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말씀과 신앙나눔 사순절 수요예배 (2)

사순절 수요예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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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밤이었다. 유다가 나간 뒤에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영광을 받게 되었고 또 사람의 아들로 말미암아 하느님께서도 영광을 받으시게 되었다. 하느님께서 사람의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신다면 하느님께서도 몸소 사람의 아들에게 영광을 주실 것이다. 아니, 이제 곧 주실 것이다. 나의 사랑하는 제자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있는 것도 이제 잠시뿐이다. 내가 가면 너희는 나를 찾아다닐 것이다. 일찍이 유다인들에게 말한 대로 이제 너희에게도 말하거니와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겠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 때 시몬 베드로가 "주님,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지금은 내가 가는 곳으로 따라올 수 없다. 그러나 나중에는 따라오게 될 것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주님, 어찌하여 지금은 따라갈 수 없습니까? 주님을 위해서라면 목숨이라도 바치겠습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장담하자 예수께서는 "나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겠다고? 정말 잘 들어두어라. 새벽 닭이 울기 전에 너는 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할 것이다." 하셨다.
– 요한 13:30-38

 

오늘 성경말씀에서 예수님과 베드로의 모습이 대조적으로 등장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겸허히 받아들이며 이것이 하느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일이고 죽음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도 영광 곧 부활을 할 것이라는 것을 미리 제자들에게 말씀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목숨을 바치기로 마음을 먹으셨고 예루살렘으로 온 이 길이 자신의 마지막 때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와 똑같이 두려움 속에서 고뇌하셨습니다. 게쎄마니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를 마르코 복음에서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공포와 번민에 싸여서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니 너희는 여기 남아서 깨어 있어라." 하시고는 조금 앞으로 나아가 땅에 엎드려 기도하셨다. 할 수만 있으면 수난의 시간을 겪지 않게 해달라고 하시며 "아버지, 나의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다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나에게서 거두어주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 마르코 14:33-36
 
지난 주에 잠시 나눈 본 회퍼 목사님도 비슷한 경험을 하셨을 것입니다. 차디찬 감옥 안에서 도저히 희망이 없는 공포와 폭력 앞에서 무기력한 자신을 경험하였습니다. 자신의 옳음을 증명할 수도 없고 서서히 다가오는 죽음을 기다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분은 부재 중에 현존하시는 하느님, 곧 버리시는 하느님을 경험하였기에 다음과 같이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평화로운 밤을 주셔서 찬양과 감사를 드립니다. 새 하루를 주신 아버지께 찬양과 감사를 드립니다. 제 삶 전체를 통해 보여주신 아버지의 선하심과 성실하심을 인하여 찬양과 감사를 드립니다.
-감옥에서 드리는 기도 중
 
어제 나는 누군가가 자신에게는 지난 수년이 완전히 낭비한 시간이었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나는 어느 한 순간이라도 결코 그렇게 느끼지 않았다…..
– 옥중서한 중
 
예수님과 본 회퍼 목사님은 도대체 이런 삶을 살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자신을 죽이는 사람들을 용서하고 자신을 배신하고 악을 행하는 사람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칠 수 있었을까요? 그리고 무엇보다 고통과 번민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으며 오히려 감사를 드릴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사랑”받고 “사랑”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과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느님에게 사랑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무엇보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변화산의 사건에서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는 음성이 들려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게쎄마니동산에서 기도하신 것처럼 오직 하느님만을 깊이 사랑하셨습니다. 자신의 목숨보다 더 깊이 하느님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깊은 사랑이 죽음으로 생명을 얻는 그 길을 가능하게 했던 것입니다.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일은 노력으로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최면으로 결코 할 수 없는 일이 자살하게 하는 일이라고 합니다. 무의식 속에서도 자신을 지키려는 본능이 가장 강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자신의 목숨을 바친다는 것은 누군가 나에게 강요한다고 해서 이루어질 수 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깊이 사랑할 때에 비로소 가능한 일입니다. 제가 요즘 자주 인용하는 헨리 나우엔 신부님은 일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은 온전히 우리와 일치되기를 바라므로 하느님의 모든 것과 우리의 모든 것이 영원한 사랑 안에 함께 묶여 질 수 있는 것이다. … 하느님은 일치를 원한다. 생기 있고 살아 있는 일치, 양쪽에서 오는 친밀함, 참으로 상호적인 결속을. 강요되거나 의지로, 억지로 이루어지지 않으며, 자유로 내어주고 자유로 받아들이는 일치를 원한다.
헨리 나우엔
 
하느님과 예수님은 이런 일치를 이루셨습니다. 영원한 사랑으로 함께 묶여 지는 사랑 그러나 결코 강요나 의지와 억지가 아닌 진정한 자유로움 속에서 서로를 내어주고 받아들이는 일치의 삶을 예수님께서는 보여주셨습니다. 이 일치는 생기 있고 살아 있으며 친밀함과 상호적인 결속으로 드러납니다. 사랑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특정한 감정의 상태가 아닙니다. 바로 너와 나의 경계를 허물어 온전히 하나가 되게 하지만 너와 나의 정체성이 사라지지 않고 하나의 안에서 각자 존재하는 양식입니다. 기독교의 핵심 교리인 삼위일체 역시 이러한 사랑으로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랑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먼저 행하셨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우리는 하느님과 깊이 교제함으로 사랑을 배우고, 삶을 배우고 온전해 지는 이유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삶을 자신의 마음대로가 아닌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시기 위해서 사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이 곧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기 때문에 두려움과 번민 속에서도 그 길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서로 사랑하게 될 때, 즉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들을 사랑하게 될 때, 우리는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임을 기억하십시오. 그 사랑은 우리를 완전하게 하며, 우리의 두려움을 없애고, 우리 삶의 의미와 목적을 분명하게 살 수 있게 해 줍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죽음 속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 요한 1서
 
우리가 하느님을 아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보여주신 예수님의 삶을 닮아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사랑의 삶을 사는 것이고, 이것은 결국 우리 주변의 이웃들을 사랑하게 이끌어 갑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장담 앞에 예수님은 베드로의 배반을 예고하십니다.
 
주님,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가지셨는데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가겠습니까?         요한 6:68
 
예수님과 가장 가까이 지내며 그 분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고 인정을 받았던 베드로는 자신의 목숨을 바칠 수 있다고 장담합니다. 예수님과 베드로의 차이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 대답은 바로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아직 자신의 목숨을 바칠만큼 하느님을 깊이 사랑하지 못하고 있음을 아셨습니다. 늘 가까이 지내는 베드로는 우직하고 성격이 급한 사람이라 거짓을 말하지는 않지만 죽음 앞에서 두려움으로 하느님과 자신을 배신할 수밖에 없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베드로를 깊이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를 잘 알았고 그에게 말씀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보통 우리 같으면 나를 배신할 사람을 곁에 잘 두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깊게 사랑하지도 않고 자신의 속마음을 잘 드러내지도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변화를 기대하지도 않고 실제 변화도 잘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오히려 반대로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 보이시고 깊이 사랑하심으로 베드로를 더욱 크게 만드셨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하고 나서 결국 자신의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이처럼 우리를 변화시키고 두려움을 없애는 완전한 사랑입니다.
 
베드로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은 요한복음 21장에 잘 나타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고기를 잡으러 갈릴리로 돌아간 베드로에게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자신을 배신했던 상황을 재현하십니다. 모닥불을 펴시고 제자들 앞에서 베드로에게 물으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의 질문은 베드로의 마음을 슬프게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의 슬픈 마음을 치유해주시기 원하셨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베드로는 자신의 배신을 용서받았고 다시 하느님의 부르심 가운데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사랑은 용서하는 사랑이고 제한하지 않고 그 사람을 끝까지 믿어주는 사랑입니다. 이러한 사랑은 그 사람을 성장시키고 변화시킵니다. 판단하지 않고 기다리며 눈 앞의 부족함보다 깊은 존재의 가능성을 바라보는 사랑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랑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자랑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사욕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성을 내지 않습니다.
사랑은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를 보고 기뻐하지 아니하고 진리를 보고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에서 희망을 찾는 일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세상의 폭력과 미움은 날로 커져만 가고 우리의 부족함과 한계를 매 순간 느끼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께서 주신 새로운 계명을 지켜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며 살아갈 때 우리가 세상의 희망이 되고 변화의 시작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방법이며 진리가 승리하는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