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박태식의 함께 사는 이야기 먹거리에 대한 성서의 가르침

[생활] 먹거리에 대한 성서의 가르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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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힙니다

-먹거리에 대한 성서의 가르침-
박태식신부(성공회 장애인센터 ‘함께사는세상’ 원장)
  

무엇을 먹을까?

  
광우병 논란이 요란했던 적이 있습니다. 게다가 그 논란이 식지도 않았는데 서둘러 미국과 소고기 수입 협정을 맺는 바람에 급기야 광화문에 컨테이너 장벽을 쌓았던 역사까지 있습니다. 아직 확실한 광우병의 원인이 밝혀진 것은 아니지만 보다 나은 발육을 위해 먹인 동물성 사료가 원인일지 모른다는 가능성이 조심스럽게 제기 되었던 기억이 납니다. 소라는 짐승은 원래 초식동물인데 육식, 그것도 동족의 시체를 갈아 먹였으니 뒤탈이 없을 리 있겠느냐는 뜻입니다. 자연 법칙을 정면으로 거스른 까닭입니다.
  
흔히 20세기가 낳은 최악의 질병으로 에이즈가 거론됩니다. 그러나 에이즈에는 성性적으로 문란한 사람들에게서 일차적으로 발생하는 병이라는, 다분히 윤리적인 이유가 붙어 다닙니다. 적어도 돌을 던질 데는 있는 셈이지요. 그러나 음식물로 생기는 병은 다릅니다. 아무리 도덕군자라 한들 고기 몇 점 잘못 먹으면 얼마든지 걸릴 수 있습니다. 우리의 두려움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요즘 언론 보도에 이틀이 멀다않고 나오는 소식이 있습니다. 누군가 돈에 눈이 먼 자들이 음식물로 장난을 치는 바람에 온 국민의 건강이 위험에 처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식당에 가도 이것이 과연 양잿물에 무게가 부풀려졌던 전력이 있는 다슬기 된장찌개인지, 방사능 바닷물을 타고 일본에서 건너온 낙지 연포탕인지 의심이 갈 수밖에 없는 노릇입니다. 하지만 어색한 분위기를 깨뜨리며 숟가락을 드는 용감한 친구가 언제나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은 늘 같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뭐는 안심하고 먹을 수 있겠어. 죽기 아니면 살기지!”
 
  
자연법칙에 따라
  
이스라엘의 역사를 대변하는 구약성서에 이른바 ‘음식규정’이라는 것이 나옵니다. 레위기 11장입니다. 거기에는 사람이 먹어서 안 되는 부정不淨한 짐승들이 나열되는데, 우선 네 발 짐승 가운데 굽이 갈라지지 않고 되새김질하지 않는 짐승은 먹을 수 없다고 합니다. 따라서 굽이 갈라지고 되새김질 하는 소, 염소, 양은 먹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낙타와 토끼는 새김질은 하지만 굽이 갈라져 있지 않으니 먹을 수 없고, 돼지는 비록 굽은 갈라졌지만 새김질을 하지 않으니 먹을 수 없습니다. 서민들의 다정한 친구인 삼겹살구이는 이스라엘에 당연히 없는 겁니다.
  
그런가 하면 바다든 강이든, 물에 사는 짐승들 중에 지느러미와 비늘이 없는 것은 부정한 음식물로 치부합니다. 스스로 꿈틀거리면서 초고추장을 묻히고, 목구멍을 넘어가면서도 묘한 여운을 남기는 산 낙지 요리를 유대인의 식탁에서 절대로 만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사정이 그 정도니 혹시라도 일수日數 사나운 낙지나 오징어가 유대인 어부의 그물에 걸렸더라도 잘하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테지요. 또한 유대인들은 짐승의 피도 먹지 않습니다. “피에는 모든 생물의 생명이 들어 있다.”(레위기 18장 7절)고 간주해 짐승의 살 중에서도 피는 샅샅이 뺀 살코기만 요리를 합니다. 이쯤에서 “콩나물 듬뿍 넣고 끓인 다음 고춧가루를 맘껏 뿌려서 선지국 한 그릇 비우면 해장엔 그만인데.”라는 생각을 하시는 독자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분은 이스라엘 식당에 가능하면 안 가시는 게 바람직합니다.
  
사실 이렇게 늘어놓으면 무엇인가 원리를 찾아가며 건강식을 드시려는 분들에게 혼란만 가중시켜 줄지 모릅니다. 성서에는 두서없이 부정한 음식물만 열거했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 조금 심각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구약성서에는 비단 부정한 음식뿐 아니라 요리 방법에도 눈에 띄는 규정들이 있습니다. 출애굽기 23장 19절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옵니다. “또 새끼 염소를 그 어미의 젖에 삶아서는 안 된다.”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고기를 삶아서 먹습니다. 그러나 물이 귀한 탓에 종종 짐승 젖에 삶기도 하는데 새끼 염소를 삶을 때 절대로 그 새끼가 먹고 자란 엄마 젖으로 삶지 말라는 충고입니다. 그런가 하면 레위기 23장 3절에는 도살을 할 때 “소나 양을 그 새끼와 같은 날 잡지 말라”고도 합니다. 두 가지 규정 모두 새끼와 어미 사이의 정情을 모질게 대하지 말라는 뜻이겠지요.
   
유대인들의 주식은 예나 이제나 빵입니다. 성서 시대에 빵을 굽는 화덕은 마치 에스키모의 이글루처럼 반구형의 공간 안에 배치되어 있었고, 공간의 내벽에는 소금이 두껍게 발랐습니다. 이는 화덕에서 나오는 복사열을 이용하려고 취한 조치로 한 삼 년쯤 지나면 소금을 훑어낸 후 새 소금을 발라줍니다. 이 때 내버린 소금의 맛을 보면 짠맛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언젠가 “만일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만들겠느냐? 그런 소금은 아무 짝에도 쓸 데 없어 밖에 내버려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마태복음 5장 13절) 라는 말씀을 한 적이 있는데, 여기서 ‘짠맛을 잃은 소금’이란 상징이 아니라 실생활을 반영합니다.  
   
빵을 굽는 주 연료로 말똥, 소똥, 개똥이 쓰였으며 건조한 사막 기후에서 쉽게 마르는 바람에 양질의 불꽃을 냈습니다. 사실 우리나라에서도 소똥을 연료로 쓰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그리 보편적이지 않습니다. 대기 중에 습기가 많아서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서는 만일 빵을 인분人糞으로 구우면 부정한 음식물이 되고, 누군가에게 지독한 벌을 내릴 때면 인분으로 구운 빵을 먹였습니다(에제키엘서 4장 10-15절).
   
앞에서 살펴본 대로 구약성서의 음식규정을 통해 어딘지 꺼림칙한 구석이 있는 음식물을 멀리 한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어미젖에 끓인 새끼라든가, 같은 날 잡은 어미와 새끼, 그리고 인분 구이 빵 등은 반드시 피해야 할 음식이었습니다. 바로 가족과 관련되거나 동족의 희생을 담은 음식물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광우병의 원인이 동물성 사료라면 엄청나게 부정을 탄 음식물임이 분명합니다.
 

감사함으로

 
성서에 나오는 유대인들의 식사 예법을 살펴보면 음식물에 대해 또 한 가지 중요한 암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여러 사람이 모여 만찬晩餐을 나눌 때 정해진 순서가 있습니다. 우선 식전에 한 움큼의 물로 손을 씻습니다. 그리고 전식으로 포도주나 물이 담긴 첫 잔을 돌리고 ‘찬양의 말’을 합니다. 만찬 주례는 그 집의 주인이 하니까 찬양의 말도 집주인의 몫입니다. 중식으로 주례는 빵을 들어 찬양의 말을 한 다음 둘러앉은 이들에게 손으로 떼어 나누어줍니다. 찬양의 말은 다음과 같습니다. “주님이신 우리들의 하나님, 당신을 찬양합니다. 세상의 왕이신 분, 당신은 땅에서 빵을 내셨습니다.”(『바빌론 탈무드』 브라콧 35a) 빵을 나눌 때 주의할 점은 절대로 도구를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내신 귀한 음식물이라 반드시 정성스레 손으로 떼어야 합니다.
  
이제 후식으로 갑니다. 후식으로는 포도주를 한 잔 그득 담아 돌려가며 마십니다. 이  때는 손님 중의 하나가 일어나 잔을 들어 찬양의 말을 하는 까닭에 일명 ‘찬양의 잔’이라는 별명이 붙어있습니다. 그로써 만찬이 끝이 납니다. 절기에 따른 만찬 때는 그 과정이 훨씬 복잡해집니다. 과월절 만찬만 해도 7단계로 나누어지며 각 단계마다 주례가 이 음식물을 먹게 된 유래를 젊은 세대에게 설명합니다. 출애굽 사건을 통해 이스라엘을 고통의 세월에서 구해내신 하느님의 놀라운 역사를 길이길이 후대에 남기려는 의도입니다.  
  
공동식사의 전체 과정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면 무엇이든 음식물을 들기 전에 반드시 찬양의 말을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음식물을 내주신 하느님께 입으로 드리는 감사의 행위입니다. 그래서 만찬 뿐 아니라 보통 음식물, 심지어 음료수를 마실 때 하는 기도도 따로 정해져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이가 나무 열매를 먹을 때면 다음과 같은 기도를 바칩니다. “나무 열매를 창조하신 세상의 왕, 주시여! 찬양을 받으실 지어다.” 골무에 담은 것보다 좀 더 많은 양의 포도주를 마실 때는 “포도 열매를 창조하신 세상의 왕, 주시여! 찬양을 받으실 지어다.” 빵이나 땅의 열매(곡식)를 먹을 때는 커다란 올리브 열매를 먹을 때보다 더 큰 소리를 내어 “땅의 열매를 창조하신, 빵을 만들어 내게 하신 세상의 왕, 주시여! 찬양을 받으실 지어다.”고 찬양해야 합니다(『미슈나』, 브라콧 4,1). 사실 유대인들은 매사에 하느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식사 때는 물론이고, 회당 예배 때 드리는 기도(‘셔마 이스라엘’, 18조 기도문), 이사할 때, 새 집을 지을 때, 안식일이 끝날 때에 바치는 기도 등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음식물을 결코 배고픔을 달래주거나 영양 보충의 대상으로 치부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빵 한 조각, 포도주 한 잔에서도 하느님의 섬세한 돌보심을 깨달으려 노력했습니다. 날아가는 새 한 마리나 들에 낀 잡꽃 한 송이나 길에 차이는 잔돌 하나에서도 하느님의 섭리를 읽어냈던 예수님이 연상되는 대목입니다(마태오복음 7장 25-34절; 루가복음 19장 38절).
   

더럽혀진 음식, 더렵혀진 몸

   
예수님 이야기를 좀 더 해보겠습니다. 예수님이 죄인들과 어울렸다는 사실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알 겁니다. 하지만 죄인들과 어울림이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였는지 정의내리기는 쉽지 않습니다. 죄인처럼 살았다거나, 죄인을 위해 한평생 바쳤다거나, 죄인을 차별하지 않았다 하는 식으로 간단히 치부하기엔 예수님의 포용력과 확신이 끝 간 데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죄인과 관련된 본문으로 “인자가 와서 먹고 마시니까 ‘보아라,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로다’하고 여러분은 말합니다.”(루가복음 7장 34절)가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자신에 대해 얻어들은 주변의 평가를 직접 입에 올린 것으로 상당한 역사적 신빙성을 가지는 내용입니다. 틀림없이 이런 식으로 비하하는 별명들은 예수님의 적대자들이 붙였을 텐데 적수들의 눈매가 오히려 매서운 법입니다. 이제 그 별명들을 얻기까지 과연 무슨 일이 있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느 날인가 예수님이 사람들과 어울려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꼿꼿한 삶으로 유명한 바리사이와 율사들이 시비를 걸었습니다. “저 사람은 어째서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마르코복음 2장 16절) 마침 예수님이 먹보에 술꾼이자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서 자신의 모습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던 모양입니다. 그들의 관심을 언뜻 살펴보면 의인인 예수님이 죄인들과 한자리에 앉아 식사하는 모습을 책망한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날에도 유대인 가정에서 이방인을 초대해 한 상에 둘러앉아 식사를 나누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문제는 어느 집에서 먹는가에 있습니다. 앞에 거론한 율법의 음식규정에 보면 먹을 수 있는 음식과 없는 음식이 분명하게 구별됩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먹을 것 못 먹을 것 가릴 여유가 있는 의인들의 경우고 흔히 죄인들로 분류 되었던 하층민들이나 주변부 사람들은 이것저것 따질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산 입에 거미줄 치지 않으려면 돼지고기라도 먹을 수밖에요.
   
예수님이 식사를 하신 곳은 죄인의 집이었습니다. 그리고 종교지도자들은 그 집에서 예수님에게 대접한 음식이 혹시 부정하지 않은지 의심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았을 테고 예수님이 어떤 망설임도 없이 돼지고기 한 점을 들고 덥석 베어 물자 기다렸다는 듯이 시비를 걸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유학한 동료의 말을 들어보니 요즘도 상황이 크게 바뀌지 않은 모양입니다. 같은 과의 이스라엘 학생들과 피크닉이라도 갈라 치면 우리가 정성스레 준비한 김밥은 손도 대지 않고 우리 접시에 음식물을 담기도 거북해하고 그저 일회용 컵만 사용한답니다. 아마 김밥 속 소시지의 성분을 못 미더워하고 한국 사람이 준비한 접시 위에 어제 밤 어떤 음식이 놓였을지 몰라 걱정한 것 같습니다.
   
음식물에 대한 예수님의 시원한 입장은 마르코복음 7장 15절에 나옵니다. “사람 밖에서 사람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이란 없습니다. 도리어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힙니다.” 무엇을 먹는가는 중요하지 않고 먹고 나서 하는 행동이 문제입니다. 좋은 음식 먹고 나서 한다는 짓이 고작 패를 갈라 없는 사람 괴롭히고, 위장 전입에, 부동산 투기에, 뇌물 공여에, 자식 군대 빼기입니까? 아무리 자연식을 하고, 아무리 저칼로리로 골라가며 먹고, 아무리 수준 높은 유기농작물을 섭취하고, 아무리 감사의 말을 연발한들 먹고서 나오는 게 더러우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  

   
성서에는 음식물과 관련된 이야기가 헤아릴 수 없게 많이 나옵니다. 성서가 원래 인류 역사와 함께 한 고전이기에 당연한 이치입니다. 하지만 정작 요즘 불어대고 있는 건강식 열풍과 관련해 유익한 정보를 얻기는 어렵습니다. 성서가 씌어졌던 때만 해도 무엇을 먹을까 보다 굶어죽느냐 살아남느냐가 최고의 관심사였기에 하는 말입니다. 그래도 성서 구석구석을 헤집고 다녀보면 길이 보이기도 합니다. 가능한 한 부정不淨한 음식물을 피하고, 언제나 감사의 마음을 잃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점은 음식물로 생명을 이어나가는 인간의 삶입니다. 간단히 말해, 먹는 게 문제가 아니라 사는 게 문제라는 겁니다. 음식물에 관해 알려주신 예수님의 투명한 가르침입니다.    
   
같은 이치를 깨달아서인지 예의 그 용감한 친구는 다시 한 번 “우리나라에서 뭐는 안심하고 먹을 수 있겠어. 죽기 아니면 살기지!”라고 외치며 용감하게 수저를 듭니다. 말은 그렇지만 사실 그 친구도 속으로는 조금 두려울지 모릅니다. 온 나라가 방사능 공포에 휩싸여있는 일본 앞바다에서 오늘 아침 갓 들여온 참치 회를 어떻게 안심하고 먹을 수 있으며 또한 아무리 서울시에서 보장한들 좋다한들 중금속 오염이 염려되는 낙지를 선선히 먹을 수 있겠습니까? 그처럼 노력해도 지울 수 없는 것이 먹거리에 대한 그치지 않는 관심과 두려움입니다. 상황이 정 그렇다면 다음 이야기를 들려주면 됩니다.
   
철학자 데이비드 흄(1711-1770)은 어느 날 아름다운 웰레스 부인을 동반하고 바다로 갔습니다. 그런데 굉장한 폭풍이 바다위로 몰려왔습니다. 겁에 질린 웰레스 부인은 이 철학자로부터 위로의 말을 듣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이 냉정한 철학자는 폭풍으로 배가 좌초되면 반드시 두 사람은 고기밥이 되리라는 예견을 했습니다. “그러면 고기는 도대체 어느 쪽을 먹을까요?”하고 그녀가 물었습니다. 그러자 흄은 간단하게 대답했는데 조금의 위안이라도 얻고 싶었던 부인에게 그의 답은 전혀 도움이 안 되었습니다.
  
“대식가는 반드시 나에게 덤벼들겠지요. 그리고 미식가 놈들은 당신을 물어뜯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