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박태식의 함께 사는 이야기 큰 생각, 큰 인물

[성공회의 미래] 큰 생각, 큰 인물

1011
0
공유

큰 생각, 큰 인물

박태식 신부(성공회 장애인센터 ‘함께사는세상’ 원장)

어제

성공회는 예전부터 필자에게 대단히 매력적인 교파였다. 대학에 다니던 시절에 몇 번 참여한 적이 있었던 신촌교회 미사가 있고, 민주화의 산실이 성공회 대성당이라는 사실도 익히 알고 있던 바고, 후에는 스승 한분이 서강대에서 성공회 대학의 교수로 옮겨가면서 보다 큰 관심을 갖게 되었다. 성공회에 대한 이전의 인상을 몇 가지 추려보면,
우선 자유롭게 신학을 할 수 있는 풍토가 맘에 들었다. 비록 보수적인 그리스도교 진영에선 문제가 될 수 있는 신학이라도 성공회의 공기는 자유롭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중세 봉건시대가 파괴되면서 도시로 대거 유입된 농노들이 ‘도시의 공기는 자유롭다’라고 한목소리로 외쳤던 것처럼 말이다. 실제로 대성당과 여러 지역교회, 그리고 나눔의 집 공동체들에서 수년간 성서강의를 해오면서 역사비평 방법론을 사용해 성서를 강의할 때 교우 청중들의 어떤 거부감도 느끼지 못했다. 개신교와 가톨릭에서 비단 대학 강의뿐 아니라 대중 강연을 15년 가까이 하고 있는 필자로선 성공회 평신도들의 수준을 생각할 때 굉장히 신나는 일일 수밖에 없다.
또한 사제들의 가난이 맘에 들었다. 개신교와 비교할 때 열악한 교세 환경 덕분에 충분한 급여를 받지 못하고, 가톨릭과 비교할 땐 사제들이 가정을 꾸리고 사느라 그만큼 경제적인 압박을 받기 마련이다. 그런데 빈궁할 궁자가 끼기는커녕 오히려 할 말 다하고 사는 자유로움이 엿보였다. 어차피 이렇다 할 종교권력이나 굉장한 부를 못 누리는 처지니 사목에 온 힘을 쏟아보자는 배짱인 듯싶었다. 사제들의 가난이 오히려 사목의 성실성으로 연결될 수 있는 여지를 보여 주었다. 이제까지 만났던 어떤 가톨릭 신부님들과 개신교 목사님들에게서 경험하지 못한 처음 만나는 자유였다.
다음으로 비슷한 규모의 개신교 교파들과 비교할 때 성공회는 놀라우리만치 활력이 넘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다들 아는 이야기지만 대한 성공회 전체 교우들 숫자를 합치면 예장 합동 측의 미니 종파들 중 하나와 견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대외적인 지명도나 명망이나 실제 활동을 보면 상대가 안 될 지경이다. 그래서 성공회에 들어오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교우들의 숫자가 최소한 30-40만이 될 것이라는 추측을 하곤 했었다. 그러나 막상 성공회 식구가 되고 보니 이전에 만났던 몇몇 성공회 신부님들이 교인 숫자를 물어볼 때마다 왜 신비한 미소만 지었는지 이제야 알게 되었다. (실은 요즘 누군가 같은 질문을 내게 던지면 역시 신비한 미소로 답하곤 한다) 이렇게 작은 교세로 그렇게 큰일들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했다.  

오늘

  1. 성공회에 들어오고 나서 알게 된 중요한 특징은 성직자들 사이에서 정체성에 대한 논의가 유난히 많다는 점이다.

    물론 성공회가 어떤 정신을 갖고 있으며 대한민국이라는 상황에서 어떻게 우리의 입지를 지켜나가는가 라는 질문과 고민이 그 바탕이 될 것이다. 특히, 성공회 자체 역사가 만만치 않게 길고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유구한 가톨릭 전통까지 우리 것으로 삼기에 문제의식이 깊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종교 개혁 이후, 그것도 자기 교파와 직접 연결된 개혁자 한 두 사람에게서 뿌리를 찾는 한국 개신교의 정체성 설정과 비교할 때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를 종종 느끼곤 한다.

    전반적으로 대한 성공회는 그 시작부터 이른바 고교회 전통을 갖고 있다고 한다. 과문한 탓에 고교회 전통을 속속들이 파악하진 못했지만 예전을 중시하고 거기에서 자존심을 세워나가는 전통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예전 전통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 성공회 정체성의 중요한 특징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 편 전통적인 예전의 한계를 느껴 교우들에게 보다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신부님들도 많이 만나보았다. 그 분들은 종종 파격적인 설교와 예전으로 전통적인 예전을 중시하는 신부님들을 놀라게 한다. 심지어 열띤 개신교 예배를 연상시키는 감사성찬례로 비쳐지기까지 한다. 자칫 정체성의 위기로 판단할 수 있는 여지가 보인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사실이 있다.

    필자가 만나보았던 신부님들은 예외 없이 저마다 나름대로의 예전 철학을 갖고 있었다. ‘성공회 예전으로 말할 것 같으면…..’이란 말로 입을 열면 누구라도 최소한 한 시간 이상은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있을 정도이다. 그 자체로서 대단히 고무적이다. 이제까지 필자가 만나보았던 가톨릭 신부님들과 개신교 목사님들 가운데 성공회 신부님들 같은 예전 철학을 가진 분들은 별로 없었다. 상당수의 개신교 목사님들은 은혜를 받아 신자들이 아멘과 할렐루야를 합창할 수 있으면 이상적인 예배를 드린 셈이라며 만족을 나타내고 가톨릭 신부님들은 전례신학 교본과 미사경본을 글자그대로 따르는 게 미사의 핵심이라고 주장한다. 지극히 목적지향적인 예배이해이자 지극히 현실안주적인 전례이해이다. 성공회 신부님들은 그렇지 않다.

    김근상 주교님은 어느 신문 인터뷰에서 “세계적으로 성공회에는 교회 내에서 ‘해야 한다고 하지 말라’는 금기가 있습니다. ‘하라, 하지 말라’는 것은 하느님의 영역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어떤 논쟁적인 사안이 있을 때에도 결정을 내리기 보다는 유예하는 경우가 많습니다.”라 했고 대성당에서 치러진 지난 성탄절 특강에서 양권석 신부님은 ‘성공회 신학의 가장 큰 특징은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교회를 넘어서기 위해 존재한다.’라는 렘지 대주교의 말과 ‘성공회는 가장 불완전한 안내자를 따라서 가장 불안한 순례를 하고 있는 공동체’라는 리차드 후커의 말을 인용하면서 성공회의 특징을 ‘겸손한 포괄성’이라는 개념으로 대변했다. 결정의 유예와 겸손한 포괄성은 의미 있는 지적으로 보인다. 같은 맥락에서, 필자는 개인적으로 다양성이라는 말을 선호하는 편이다.

    필자가 파악한 성공회 정체성의 대표적인 특징은 다양성에 있다. 하지만 이는 다양성을 강조하는 주교님의 교서를 발표하여 교구 정책으로 자리 잡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은 결코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기존의 다양한 움직임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자세를 의미한다. 다양성의 원칙 제시가 아니라 다양성의 인정에 성공회 정체성 설정의 참 묘미가 있는 것이다.

  2. 이전에 평신도였다가 이제는 성공회 사제가 된 필자를 보고 많은 사람들이 던지는 질문이 있다. ‘무엇이 달라졌는가?’이다.

    주섬주섬 이런저런 말을 섬기기는 하는데 썩 인상 깊지 않았던 모양이다. 으레 다음 질문이 날아온다. 성공회는 어떤 교파인지 간단하게 설명해 달라는 것이다. 사실 필자는 이 질문에 단호한 대답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히 이야기할 수 있는데 바로 성서와 전통과 이성의 삼중 구조, 그 중에서도 특히 이성에 대한 강조이다.  

    개신교에서는 흔히 성서에 무게를 둔다. 전통이 약하다보니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하다. 하지만 성서의 이해와 해석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수긍할 수 없는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한국 개신교의 90% 이상을 차지하는 보수 교단들의 경우 그런 경향이 더욱 심하다. 예를 들어, 이스라엘에서 자라지도 않는 뽕나무에 자캐우스가 올라갔다는 설교를 즐겨 하거나, 다윗이 지성소에 진설된 빵을 먹었다는 보도에서 아히멜렉 대제관의 이름이 엉뚱하게 에비아달 대제관으로 잘못 기록된 사실을 아예 모르고 있거나(마르 2,26. 1사무 21,1-10 참조), 왜 마태오와 루가의 주의 기도문이 다른지, 그리고 왜 산상설교가 루가복음에선 평지설교로 바뀌었는지 등에 대한 성찰을 하지 않는다. 진실을 외면하고 그저 성서구절을 많이 읽고 쓰고 외우기만 하면 장땡이라는 식이다. 가당치 않다.

    게다가 최근 경향을 보니 개신교 각 교단은 점점 극 보수화 되어가고 있는 형편이다. 심지어 교단 차원에서 신학교 교수들의 사상을 감정하고, 더 나아가 개신교 학회들에선 돈 많은 보수교단의 입김이 날이 갈수록 강해지고 있다. 바울로는 탈혼 상태에서 만 마디를 하느니 차라리 맨 정신에서 다섯 마디를 하겠다고 다짐 한 바 있다(1고린 14,19). 오늘날 한국 개신교에서 이성적인 판단은 거의 사망선고를 받은 상태다.  

    가톨릭에서는 교회를 떠받치는 데 성서와 전통이라는 두 개의 기둥이 있다고 가르친다. 하지만 전반적인 경향을 보면 전통에 무게를 둔다. 예수님에게서 베드로로, 베드로에게서 그 후계자로 이어지는 든든한 교황권의 맥이 가톨릭 안에 흐르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서자에 불과한 개신교 교파들이 비록 목청을 돋우기는 하나 모두 부질없는 소음일 뿐이다. 한국 가톨릭의 경우는 어깨에 너무 힘이 들어가 있다. 적자로서 자부심을 공공연하게 드러내기에 하는 말이다. 공식적으로 가톨릭교회가 개신교는 물론 성공회의 영세마저 인정한 적이 없기에 아직 우리는 가톨릭 미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없는 처지다. 존망의 위기에서 어떻게 해서든지 명맥을 유지하려 안간힘을 쓰는 유럽과 미국 가톨릭교회와 비교할 때 전혀 다른 실상이다.

    남성과 여성 사이에 하등 차이가 없다는 점은 어떤 가톨릭 신학자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여성 사제는 없다. 혼배는 성사다. 그러나 사제의 결혼은 허락되지 않는다. 수사 사제가 있으며 수녀 사제가 있는 것은 상식이다. 그러나 수녀 사제는커녕 수녀님들의 강론마저 불가능한 형편이다. 우리 일을 결정해 주는 고위급 성직자는 우리 손으로 선택해 마땅하다. 그러나 가톨릭은 로마 교황청에서 주교를 낙점한다. 오늘날 가톨릭에서 이성적인 판단은 유보되어 있다.

    현대인은 권위와 권력을 올바르게 구분하지 못하는 지도자엔 거부감을 느낀다. 그보다는 오히려 무엇이든 지도자의 언행이 이해가 되어야 동기를 부여받는다. 지금은 비록 고압적인 자세의 성직자들이 한국 그리스도 교회에서 판을 치고 있으나 결국은 한 계단 내려와 이성에 호소하는 설득이 힘을 얻는 날이 오고야 말 것이다. 우리는 그 때를 미리 대비해야 한다.  

  3. 개신교와 가톨릭과 비교할 때 성공회에는 평신도들의 입지가 매우 높은 편이다.

    평신도들은 주교 선출에서 결정권을 갖고 있으며 놀라우리만치 비판적인 신앙을 보여주고 종종 교회 정책을 선도해나가기까지 한다. 한국 그리스도 교회의 어떤 교단도 이렇지 않다. 사실 성공회에 들어오고 나서 적지 아니 놀랐다. 뭐 이런 교단이 다 있을까? 하지만 양지가 있으면 음지도 있는 법. 평신도들의 수준이 높다보니 성공회 성직자들이 평신도에게 다방면에서 무시당하는 게 현실이다. 때로는 드러나게 때로는 드러나지 않게. 그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존경을 모으는 어떤 사람도 교회에 오면 자원봉사자가 된다. 또한 성심껏 자원봉사를 하면서도 언제나 자신은 충분히 봉사를 하고 있지 못하다는 죄의식에 시달린다. 지난 2천년 동안 그리스도 교회가 유지해온 절묘한 시스템이다. 비록 요즘은 성가대 지휘자나 반주자나 솔로나 교육을 담당하는 강사들이 급여를 받지만 필자가 기억하는 뒤 켠 어느 시절엔 당치도 않은 일이었다. 하느님 앞에서, 하느님께 받은 고운 목청 좀 뽐냈다고 어찌 대가를 받을 수 있단 말인가? 아무튼 자원봉사자들과 그들이 내는 헌금으로 유지되는 체제가 교회이다 보니 교인들은 상대적으로 자신들이 존경할 수 있는, 그리고 자신들보다 수준이 월등히 높은 성직자를 원하는 게 당연한 이치다. 그런데 만일 그 기대를 만족시키지 못한다면……? 우리 앞에 끔찍한 결과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교육 외엔 방법이 없다. 개신교 신학교들과 가톨릭 신학교들에 비교할 때 성공회 신학 교육은 재고할 여지가 많이 있다.

내일

우리가 가진 장점들을 앞에서 거론해 보았다. 자유로운 신학 사고, 가난, 참여, 다양성, 이성, 평신도 등등. 하지만 구슬은 꿰어야 제값을 하고 장점은 살려내야 맛이다.

좀 황당한 발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서품 연도나 나이가 위인 선배 신부님을 후배 신부님이 주임으로 있는 교회나 기관에 보좌로 발령 내면 어떨까 싶다. 그래서 한창 의욕에 차 힘찬 기운을 뿜어내는 시기의 젊은 신부님들을 사목 일선에 세우고, 선배들은 뒤에서 든든하고 현명한 조력자 역할을 하는 것이다. (물론 호봉은 유지하면서 말이다) 대한 성공회가 젊은 교회로 거듭나는 거다.

필자는 사제 서품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까닭에 젊은 성직자들과 비교적 교류가 잦은 편이다. 그들로부터 대한 성공회에 대한 애절한 사랑과 신선한 사목 아이디어와 패기 넘친 열정을 자주 보고 듣고 느꼈다. 아쉽게도 필자는 세월 따라 흘려보내 이제는 짜장 회고만 하고 있는 덕목들이다. 그들은 마치 유리장 속에 갇힌 꽃들과 같다. 그 꽃들이 10-20년 동안 기도 펴지 못한 채 유리에 짓눌려 있으면 스스로 폭삭 시들고 말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아마 2천 년 전 예수님도 유리장 안에 갇힌 꽃들을 보았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같이 어줍지 않은 인물들을 뽑아다가 사람 잡는 어부들로 만들지 않았던가!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 ‘어찌 될지 모르지만 한번 해 봅시다’ 하는 패기. 성공회에 들어오기 전 필자가 성공회 신부님들에게 받았던 인상이다.

앞으로 성직지원자의 숫자가 급격하게 줄어들지 모른다는 우려가 있다. 상당히 심각한 일인데 만일 이런 상태가 지속되면 신부님들이 대거 은퇴하는 10년 후쯤에는 성공회 교회들 앞에 ‘개점휴업’이라는 입간판을 세워야할 지 모른다. 한 가지 제안이 있다. 성공회대학의 교양필수 과목인 ‘신앙, 역사, 희망’의 교수진에 신부님들은 대거 투입하는 것이다. 서강대학교와 가톨릭대학교에도 대학의 정체성을 살리는 전략과목으로 신학적 인간학과 그리스도교 윤리라는 교양필수과목이 있는데, 대부분 가톨릭 신부님들이 담당한다. 어떤 연유로 대학에 들어왔든지 가톨릭 정신을 학생들에게 배우게 해 주자는 의도이고, 유익한 강의로 정평이 나있다. 예수회에 입회하거나 가톨릭 신학대학으로 전학하는 학생들 대부분이 그 수업을 거쳤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신앙, 역사, 희망’도 같은 맥락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이 과목을 담당해 성공회 전통과 신념과 정신을 효과적으로 강의할 수 있는 신부님들이 교구에 넘치도록 많이 있기에 하는 말이다. 씨는 그렇게 뿌려야 한다.

가톨릭은 제 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미사가 많이 달라졌다. 간소화의 길을 걷는 중이다. 그러나 성공회의 감사성찬례는 오히려 옛 전통을 유지한다. 개신교는 예로부터 가톨릭과 구별하는 데서 자신의 특성을 만들어갔다. 따라서 예배의식에 늘 즉흥성이 이루어지다보니 신자들 사이에 예배의 경건성에 대한 목마름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 감사성찬례는 성공회의 큰 무기가 될 수 있다. 성공회의 감사성찬례는 누구에게나 열려있고 그것이 바로 성공회 예배의식의 강점이다. 각 교회마다 상황에 따라, 필요에 따라 다양한 감사성찬례를 개발할 필요가 있다. 기본 형식은 유지하면서 말이다. 이를테면, 다문화 가정을 위한 감사성찬례, 신혼부부 감사성찬례, 영화동호인을 위한 감사성찬례,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님들을 위한 감사성찬례, 우울증에 고통 받는 교우들을 위한 감사성찬례, 이혼한 이들을 위한 감사성찬례, 심각한 병에 걸린 이들을 위한 감사성찬례, 아들을 군대에 보낸 어머니들을 위한 감사성찬례, 구직자들을 위한 감사성찬례, 학위 논문을 준비하는 대학원생들을 위한 감사성찬례, 탈모로 고생하시는 분들을 위한 감사성찬례(장담컨대, 대단히 빛나는 감사성찬례가 될 것이다) 등등……. 얼마든지 가능하다. 소외된 교우들을 불러들일 수 있어 좋고, 교우들의 동질감을 느끼게 해주어서 좋고, 참여 교우들의 숫자에 연연할 필요 없으니 좋다. 그렇게 끼리끼리 모아서 예배를 드려 성공한 교회들이 바로 강남권 대형 교회들이라고 한다. 타산지석으로 삼아볼 일이다.

또 한 가지 구태의연한 제안이 있다. 가톨릭에선 주교님의 근거리에 참사회의가 있다. 이를테면 신학위원회 같은 조직이다. 그 조직은 어떤 사안이든지 교회의 입장을 표명하는 데 신속하고 정확하게 움직여 혼란을 최소화시킨다. 우리에게도 당연히 그런 역할을 하는 참사 격 신부님들이 있을 테고 교구 소속 조직들도 이미 넘치도록 많이 있을 것이다. 교구 정책을 수행해 감에 있어 신속하고 정확한 움직임이 이루어지지 않는 데 대한 아쉬움이 미세하리만치 약간 있다.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성공회만큼 한국 그리스도 교회와 사회에 신선한 좌표를 제시할 수 있는 교단이 없다는 사실을 언제나 인식해야 한다.  

이제 성공회 신부님들이 공감할만한 미래의 목표를 한번 제시해 보겠다. ‘성공회의 신앙과 특징을 잘 살려내고 개발하여 어려움에 빠진 한국 교회 전체를 선도하는 비전을 제시하자.’

써놓고 보니까 허무하고 맹랑하기 짝이 없다. 필자 자신도 낯이 빨개지는데, 가슴에 전혀 와 닿지 않는 상투적인 선언문 식이라 그런 모양이다. 아무튼 그 목표를 위해 필자는 개신교건 가톨릭이건, 대학 강의에서건 평신도 강연에서건, 학회에 나가서건 언론매체에 이름을 올릴 때건, 부지런히 성공회 신부라는 사실과 성공회의 강점인 이성적 신앙을 내세운다. 그리고 혹시 필진이나 강사를 소개해 달라는 청이 들어오면 예외 없이 성공회 신부님들을 추천한다. 아니, 어떤 때는 스스로 추천할 인물이 있다고 나서기도 하는데, 조금 낯간지럽지만 참고서 한다. 그러면 나름 성공회를 알리는 기회가 될 것이라는 기특한 생각에서이다. 사실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은 필자뿐이 아니다. 일일이 거론하지는 않겠지만 많은 성공회 신부님들이 우리나라 교회와 사회 각처에서 이미 의미 있는 일에 종사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 신부님들이 대한 성공회의 크나큰 재산이다.

‘성공회 신부님이라면 권력을 쫓지 않을 것이다.’, ‘성공회 신부님이라면 돈을 밝히지 않을 것이다.’, ‘성공회 신부님이라면 실력 있을 것이다.’, ‘성공회 신부님이라면 뒤통수를 치지 않을 것이다.’, ‘역시 성공회 신부님이니까 믿을 만하다.’ 그런 평을 주변에서 얻을 때 우리는 아름다워질 수 있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 법이다.        

세계의 모든 문명들은 비슷한 길을 걸어왔다. 속박에서 자유로, 자유에서 번영으로, 번영에서 만족으로, 만족에서 무관심으로, 무관심에서 다시 속박으로. 우리가 이런 역사에서 벗어나려면 악순환의 고리를 지금 끊어야 한다.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면 반복할 수밖에 없다.

오늘은 대한 성공회에 큰 생각, 큰 인물이 어느 때보다 필요한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