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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라(연중 12주일, 최도미닉 신부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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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12주일) / 창세21;8-21, 로마6:1-11, 마태10:24-39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라

 

어떤 사람이 한 신부님에게 기독교와 다른 종교는 어떻게 다른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물에 빠졌습니다. 그러자 공자는 “물에 조심하라고 했는데 왜 빠졌느냐!” 라고 말하고는 그냥 지나쳐 갔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석가가 지나가다가 그 광경을 보고 긴 나무를 던져 그 나무를 잡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지쳐서 그 나무를 잡을 힘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물속으로 뛰어 들어 그 사람을 구해냈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아마 기독교의 우월성을 이렇게 말한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기독교는 다른 종교에 비해 우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무엇이 우월할까요? 신부님의 설명대로 기독교가 우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요. 아무리 기독교가 다른 종교보다 우월하다 할지라도 예수를 닮아 살아가려는 삶이 없다면 우월하지 않습니다.

 

기독교의 특징은 삶에 있습니다. 때문에 성경을 보면 거룩한 말로 포장하지 않습니다. 삶의 있는 모습을 그대로 전해줍니다. 왜냐하면 신앙이란 오직 삶을 통해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내 삶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삶이 없다면 그 신앙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늘 본문말씀을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하겠다.”라고 하십니다.

바울로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의인이라 했습니다. 하느님께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이 하느님께로부터 의롭다 인정받는 길을 가르쳐주십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인정받으려면 우리가 먼저 사람들 앞에서 예수를 안다고 증언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안다고 증언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사람들 앞이란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요? 교회일까요? 아마 교회 안보다는 교회 밖을 염두 해두고 이런 말씀을 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해야 우리가 사람들 앞에서 예수를 안다고 증언할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 플래카드를 들고 다니면 증언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성경책을 옆에 끼고 거룩하게 다니면 증언하는 것일까요?

이건 어떨까요? 우리가 성경을 열심히 잃고,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예배에 열심히 참여하면 안다고 증언하는 것일까요? 물론 이런 행위들이 우리의 신심을 높여주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런 삶은 세상 풍조를 따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좋은 모범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 모두 이런 삶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런 삶을 산다고 해도 사람들 앞에 예수를 안다고 증언하는 행위는 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주여, 주여 한다고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얼마 전 보았던 ‘도가니’란 영화를 보았습니다. 그 영화에서 장애인을 학대하던 교장은 바로 장로였습니다. 이 영화는 성경을 옆에 끼고 정성을 다해 예배를 드리고 있는 교장 선생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아무리 성경을 거룩하게 옆에 끼고 정성들 대해 예배드린다 해도 이런 모습으로는 예수를 안다고 증언할 수 없다는 것을 이렇게 표현하지 않았나?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사람들 앞에서 예수를 안다고 증언하는 것일까요? 바울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죽어서 죄의 권세를 벗어나 그와 함께 하느님을 위하여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십시오.”(로마6:11)

그렇습니다. 내 자신의 욕심과 이기심을 버리고 기꺼이 예수의 향기가 되어 살아갈 때라고 생각했습니다.

 

주님은 여기 보잘 것 없는 형제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보잘 것은 없는 한 사람에게 물 한 그릇이 줄 수 있는 마음, 아파하는 자와 함께 아파하고, 우는 자와 함께 울어주고, 웃는 자와 함께 웃어 줄 수 있는 사랑이 있을 때 우리는 사람들 앞에서 예수를 증언하는 성도가 될 수 있습니다.

얼마 전 집사람이 아름다운 가게에서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부자”라는 책을 사왔습니다. 이 책은 오정면 장로라는 사람이 쓴 간증의 이야기였습니다. 정말 사제를 부끄럽게 하는 신자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오정면 장로는 신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반대로 목사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목사처럼 예수의 향기로 살아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목회 대신 농사지으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힘든 농사일을 하면서도 가을 거지가 끝나면 말레이시아 오지에 가서 원주민을 18년 동안 도왔습니다. 한 번 하기도 힘든 일을 무려 18년 동안 해온 것입니다. 그는 그곳에서 아이들 심장수술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고 약을 갖고 가서 갖가지 질병을 고쳐주기도 했습니다.

 

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세상 사람을 가난한 사람, 부자인 사람으로만 구분해서 나눈다면 어느 쪽이 더 많을까요? 당연히 가난한 사람이,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더 많다고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부부에게는 참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우리 부부는 아주 대단한 부자거든요. .. 우리는 세상에 부러운 이가 없습니다. 이만큼 만족해하면서, 이만큼 행복해하면서 한 살 한 살 늙어갈 수 있는 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고마운 일인지 모릅니다. 사람이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에 한 점 부끄러움이 없고, 언제 어디서나 항상 떳떳하고 기분이 좋습니다.”

 

저는 이런 사람이야말로 예수를 안다고 증언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내 자신의 삶을 뒤돌아보았습니다. 나는 과연 예수님을 안다고 얼마나 떳떳하게 증언하며 살아왔는가? 하고 말입니다.

사실 누구를 안다고 한 결 같이 증언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예레미아와 같은 예언자도 실망한 때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다시는 주님의 이름을 입 밖에 내지 말자”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손을 들고 맙니다.

“주님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라 견디다 못해 저는 손을 들고 맙니다.”(예레10:9)

 

그렇습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 온다 해도 진리의 길을 잃지 않고 갈 수 있는 것, 바로 이것이 예수를 안다고 증언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를 안다고 증언하는 것, 그것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어떤 상황이 밀려오든지 묵묵히 주님이 가신 길을 쫓아가는 사람입니다.

 

저는 초대 교회를 이끌었던 스테파노와 바울로 생각해 봅니다. 언제나 변함이 예수를 안다고 증언했던 사람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우리가 따라가야 할 거울이라 생각했습니다.

저는 바울로의 회심에 대해서 늘 생각했습니다. 바울로가 우연히 회심한 것이 아니라 분명히 바울로의 마음을 움직인 어떤 사건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이런 말씀이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단서를 스테파노의 죽음에서 찾았습니다. 스테파노가 돌아 맞아 줄을 때 바울로는 그 곁에서 지켜 본 사람입니다. 그런데 바울로는 참으로 기이하고 놀라운 일을 경험합니다.

스테파노는 죽으면서까지 자신을 죽이던 사람들을 용서한 것입니다. “주님, 저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견딜 수 없는 고통 속에서 미세한 음성으로 흘러나오는 이 소리는 바울로의 마음을 충격에 빠지게 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자기를 돌로 치는 저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도대체 이런 마음을 갖게 한 예수란 어떤 사람인가?”라고 물으며 다마스커스를 향해 갔을 것입니다.

결국 스테파노의 행동은 바울로의 가슴에 예수를 각인시켜준 사건이 되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울로도 스테파노처럼 그렇게 예수를 안다고 증언하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바울로와 실라가 감옥에 갇혀 있을 때의 일입니다. 그런데 별안간 지진이 일어나면 차고가 풀리고 옥문이 열리는 것입니다. 저 같았으면 하느님의 뜻으로 알고 당장에 도망쳤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로는 차마 도망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지키던 간수장을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간수장이 자결을 하려고 합니다. 이 때 바울로는 간수장에게 말합니다. 자신이 여기 있으니 자결을 하지 말라고, 이런 바울로의 행동에 감동한 간수장은 그날로 예수를 믿게 됩니다.

 

또 하나의 사건이 있습니다. 바울로가 로마로 후송될 때의 일입니다. 바울로는 참으로 힘든 항해를 하였습니다. 열나흘 동안 풍랑에 시달렸고, 배마져 파손되어 위험한 지경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불행 중 다행으로 섬이 하나 보이는 것입니다. 바울로는 선주를 설득해서 모든 사람들을 섬으로 탈출 시키라고 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사람들을 향해 외칩니다.

“이제 곧 배가 침몰 할 것이니 어서 저기 보이는 섬으로 힘껏 헤엄쳐 가십시오.”

사람들은 저마다 섬을 향해 있는 힘을 다해 헤엄쳐 나왔습니다. 섬에 도착한 사람들은 지칠 때로 지쳐서 다 쓰러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 곳 사람들은 친절해서 이 사람들을 위해 불을 피워 주었습니다.

 

그런데 장작불이 꺼지려고 가물거립니다. 바울로는 지친 몸을 이끌고 마른 나뭇가지를 한 아름 안아다가 불 속에 넣었습니다.

저는 여기서 성도의 구분된 삶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바울로라고 왜 힘들지 않았겠습니까? 아마 자신의 몸도 천근만이요, 지칠 대로 지쳐있는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지쳐서 추위에 떨고 있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장작을 들어 불 속에 넣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모습이야 말로 예수를 안다고 증언하는 또 다른 행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더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납니다. 장작을 불 속에 넣으려고 할 때 그 속에 숨어 있던 뱀이 바울로의 손을 물어버린 것입니다.

독사가 사도 바울로의 손을 물었을 때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모두들 놀랐습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이 사람은 분명히 살인자다. 바다에서는 살아 나왔지만 정의의 영신이 살려 두지는 않을 것이다”하고 수군 거렸습니다.

얼마나 큰 위기입니까? 사람들은 “몸이 부어오르거나 당장 쓰러져 죽으려니 하고 지켜보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바울은 아무 말 없이 그 뱀을 불속에 넣어버렸습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독사에 물려도 아무 동요 없이 불속에 넣을 수 있는 마음입니다.

 

이 상황에서 독사는 뭘 말하는 것일까요? 어쩌면 지금 바울로가 보여준 이 사랑의 행위가 시기와 증오의 대상이 된 것은 아닐까? 좋으라고 한 일이 오히려 질투와 저주의 대상됩니다. 이런 일이 생기면 누구나 견딜 수 없는 실망과 좌절을 경험하게 마련입니다.

 

여러분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바울로와 같은 시련과 아픔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나를 무시하는 사람이 있나요, 모함하는 사람이 있나요. 시련과 고통이 밀려올 때가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나를 아프게 하는 독침을 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아프게 하는 현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 앞에 당당한 모습, 바로 이런 모습이 예수를 안다고 증언하는 것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이 사건이후 사람들은 바울로를 신이라고 불렀습니다. 사람들은 바울로의 이런 행위를 통해 예수를 보게 된 것입니다.

 

주님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우리를 안다고 증언하실 것이라고 약속해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사람들 앞에 당당하게 주님을 증언해야합니다.

 

복잡하지 않습니다. 아주 간단합니다. 범사에 감사하고, 범사에 기뻐하고, 범사에 기도하고, 범사에 겸손하고, 범사에 사랑을 나눕니다. 감옥에서 조찬 찬양을 드렸던 바울로처럼 범사에 하느님께 경배와 찬양을 드립시다. 그리고 어떤 역경과 환란이 온 다해도 흔들림 없이 주 앞에 설 수 있을, 우리는 우리의 삶을 통애 이미 예수를 안다고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예수를 전하는 데 있어서 말과 글이 15%를 전달 할 수 있다면 행동과 표정, 그리고 삶으로 보여주는 행위는 85%를 전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삶을 통해 예수를 증언하는 성도가 되야하겠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