 기념하는 부활절은 의미가 없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부활절은 바로 우리의 부활절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주님은 바로 이 부활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태어나셨고, 죽으셨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부활을 이제 우리가 누려야할 차례입니다. 부활의 승리를 맛보는 이 아침이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