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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1일, 나팔을 두고 들어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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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제1일 2013년 2월 13일 재의 수요일

나팔을 두고 들어가라

(오늘의 말씀 (마태 6:1-6, 16-21) – 성경을 읽으신 후 아래 묵상의 글을 읽으시길 바랍니다.)

묵상의 글

어떤 면에서 저는 타고난 사순절형 인간입니다. 드라마를 보기 보다는 음악을 듣고, 모임에 가기 보다는 혼자 있는 걸 좋아하고, 사들이기보다는 없애고 정리하는 것을 더 좋아하는 성격이니까요. 그런데 막상 다시 찾아온 사순절이 왜 이렇게 부담스러울까요? 호젓한 시간과 조용한 공간을 무척 선호하는데 '골방에 들어가라'는 말씀은 왜 이렇게 유배명령 같을까요?

호젓한 시간과 조용한 공간에서 나는 집안을 정리하고 책과 신문을 보고 음악을 듣습니다. 그러면서 무난한 일상에 감사하기도 하고 자잘한 회상에 젖기도 합니다. 이런 일상이 내게 주는 효과는 물론 휴식이지만 더 중요한 효과는 자기만족입니다. 나의 의식과 지식과 문화가 탁월하다는 우월감, 사람들로부터 충족되지 못한 인정과 존중을 채우는 각별한 자기애의 시간입니다. 그러니까 따지고 보면 나는 혼자 있는 시간에도 스스로 나팔을 불면서 나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지요.

사순절을 시작하면서 '골방'이 자꾸 신경 쓰이는 이유는 나의 호젓한 여가가 보시는 바와 같이 결코 골방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진짜 골방에 가서 나팔을 내려놓고, 미안하고 부끄럽고 미숙한 모습을 좀 들여다보라고 눈치를 주기 때문이지요. 진짜 골방에 가서 나팔을 내려놓고, 미안하고 부끄럽고 미숙한 모습을 좀 들여다보라고 눈치를 주기 때문이지요. 이제 이런 나를 내려놓고 그 위에 주님의 단련과 위로가 부어질 때까지 좀 기다려 보라고 말입니다.

사순절 기간 동안 금식을 한다거나 커피를 줄이겠다는 장담은 못합니다. 그래도 그건 주님이 눈감아 주실 것 같네요. 그러나 '골방 타임'에 대해서는 압력이 느껴집니다. 이제 그럴 나이가 됐다고, 신앙의 무게가 너무 가벼운 거 아니냐고 자꾸 신호가 와서요.

두려운 골방 앞에서 사순절을 시작합니다. 골방 문을 열려니, 머리를 맴도는 번잡스런 상념, 만족을 찾은 수 많은 대상과 관계에 내가 얼마나 집착하고 아까워하는지 보게 됩니다. 이제 문을 열고 들어가서 어찌됐건 주님을 뵈어야겠습니다. 사순절 에피타이저가 이렇게 씁쓸한 걸 보니 골방은 정말 내 몸에 보약인가 봅니다.

오늘의 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이제 새로운 마음으로 사순절의 여정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사순절 기간동안 매일 골방에 들어가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나눌 수 있도록 저를 도우시고, 제 마음이 온전하게 주님을 향하도록 저를 이끌어 주소서. 아멘.

대한성공회 교육훈련국 '2013년 사순절 묵상집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