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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수요예배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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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도 나를 먼저 미워했다는 것을 알아두어라. 너희가 만일 세상에 속한 사람이라면 세상은 너희를 한집안 식구로 여겨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세상에 속하지 않았을 뿐더러 오히려 내가 세상에서 가려낸 사람들이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 종은 그 주인보다 더 나을 수가 없다고 한 내 말을 기억하여라. 그들이 나를 박해했으면 너희도 박해할 것이고 내 말을 지켰으면 너희의 말도 지킬 것이다. 그들은 너희가 내 제자라 해서 이렇게 대할 것이다. 그들은 나를 보내신 분을 모르고 있다. 내가 와서 그들에게 일러주지 않았던들 그들에게는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들이 자기 죄를 변명할 길이 없게 되었다. 나를 미워하는 자는 나의 아버지까지도 미워한다. 내가 일찍이 아무도 하지 못한 일들을 그들 앞에서 하지 않았던들 그들에게는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한 일을 보고서도 그들은 나와 또 나의 아버지까지 미워한다. 이리하여 그들의 율법서에 '그들은 까닭없이 나를 미워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 말씀이 이루어졌다."
요한 15:18-25
 
어느 날 들은 이야기가 잊혀지지 않고 계속해서 맴돕니다. “생각하는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대로 생각하게 된다.” 어디서 들었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데 들은 이 후부터 계속 되뇌이게 됩니다. 프랑스 작가·비평가 폴 부르제가 한 말이라고 합니다. 한참 동안 이 말이 왜 제게 의미가 있는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것은 제가 아주 오랫동안 신앙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은 했지만 실제 저의 삶의 모습은 그것과 늘 괴리와 차이가 있었고 그런 시간들이 지나면서 결국 나의 삶의 모습이 내 신앙을 왜곡시켰기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믿는대로 살았어야 하는데, 믿는대로 살지 못했습니다. 믿는대로 사는 것은 절대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최근에 한 청년과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다가 “복음은 늘 멋져 보이고 화려한 길인 것 같으면서도 알맹이가 없는 쭉정이 같아요. 결국 그렇게 살 수도 없는 불가능한 영역처럼 느껴져요.” 그 이야기가 바로 제 과거의 상황가 크게 다르지 않음을 고백합니다. 입으로는 늘 십자가를 이야기하면서도 결코 십자가를 지는 십자가의 길은 가려 하지 않았습니다. 입으로는 늘 섬김과 낮아짐을 이야기하면서도 늘 높은 자리와 성공을 꿈 꿨습니다. 용서와 화해를 이야기하면서도 조금이라도 손해를 보는 일은 하지 않고 갖은 방법을 동원하여 이익을 챙기려고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은혜를 늘 이야기하면서도 은혜로 살아가지 않고 내 능력과 힘을 통해 살았습니다. 영적인 삶을 늘 이야기하면서 제 삶은 늘 육체적인 만족을 추구하며 살았습니다. 늘 기도하는 시간은 혼나는 시간이고 반성하는 시간이지만 결코 저의 삶을 바꿀 수 없어 방황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하느님의 은혜만이 필요하다는 고백을 마치 주문처럼 외우면서 제 삶은 점점 제 생각까지도 변화시키고 현실에 뿌리박지 못한 제 생각은 점점 이상한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이런 저런 우여곡절 끝에 성직의 삶을 가게 되었을 때, “우리가 다른 것들을 향하여 나아가야 할 적절한 시기가 되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신앙을 굳건하게 만들기 위해 그분의 현존에 대한 느낌을 거두어 가신다. 그 후에는 어떤 심리적 효과를 매개로 하여 그분을 찾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다.”는 토마스 머턴의 말처럼 하느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현존에 대한 느낌마져 사라져 버렸습니다. 많이 힘들고 어려운 시기를 겪으면서 하느님을 갈망하게 되었고 많은 변화가 제 삶에서 일어났습니다. 저의 신앙이 얼마나 어리고 연약했는지 알게 되었으며 올바른 신앙은 성장과 성숙을 동반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오늘 함께 읽은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은 것처럼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 역시 미움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설교를 준비하면서 참 많이 부끄럽고 창피했습니다. 성직자의 길을 간다는 것을 제 스스로 “목숨 걸고 가고 있다.”고 말하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반만 맞았습니다. 살기위해 이 길을 가고 있기 때문에 죽음을 향해서는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세상의 미움을 받고 사람들의 박해를 받지 않기 위해 적당한 타협과 명분을 만들며 살았습니다. 이제라도 다시 시작해야겠다.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고 예수님을 따라서 세상의 미움을 받는 그 곳으로, 세상의 박해가 있는 그 곳으로 가야만 하겠다고 다짐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세상이 좋아졌기 때문일까요?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이 세상이 하느님 나라가 되어가고 있기 때문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대답은 분명합니다. 우리가 세상과 타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으로부터 어떤 미움과 박해를 받고 계십니까?
 
예수님께서 미움과 박해를 받으신 이유를 간단하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는 종교적인 이유였습니다. 예수님은 당시 종교 지도자들을 엄청 불편하게 하였습니다. 제도권으로부터 권위를 받지 않고 직접 하느님께로부터 받았다고 합니다. 게다가 감히 이름도 부르지 못하는 자신들과는 달리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며 자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그런 예수님을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들이 알고 있는 하느님과 자신들의 방법과 완전히 다른 예수님의 모습 때문에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미워했습니다. 예수님은 각종 율법보다 사람과 사랑을 더 우선시하셨습니다. 정결법과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셨고, 당시 종교지도자들에 의해 죄인으로 불리던 많은 사람들과 거리낌 없이 사귀셨습니다. 비유로 가르치실 때 종교지도자들을 불충한 종이라 불렀으며 하느님의 종인 예언자들을 죽이고 이제 그 아들마저 죽일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전 안에서 합법적으로 장사를 하던 상인들을 내 쫒으시고 그들이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던 성전을 무너뜨리고 사흘만에 다시 짓겠다고 하셨습니다. 가장 큰 신성모독은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죄의 용서를 선포하신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정치적인 이유였습니다. 예수님은 로마에 반대하고 로마와 무력충돌을 일으키시지는 않았지만 로마에 순응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가난한 사람들 소외당하는 사람들 억압받고 착취받는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이는 오해를 낳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생각하고 십자가형에 처하는 결정적인 이유가 되기는 했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느님의 나라는 세상의 나라와는 다른 개념의 나라였습니다.
 
오늘날 예수님께서 오신다면 어디에서 무엇을 하실까요?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우리 삶을 정하는 판단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하느님입니까? 아니면 “나”입니까?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첫 번째로 가난하고 소외당한 이들의 곁에 우리가 함께 있어야 합니다. 어린 아이, 장애인, 외국인, 노인, 가난한 이웃들, 여성, 성적소수자들의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그들이 받는 고통과 고난은 그들의 책임이 아닙니다. 그들만의 것은 절대 아닙니다. 그들의 고통이 그들만의 것이 될 때 그 사회는 병들었다고 진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고통이 함께 나누어 질 때 그 사회는 가능성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고통과 고난은 바로 우리 모두의 것이 되어야 하고 우리가 그들과 함께 그 고난에 동참하게 될 때 하느님의 놀라운 기적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어린 시절 가장 많이 들었던 이야기중 하나가 나보다 나은 사람과 사귀라는 말이었는데 저는 반대가 신앙적 길이라고 믿습니다. 나보다 못한 사람, 특히 아무도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과 사귀고 함께 하라. 그들과 진정한 친구가 될 때 사람들은 소극적으로 우리를 미워할 것입니다. 우리를 어리석다 할 것이고, 아무런 가치가 없는 일을 한다고 비아냥거릴 것이고, 경제적 가치와 효율성의 잣대로 우리를 판단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그런 우리에게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 25:40)”고 말씀해 주실 것입니다.
 

두 번째로 평화를 위해서 일해야 합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평화는 하느님의 정의와 연결이 됩니다.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은 평화를 심어서 정의의 열매를 거두어들입니다.(야고 3:18)] 무력으로 이루어지는 분쟁이 없는 상태가 평화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정의가 이루어지는 상태가 바로 진정한 평화입니다. 하느님의 정의를 이루는 주요한 요소인 자유와 평등의 기반 아래에서만 가능합니다. 자유는 진리를 깨달을 때 얻어지는 것이며 평등은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만드셨다는 창조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결국 다른 말로는 서로 사랑하는 세상입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창조 이야기에 가장 잘 드러나며, 율법을 통해서 드러나고, 예수님의 삶을 통해서 드러나고, 교회의 모습을 통해서 드러나게 됩니다. 우리가 적극적으로 하느님의 나라 곧 그 분의 정의와 평화를 위해서 일하게 될 때 우리는 세상의 미움과 박해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느님의 평화를 위해 일하게 될 때, 세상과 맞설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1948년 6월 국제 연합 인권 위원회에 의해 선언문이 완성되었고, 같은 해 12월 10일 파리에서 개최된 제3차 국제 연합 총회에서 만장일치로 채택된 세계인권선언문 제1조는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로우며, 누구에게나 동등한 존엄성과 권리가 있다. 인간은 타고난 이성과 양심을 지니고 있으며, 형제애의 정신에 입각해서 서로 간에 행동해야 한다고 선언합니다. 그러나 아직 이 선언은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자유와 평등한 존엄과 권리를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선언이 등장한 20세기 중반 이전에 수많은 사람들의 투쟁과 노력이 있었기에 그나마 이러한 선언도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60여년이 지난 아직도 인종차별과 성적차별 그밖에 다양한 기준으로 인한 차별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매일 죽어갑니다. 굶어 죽는 사람, 희망이 없어 자살하는 사람,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해 죽는 사람, 전쟁으로 죽는 사람… 뉴스는 매일 이러한 불의에 대한 소식이 전해지지만 우리는 애써 외면하고 우리의 귀를 막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날의 현대 사회를 가장 잘 표현한 표현 중 하나가 “오늘날 우리는 기계같은 인간을 만들어 내고 인간같은 기계를 만들어 낸다.”는 에릭 프롬의 말인 것 같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절대 복종하는 기계같은 인간을 만들어 냅니다.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고 주어진 틀 안에서 반복적인 삶을 사는 기계의 모습, 영화에 등장하는 로봇은 바로 스스로 사고하고 판단하고 선택하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을 투영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옳은가? 무엇을 따라야 하는가? 이런 것들을 생각할 틈을 주지 않습니다. 바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면서 하루 하루가 의미 없이 흘러 가버립니다. 대림절의 주요 주제인 “깨어 있으라!”는 말씀이 어느 때보다 마음을 울리는 시대입니다.
 
세상의 거대한 악을 보면 우리는 너무 초라해 보이고 무력감을 느낄 수 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평화와 정의는 결코 우리가 이룰 수 없는 거대한 벽 너머에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리고 우리는 늘 이런 일들이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생각하지 않고 땅 끝에 있는 일로 여깁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 것도 시작하지 못하고 아무런 일도 시작하지 못한 채 무기력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작은 변화가 시작입니다. 내 주변에 있는 아픔들을 함께 느끼고 그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랑의 표현인 “연대”의 삶을 사는 것이 시작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우리의 변화와 노력은 결코 의미없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를 종종 ‘씨앗’에 비유하십니다. 그것은 보잘 것 없고 미약하지만 결코 그것이 마지막이 아닙니다. 좋은 땅에 떨어질 때, 스스로 썩어질 때 그것은 큰 나무로 자라나고 삼십배, 육십배, 백배의 열매를 맺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이고,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사신 삶의 길이며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믿음의 권세입니다.
 
나는 너희가 내게서 평화를 얻게 하려고 이 말을 한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겠지만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하고 말씀하셨다.
요한 16:33
 
예수님께서는 결코 절망하고 좌절하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은 아직 예수님의 길을 따를 준비가 되지 않았지만 그들을 통해 희망을 보셨습니다. 그들의 능력을 보시지 않고 하느님의 능력을 보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절망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우리 안에 하느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의 방법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복음이 아무런 가치가 없이 여겨지고 세상은 물론이고 나의 삶조차 변화시킬 능력이 없다고 느껴진다면 스스로의 삶을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나는 예수님처럼 세상의 미움과 박해를 두려워하지 않고 하느님과의 깊은 교제를 통해 사명의 길을 가고 있는가? 아니면 삶의 모습은 전혀 우리의 믿음과 다른 길을 가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가 믿음대로 살아갈 때 복음의 능력이 우리의 삶에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의 믿음 역시 우리의 삶의 모습처럼 되고 말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