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말씀과 신앙나눔 사순 5주간 금요일 정오성찬례-이경호(베드로) 신부 설교

사순 5주간 금요일 정오성찬례-이경호(베드로) 신부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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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327(사순33/사순 5주간 금 /) 성서말씀

예레 20:10-13 / 시편 18:1-6 / 요한 10:31-42

 

 

화요일 아침 수녀원 정원에서는 노오란 수선화와 연분홍 진달래꽃이 활짝 피어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차를 타고 오는데 안양천에 노란 개나리가 흐드러지게 피었더군요. 밝아오는 여명과 함께 노란 개나리꽃들이 손을 흔들며 환호하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렇게 많은 꽃망울을 터트리는데 너무도 조용하게 소리 소문 없이 피어나는 꽃들의 모습을 보면서 이런 저런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들은 자신이 한 일이나 아주 작은 성과에 대해서도

다른 사람이 알아주기를 원하고, 몰라주면 섭섭해 하는데

꽃들은 그렇게 많은 꽃망울을 터트리면서 너무도 조용히 소리 소문없이

그 놀라운 일들을 해내는 모습에 저 자신을 부끄럽게 생각했습니다.

오늘로써 사순절 33일째를 맞이합니다.

2015년 사순절도 이제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습니다. 남은 기간도 서로 격려하며 함께 이 길을 가시길

 

요한복음을 읽고 있으면 우리 주님은 치고 빠지기의 명수처럼 보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때마다 매번 유다인들의 심기를 건드려 불편하게 하십니다.

그럴 때마다 유다인들은 몹시 화를 내고, 잔뜩 독이 오르면 예수님은 슬쩍 갈릴리로 피하셨다가는 잠잠해지면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기를 반복하십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사람들 사이에는 예수님에 대한 서로 다른 이해로 의견이 분분하고 논쟁이 일어나곤 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향해서 미쳤다고 말하거나 마귀 들렸다고 말하는가 하면, 당신이 그리스도라면 좀 더 분명하게 그렇다고 말해 달라는 요구도 합니다.

 

요한복음 10장은 이런 다양한 요구들에 대해서 예수님이 자신이 여러 가지 상징과 비유를 통해서 당신이 누구신지를 밝히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목자와 양의 관계를 말씀하시면서 나는 양이 드나드는 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문은 안과 밖을 연결시켜 주는 통로이고 경계입니다.

그 문은 구원을 가져다는 주는 문이고, 그 문을 통해서 하느님의 풍성한 생명을 누리도록 합니다. 그 문은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영역으로 통하는 문이며, 우리를 내면 깊은 세계로 인도하는 문이기도 합니다.

 

이런 상징적인 의미에서 문이신 주님을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과 더 깊은 관계를 맺으며 더 성숙하고 더 온전한 관계를 맺으며 더 사랑이 깊고, 더 깊은 생명의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나는 착한 목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목자는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바칩니다. 그 목자는 양들을 알고 양들도 그 목자를 압니다.

그런데 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에 내 목소리를 알지 못하고, 내 말을 믿지 않는다는 말씀도 하십니다.

 

이렇게 나는 문이다.” “나는 선한목자이다.” 라는 말씀을 통해서 양과 목자의 상호관계성을 말씀하신 후에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라고 말씀하시자 유다인들은 돌을 들어 예수님을 치려고 했다는 것이 오늘 복음입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참 놀라운 통찰이고, 고백이며, 선언입니다. 어떻게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었을까?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

 

이 말씀은 당시의 유다인들에게는 매우 충격적인 말씀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알고 있는 예수님,

그들의 눈에 비친 예수님은 별로 신기하거나 뛰어난 분이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출생, 고향, 그의 부모와 형제들을 알고 있고. 이 모든 것들은 너무도 평범했고, 그들이 좋아하거나 존경할만한 내용이 전혀 없습니다. 이런 이유로 인해서 그들은 예수님을 신성모독자로 규정하고

죽이려는 태도는 그리 놀랄 일도 아닙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이 말씀을 어떤 의도로 하셨을까요?

예수님의 이 말씀은 이 내 가슴에는 아버지의 마음인 사랑의 마음으로 가득 차 있다. 나의 마음에는 내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그런 하느님의 마음인 사랑의 마음으로 충만하다”는 고백이지요.

이 말씀은 이 내 마음에는 선한 목자이신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 즉 양들에게 좋은 꼴을 먹이기 위해 푸른 풀밭으로 인도하고, 좋은 물을 먹이기 위해서 위험을 무릎쓰고, 때로 사나운 짐승들과 목숨을 걸고 싸우며 양들을 지켜내며 양들을 돌보신 선한 목자이신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으로 양들을 돌보셨듯이, 나는 그런 사랑의 마음으로 병자들을 돌보고,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사랑의 식사를 나누며, 이방인들,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차별과 편견 없이 돌보신 사랑의 마음으로 충만하다. 그런 사랑의 마음에 있어서 주님의 마음과 하느님의 마음은 하나라는 것이지요.

 

주님이 발견한 이 사랑의 마음이 바로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이고 사랑인데 사랑의 마음에서 우리는 하나가 되었다는 고백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버지와 나는 하나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은 매우 상징적이고, 신비적인 관계성을 표현하신 비유의 말씀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향해 돌을 들어 죽이려 했던 이유는 분명해집니다. 그것은 유다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문자주의방식으로만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이렇게 문자주의 방식으로만 이해하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관계의 신비, 상징과 신비 차원 속으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개별적인 나, 홀로 살아가는 나로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당신의 삶, 당신의 사역, 당신의 소명을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생각하셨고, 그 하느님 안에서 당신 자신의 삶을 성취하는 길은 무엇인지를 성찰하셨습니다.

그런 생각과 성찰은 참으로 놀랍게도 인간의 몸을 입으신 그 분의 몸 안에 창조주 하느님께서 성육신 하셨고,

그 분이 하시는 일 안에서 하느님의 뜻이 하나가 되셨으며,

하느님의 영인 성령 역시 예수님의 삶 안에서 온전한 합일을 이루었노라고 선언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신학적인 설명이 아니라 당신 자신의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깨닫고 체험된 일이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하느님 안에서 깨닫고 발견한 삶이었습니다.

그런 깨달음을 경험하신 주님은 우리들에게도 그런 삶이 가능하다며 그 삶으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아버지와 내가 하나이듯이 우리 역시 그 예수님의 삶의 방식, 사랑의 삶을 통해서 주님과 하나가 될 수 있으며, 그런 사랑의 삶을 통해서 그 하느님 아버지와 하나가 되는 은총의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 주님의 가르침입니다.

그것은 바로 당신께서 십자가의 죽음으로 살아내셨던 삶으로 하느님 안에서 참 사랑의 삶, 참 생명의 삶, 진리이신 하느님 안에서 어떤 자신의 존재를 발견하고,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삶의 방식을 분명히 보여 주신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우리 주님이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이루시려는 궁극적인 삶의 목표이고, 창조주 하느님과 우리가 하나가 되는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는 나에게 거룩한 일을 맡겨 세상에 보내주셨다. 너희는 내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한 말 때문에 하느님을 모독한다고 하느냐? 37 내가 아버지의 일을 하지 않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38 그러나 내가 그 일을 하고 있으니 나를 믿지 않더라도 내가 하는 일만은 믿어야 할 것이 아니냐? 그러면 너희는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될 것이다.”

 

주님은 내가 한 일 = 에르가를 보고 믿어라. 이 말은 나중에 서로 사랑하는 것이 바로 제자의 표라고 말씀하셨고 요한서신은 하느님은 사랑이라고 말씀하신 후에 우리가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사랑의 하느님의 알 수 없다고 강조 합니다.

 

사순절 우리의 사랑이 더욱 깊어 져야 할 때입니다. 주님은 우리 모두를 사랑의 삶으로 하느님의 아들이 되는 길, 주님의 참 제자가 되는 길, 아버지와 주님이 하나가 되듯이 하느님 아버지와 우리가 하나가 되는 은총의 삶으로 초대하십니다. 이 사랑의 삶으로의 부름과 초대에 오늘 우리는 어떻게 응답하시렵니까? 예수님의 살과 피인 성찬을 우리의 몸으로 모시면서 그 초대에 응답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