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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려면 마중 삶이 필요합니다.(부활 6주일, 최도미닉 신부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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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6주) / 사도17:22-31, 1베드3:13-22, 요한14:15-21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려면 마중 삶이 필요합니다

 

옛 날 펌프로 물을 기르던 때는 마중물이란 것이 있습니다. 물을 기르기 위해서는 펌프에 물을 한 바가지 부어주어야 물을 퍼 올릴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신앙에도 마중물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물이 없이는 살 수 없듯이 우리의 신앙도 성령의 인도함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물을 얻기 위해 마중물이 필요하듯이 우리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얻으려면 마중 삶이 필요합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다른 협조자를 보내 주셔서 너희와 영원히 함께 계시도록 하실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다른 협조자는 성령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앞으로 우리의 삶을 도와주시고, 이끌어 주실 분입니다. 예수가 주님이심을 깨닫게 해주시고, 예수를 닮아 살아 갈 수 있도록 도와주실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 열매로 기쁨이 넘치게 하실 분이십니다. 그런데 이 분의 도움을 받으려면 마중 삶이 필요합니다.

 

주님은 “내 계명을 받아들이고 지키는 사람은 바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만 될 수 있다면 누구나 하느님의 사랑을 받게 될 것이고, 그 축복 속에 머물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주신 계명은 무엇일까요? 한마디로 말하라면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15:12)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서로 사랑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이런 말씀을 몰라서 못하는 게 아닙니다. 문제는 그 말씀을 가슴으로 뜨겁게 느끼고, 그것을 아멘으로 응답할 수 없는 게 문제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우리가 이런 사랑을 나눌 수 있도록 도와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분은 “다른 협조자” 곧 성령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 주시어 우리를 도와주실 것이니, 그분께 도움을 청하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려면 성령의 도우심을 청할 수 있는 삶의 원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 성령의 생수가 강물처럼 흐르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마중 삶이란 것이 어떤 것인가요? 이것이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요지입니다.

 

우선, 주님의 뜻을 묻는 사람에게 성령은 함께 하십니다.

“나는 너희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겠다.”라고 하십니다. 고아는 자기 의지대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제부터는 고아로 두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이 말은 이제부터는 내 뜻과 의지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묻는 사람으로 세우겠다는 말씀입니다. 이게 성령께 도움을 청할 수 있는 비밀입니다.

 

오늘 사도행전의 말씀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기 위해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 가르쳐준 바울로의 가르침입니다.

“사람들이 하느님을 더듬어 찾기만 하면 만날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더듬어 찾기만 해라, 이 말씀은 한마디로 하느님의 뜻을 물으라는 말입니다. 기도할 때도, 성경을 읽을 때도 어떤 일을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요즘 구원파 침례교회와 한국 교회를 보면서 느끼는 위기는 하느님의 뜻을 묻기를 멈추었다는 것입니다. 뜻을 묻지 않으면 성령의 도우심은 멈춥니다. 한 때 그토록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았던 교회가 위기인 것은 신도수가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뜻을 묻지 않는 데서 오는 위기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물으면 성령께서 언제나 도와주십니다. 때문에 바울로는 자신이 뭔가 하려는 욕심을 버리고 언제나 하느님의 뜻을 물으면 살아가기를 원하셨습니다.

어떻습니까? 성령의 도우심을 청하는 일이 매우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늘 우리 곁에 겨시니 한번 더듬어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내민 손을 잡아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일을 잊고 내 마음을 대로 처리해 버립니다.

고린도 전서 13장 말씀을 흔히 사랑장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3절 말씀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내가 비록 모든 재산을 남에게 나누어 준다 하더라도 또 내가 남을 위하여 불속에 뛰어 든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여러분 누군가 자신의 재산을 다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목숨을 걸고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불속에 뛰어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런 행위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랑의 행위가 아닙니까? 사랑이 없이 이런 행위가 가능하겠습니까? 그런데 바울로는 참된 사랑이 아니라고 합니다.

 

왜 바울로는 이런 말을 했을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묻지 않고 내 마음대로, 내 주관대로, 내 방식대로 사랑했고 희생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희생은 오히려 잘못된 열매를 맺게 합니다. 고린도 전서 15장 4절 이하의 말씀을 보십시오. 사랑한다고 하지만 오래 참지 못합니다. 자랑하고 교만에 빠집니다. 그리고 무례하고 사욕을 품고 있습니다. 그리고 덮어주고, 믿기 보다는 의심하고, 질투합니다.

이게 내 마음대로 하는 사랑입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받을 수 없고, 성령이 주시는 열매를 얻을 수 없습니다. 때문에 성도는 무엇을 하기에 앞서 주님의 뜻을 물을 줄 알아야 합니다.

 

야곱을 보십시오. 야곱은 요셉을 사랑하되 자신의 방식대로 사랑했습니다. 어떻게 요셉을 대해야 하는지 하느님께 묻지 않았습니다. 창세기 37장 3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야곱은 요셉을 늘그막에 얻은 아들이라고 해서 어느 아들보다도 더 사랑하였다. 그래서 장신구를 단 옷을 지어 입히곤 하였다.”

사실 늘그막에 얻은 아들, 그것도 사랑하는 여인, 라헬로부터 얻은 아들이니 오죽 귀엽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사랑은 하느님 뜻대로 한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야곱이 자신의 뜻대로 한 자식사랑이었습니다. 결국 이런 아버지의 그릇된 편애는 형제들 간에 증오와 미움을 낳게 만든 것입니다. 여러분은 구원파의 신앙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드셨습니까? 거기에 성령의 열매가 있다고 보십니까?

 

4절 말씀입니다

“이렇게 아버지가 유별나게 그만을 더 사랑하는 것을 보고 형들은 미워서 정다운 말 한 마디 건넬 생각이 없었다.”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미웠으면 형제끼리 이런 마음을 먹었겠습니까? 이게 어디서 나왔습니까? 아버지의 그릇된 사랑에서 나왔습니다. 이처럼 야곱의 잘못된 사랑은 형제들을 하나 되게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갈등과 미움을 만들어내고 말았던 것입니다.

 

요즘 우리 교회뿐만 아니라 사회도 사랑의 홍수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진실 된 사랑을 찾아보려면 그 사랑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내 뜻대로 내 마음대로 하는 사랑은 많은데 진정 아버지의 뜻대로, 성령께서 이끌어 주시는 대로 따라가는 사랑은 보이지 않습니다.

 

때문에 주님이 제자들에게 당부하십니다. 사랑하되,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께 뜻을 구하는 사랑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야 성령께서 이끄시는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배려하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주님은 사랑을 가르치실 때는 언제나 “서로”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서로라는 말은 관계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나’만 생각한다면 그 곳에는 ‘서로’는 없습니다. 때문에 사랑할 때는 일방적인 사랑이 아니라 “너”를 의식하라는 사랑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너’를 보려면 반드시 따라야 할 태도가 있습니다. ‘나’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나’를 내려놓지 않고는 결코 “너”를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주님은 자신을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려야 한다.”라고 가르치십니다. 왜 나를 버려야 할까요? 나를 버려야 성령께서 그 빈자를 채우시기 때문입니다.

 

어제는 주보에 이름을 바꾸는 일로 제가 아내에게 화를 냈습니다. 아내가 보니 성가대 총무 이름이 김봉구 되어 있는 것입니다. 아마 아내가 생각하기는 심희륭인데 김봉구로 되어 있으니 일 때문에 밖에 나가 있는 남편이 없는 사이에 고쳐놓아야지 한 것입니다. 그래서 정성을 다해 화이트로 지우로 고쳐놨습니다. 얼마나 지극한 정성입니까? 그런제 저는 화를 냈지 뭡니까?

저는 늘 설교할 때 배려하라는 설교를 참 많이 합니다. 그런데 정작 현실 속에서는 성령의 도움을 전혀 받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내 감정 때문에 아내의 배려를 읽어내지 못한 것입니다. 어차피 고칠 것이었다면 고맙다고 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렇습니다. 소소한 일상 속에서 배려하는 마음을 가져야 성령의 도우심을 받을 수 있다는 이 작은 진실을 늘 이렇게 깨닫습니다.

 

십자가에서 우편의 강도가 예수님을 향해 “주님, 왕이 되어 오실 때 저를 꼭 기억해 주십시오.”라고 말합니다.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지금 내가 죽을 판인데 이런 소리가 들리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강도를 향해 “오늘 너는 정녕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이런 말씀을 하실 수 있었을까요? 나를 버리고 남을 배려하지 않고는 나올 수 없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나를 내려놓고 남을 배려할 때 성령께서 나와 함께 해주십니다. 교회에서, 가정에서 이런 사랑을 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리고 이 나라의 지도자들도 이런 마음으로 백성을 사랑하고 국가를 사랑했으면 좋겠습니다.

 

다음으로, 무엇이든지 지금 행하시면 됩니다.

주님은 “내 계명을 지키는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사람은 지켰던 사람도, 지킬 사람도 아니라 바로 지금 지키는 사람입니다. 과거에 했던 일을 자랑하지 마십시오. 이미 지나간 일입니다. 앞으로 무엇을 하겠다고 자랑하지 마십시오. 공상에 불과 한 무의미한 일입니다. 천 리길을 가려면 지금 한 걸음을 걸을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때문에 성령의 인도하심을 원한다면 전에 한일도, 또 앞으로 할 일을 가지고 염려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언제나”라고 하셨습니다. “언제나”는 바로 지금을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기를 원한다면 지금 하십시오. 그것이 용서하는 일이라면 지금 해야 합니다. 기도해야 할 일이라면 지금 하십시오. 바울로는 지금이 은혜의 때라고 했습니다. 지금 주님을 위해 내가 뭔가 하려 한다면 성령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이끄심을 받으려면 벽을 허물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니고데모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바람은 제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 성령으로 난 사람을 누구든지 이와 마찬가지이다.”

 

그렇습니다. 성령은 벽을 만들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벽을 만들어 놓고 성령의 도우심을 청한다면 어떻게 도움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물을 길러 나온 사마리아 여인에게 예수님께서 제일 먼저 하신 일은 벽을 허물어 주신 일이었습니다. 종교의 벽, 지역의 벽, 신분의 벽, 성별의 벽을 허무셨습니다. 이런 벽들이 두고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청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벽들이 허물어지면 자연스럽게 성령께서 개입하십니다.

 

벽, 이것을 불교에서 집착 이라합니다. 때문에 좋은 감정도 나쁜 감정도 버리라고 합니다. 좋은 감정은 좋은 벽을 만들고, 나쁜 감정은 나쁜 벽을 만들기 때문이겠지요. 불교도 이렇게 말하는데 기독교야 오죽하겠습니까? 때문에 주님은 나를 좋아하고, 잘해주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강도도 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사랑은 벽이 없는 사랑입니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 나에게 아픔을 준 그 사람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용서해주고, 이해해주고, 감싸주라고 하십니다. 우리 교회 안에, 우리 가정 안에, 그리고 이 세상 안에 있는 벽을 허무시기 바랍니다.

 

바로 이 길을 볼 수 있다면 여러분은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세상은 나를 보지 못하게 되겠지만”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은 이 진리를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봅니다. 이제 매사에 하느님의 뜻을 묻는 성도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남을 배려하고, 벽을 허무는 삶을 지금 시작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셔서 누구든지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보내주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살 수 있는 강동교회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