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말씀과 신앙나눔 사순 3주일 대전주교좌교회 주임사제 오동균 신부 설교 – 삶과 죽음을 통해 이룩하는...

사순 3주일 대전주교좌교회 주임사제 오동균 신부 설교 – 삶과 죽음을 통해 이룩하는 새로운 성전

394
0
공유

2015년 3월 8일 사순 3주일 대전주교좌교회 주임사제 오동균 신부의 설교입니다. 본 자료는 성사모카페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http://cafe.daum.net/anglican-church

예수님의 성전정화사건을 떠올리면 나 자신에 대한 정화가 얼마나 중요한지 먼저 생각하게 됩니다. 저의 고교시절의 어느 날 성전정화사건에 대한 말씀을 접하면서 온 몸이 뜨거워지는 체험을 하였습니다. 당시 저는 열정으로 가득 차 있어서 성공회의 분위기와 대부분의 것들이 개혁의 대상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선배님 한분이 저에게 ‘지나치게 뜨겁고 열정적이다.’ 라고 경고해 주었습니다. 또한 만도 중 성경봉독 시간에 이사야서를 강한 어조로 선언하듯이 읽었더니, 신부님께서 너무 감정적으로 성경을 읽지 말라고 경고를 보내셨습니다.

당시에 저는 감성과 열정이 혼합되어 혼란스러웠고, 교회개혁이 마음에 들지 않자 사회개혁운동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전도사, 부제, 사제 서품을 받으면서 열정은 사라지고, 시골교회에서 목회를 하면서 도무지 기운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감정을 다 소모해버린 것 같았습니다. 3-40명의 교인들과 미사 드리고 나면, 우거진 숲속에서 새소리만 들렸습니다. 흥이 나지 않아 뛰쳐나오고 싶은 심정이었지요. 끊임없이 추락하면서도 할 일은 열심히 했습니다만, 전과 같은 열정의 불이 좀처럼 붙지 않았습니다. 차가운 이론들에 대해 환멸을 느꼈고, 미국 유학까지 다녀와서도 어떻게 해야 할지 방황하면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피정을 가게 되었고, 기도하던 중, 그동안 타오르는 열정 속에서 타인들을 향해 외쳤던 제 목소리는 하느님이 저에게 하신 준엄한 경고였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내가 스스로 정화되지 않고는 세상을 정화시킬 수 없다.”는 진리는 매우 당연한 것임에도 한참 뒤에야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 때부터 저는 하느님께서 나를 정화시키시는 만큼 제가 교회 일을 할 수 있고, 이끄시는 만큼만 제가 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때부터 ‘내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것들조차 모두 하느님과 상의하고 배워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옛 성인들도 예수님께, 하느님께 배워야겠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뒤늦게 깨달았지만, 내 자신을 정화시켰더니 그동안 온통 쓰레기로 가득 차 있어서 오도 가도 못한 채 있던 내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성전을 지키는 주인이랍시고 교인들을 평가하고 탓하면서 마치 성전의 환전상과 같은 모습이었던 제 자신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지키는 사제 그리고 심지어는 오래된 성공회 신자들도 자칫하면 환전상과 같은 모습으로 변할 수도 있겠다고 느꼈습니다. 지성소에는 들어가지 않고 교회 뜰 안에서 머물면서 교회출입구를 막아, 하느님이 생각나서 들어오는 이들을 방해하면서 마치 교회를 지키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생각해 볼 수 있는 사건이 예수님의 성전정화사건입니다. 즉, 내가 정화되지 않으면 어떤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사건이지요. 이 사건은 최초의 마태오, 마르코, 루가, 요한복음에도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흠 없는 제물을 준비하여 일 년에 한번 이상 지성소를 들러야 했습니다. 그런데 흠 없는 제물을 준비하는 어려움을 덜기 위해 성전에서 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성전에서 짐승을 키워서 파는데, 이를 사는 사람은 성전 돈으로 환전하여 사야 합니다. 현대의 시장경제를 움직이는 거대한 커넥션처럼, 당시에는 이런 것들이 비즈니스 시스템으로 굳어져 제사장들을 포함한 종교인들이 다 연루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교회를 지배하면서 오염된 교회에는 하늘 양식은 다 떨어지고 육의 양식만 넘쳐나게 되었던 것이지요. 이것을 어떻게 개혁할 것인가? 예수님은 성전을 뒤집어엎었습니다. 초대교회에서 예수님이 성전을 뒤엎었던 사건을 중요하게 다루었던 것은 이러한 잘못된 시스템을 뒤엎으라는 메시지였던 것입니다.

당시 유대지역에서 반로마반란이 끊임없이 일어났고, 서기 60년경에 시몬이라는 지도자의 지휘 하에 큰 전쟁으로 번졌으나 바로 진압 당했고 그 후에도 반란은 계속되었지만 AD 70년 로마군은 예루살렘을 정복하여 성전을 완전히 파괴하였습니다. 이러한 치욕적 사건 속에서 그리스도교 교인들은 마르코 복음을 기록하였고, 그 후 마태오복음과 루가복음, 그리고 40년 후 요한복음도 기록하였습니다. 이러한 복음서들에서 모두 성전정화사건을 기록한 이유에 대해 깊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유대교나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성전은 마음의 고향인데, 이것이 파괴되어 없어져 버린 상황에서 예수님의 성전정화사건을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실은 건물로서의 성전보다는 우리 마음속에 축조되어야 하며 그 성전이 과연 온전하게 존재하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하느님과 만날 마음속의 성전이 세상사의 여러 이유로 축조되지 않았다면, 하느님과 만날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초대교회 교인들이 중요하게 생각했던 문제입니다. 이미 파괴되어버린 건물로서의 성전이 아니라 하느님과 만나는 마음속의 지성소를 간절히 원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지 40-60년이 지난 다음, 예수님 제자 중에 가장 젊었던 요한만이 유일하게 생존해 있던 시기에, ‘내 나름대로 살 것인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힘으로 살 것인가?’ 택해야 하는 중대한 기로에 서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로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힘과 능력으로 여기고 살아가는 것이다.” (1고린 1:18-25) 라고 선언하였습니다. 성전정화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준엄하고 심각한 사건’으로써의 메시지를 다시 한 번 돌이켜 생각해 봐야 합니다. 내 마음속에 성전을 건립하여, 내 자신을 정화하고, 3일 만에 부활하심으로써 성전을 다시 지으신 예수 그리스도처럼 내 자신이 부활하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선교 50주년을 맞아 전도하자’는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고 있지만, 어떤 테크닉으로 전도하는 것은 무리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다음 주에 전도 세미나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어떤 분을 모셔 놓아도, 전도할 수 있는 특별한 방법을 전수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전도하기 위해서는 내 자신이 준비되어야 하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변화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데려다 앉혀 놓아 봐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내가 먼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성전정화사건을 우리 마음속에 새겨, 예수그리스도의 길을 걸어가면 우리를 따라오는 사람들이 하느님의 성전을 채울 것이고, 이 세상을 정화시켜 변화시킬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가면서 많은 장애물과 상처가 수반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이라고 생각하고 굳세게 헤치고 나간다면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부활의 길이 열릴 것입니다. 우리를 따라오는 사람들이 성전을 채우고, 세상을 정화시켜 변화시키는 일은 우리의 첫발자국에서 시작될 것입니다. 

그 한걸음이 시작되는 사순절을 보내시기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X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