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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소명을 발견하는 곳,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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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소명을 발견하는 곳, 교회

이주엽 신부(프란시스∙살림터)

어느 교회에서 ‘하느님 체험’이라는 주제로 특강을 해달라는 요청이 있었습니다. 새삼 생각해 보았습니다. 인간의 광범위한 체험 중에 어떤 것을 일러 하느님 체험이라 할까 하고 말입니다. 한편으론 그 교회의 구성원들이 대개가 4~50대의 중장년층이라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그 연령대가 대다수 교회의 몸통에 해당되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중년의 위기’라는 주제가 덩달아 떠올랐습니다. 4~50대의 80%가 중년의 위기를 경험한다고 하지요. 그렇다면 이 연령대에게 신앙생활을 통해 하느님을 체험한다고 하는 것은 두 주제를 섞어 숙고해 봐야 할 과제라 여겨졌습니다.
단순히 기도 중의 신비체험이나 현상만을 놓고 하느님 체험이라 말해야 할까요? 또 정서적으로 뜨겁고 고양된 경험에 동그라미를 치고 그걸 하느님 체험이라 한정해야 할까요? 교회 안에 그런 관점이 돌아다닌다는 것도 알고 또 그런 특정 경험들을 하느님 체험에 포함 못 시킬 바는 아니지만 그것만으로는 뭔가 석연치가 않습니다. 무엇보다 성서의 증언과 일치하는 관점인지 미심쩍습니다. 그래서 성서에서 ‘하느님’과 동의어에 해당되는 것을 살펴보기로 해봅니다. 그랬더니 요한복음 4장 24절에 매우 깔끔한 정의가 나옵니다. 곧 “하느님은 영이시다”라는 말씀입니다. 공동번역은 좀 더 풀어서 ‘하느님은 영적인 분’이라 했습니다. 그러니 우선 하느님 체험은 곧 영적 체험을 이르는 것이라고 정리해 볼 수 있겠습니다.
그 다음 귀 기울여야 할 성서의 증언은 요한1서 4장 16절입니다. 요한은 ‘하느님은 사랑’이시라고 밝힙니다. 하느님은 사랑을 소유하고 있다거나 하기도(혹은 안하기도) 하는 그런 분이 아니라 사랑 그 자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구절은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있는 것’이라 잘라 말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 체험이란 곧 사랑의 체험이란 말로 옮길 수 있는 것이 성서의 증언이라 하겠습니다. 이렇게만 봐도 벌써 하느님 체험을 기도나 피정 중의 일상적이지 않은 체험, 혹은 뜨겁고 열광적인 정서적 상태에만 국한시키는 것이 얼마나 성서의 포괄적인 관점과는 거리가 먼 것인지 짐작할 수 있게 됩니다.
하느님 체험은 곧 영적인 체험이요, 사랑의 체험을 이름이다. 이 정도로 잠시 놔두고 ‘중년의 위기’ 얘기를 좀 해 보기로 하지요. 감기는 열이 나고 두통, 콧물 등의 증상이 따르듯 이 위기에도 증상이 있습니다. 갑자기 모든 게 허무하게 느껴지고 이전에 그렇게 중요하던 것들도 다 헛헛해집니다. 한 집에 사는 가족들도 다 남들 같고 심지어 자다 일어나 “이들이 누구지?” 하고 들여다 볼 때가 있습니다. 사는 게 허무하고 뭔가 잃어버렸다는 상실감이 깊이 느껴집니다. 그런데 이런 허무와 상실감을 느끼며 우울해 하는 사람들이 사회 부적응자가 아닙니다. 이제까지 건실하게 사회생활을 해왔던 사람들인데 그런 상태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지금 교회의 중심층이라 할 4~50대의 중장년층 80%가 이런 위기를 경험한다면 신앙생활이든 영성이든 거기 응답하는 것이 교회에서 하느님 체험을 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사실 이 연령대에게 신앙생활이 큰 힘이 못 될 때가 많습니다. 그동안 교회 문턱을 제법 밟다보니 신앙생활에 대해 알만큼 알게 되고 새삼 은혜로울 게 별로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 안에서 나름 신분상승을 꾀하고 인정받고 군림하는 문제만 남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세상과 다를 바 없이 경쟁과 게임에 몰두하게 되는 셈이지요. 이 과정에서 인간적인 갈등이 필연 등장하게 되어 있고 교회마다 그런 상처 한 둘쯤 안 갖고 있는 교회가 없어 보일 지경입니다. 무엇보다 세상과 다를 바 없는 경쟁과 정치놀음을 교회에서도 해야 한다는 사실에 신앙적 회의를 느끼게 됩니다. 그러다보니 교회라는 곳이 도무지 신비를 상실한 속된 곳처럼만 보입니다.
중년의 위기는 새로운 소명감을 찾음으로써 극복하는 것이라 합니다. 차라리 죽는 것이 좋겠다던 로뎀 나무 아래 엘리야가 후계자 양성의 새 소명을 받아 들고서야 깊은 우울의 늪에서 벗어납니다. 교회는 중장년층이 속됨에 떨어지지 않을 새 소명을 발견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새로운 소명이란 뜬금없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자신을 진정으로 통합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초월은 늘 품어서 넘어서는 것이지 우회하거나 도려내어서 건너뛰는 것이 아닙니다. 중년의 우울이란 자기 내면의 헐벗은 어린아이를 더 이상 숨길 수 없기 때문에 벌어지는 것입니다. 젊어서는 찬란한 이상이나 열정으로, 온갖 목표와 성취로 내면의 깊은 수치심을 가릴 수 있을 것처럼 살았습니다. 하지만 나이 먹어 세상이 뜻 같지 않고 육체도 쇠퇴하고 심리적으로도 위축되면 가리개들이 부실해집니다. 벌거벗은 아담과 하와의 수치를 가렸던 나뭇잎이 말라비틀어지듯 말입니다.
이때 필요한 치유의 과정을 대충 적어본다면 이러합니다: 1) 솔직히 자신의 상처와 포장을 노출해도 좋을 사람들과의 관계망 혹은 공동체 2) 스스로 자신의 어둠과 상처, 모순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고 인정하고 끌어안기 3) 기억의 치유와 내면의 부정적 비난의 목소리 멈추기 4) 무엇보다 기도와 묵상을 통해 내면의 안식을 주고 이를 통해 내면의 밝은 자화상이 등장해 부정적 자화상을 대체하게 하는 훈습 등 입니다. 사실 성서와 묵상, 교회의 전례는 다 이러한 치유와 통합, 초월의 과정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이는 자기를 있는 그대로 온전히 사랑하게 하는 과정이며, 자신과 화해하게 하는 과정이고, 그래서 지금까지의 자신을 초월하게 하는 과정으로 영적 체험이자 사랑의 체험이요 곧 하느님 체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