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말씀과 신앙나눔 성모송 묵상 2- “기뻐하소서”

성모송 묵상 2- “기뻐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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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총을 가득히 입으신 마리아여, 기뻐하소서.
주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며
마리아께 나신 예수님 또한 복되시나이다.
하느님의 성모 마리아여
이제와 임종시에 우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가브리엘의 인사에 고개를 숙인 마리아에게 처음 들린 메시지는 “기뻐하라!”는 것이었다. 어떻게 천사는 마리아에게 이런 메시지를 전할 수 있었을까. 갈릴리는 여전히 로마와 유대의 식민지였고, 마리아 역시 그 땅에 속한 사람이었다. 마리아를 둘러싼 권력관계에는 변화가 없어 보인다. 유대와 갈릴리에서 일어난 많은 혁명운동들은 실패로 돌아가지 않았던가. -그리고 그 운동들의 중심에 섰던 ‘메시야’들은 참혹한 십자가에 달려 새들과 개들의 먹이로 사라지지 않았던가!- 게다가 마리아는 천사의 방문을 받기 얼마 전에 결혼이라는 제도에 의해 요셉이라는 남성에게 종속되어야만 했다. 가난과 차별의 멍에 위에 가사노동의 짐까지 새로 지게 된 마리아에게 어떻게 천사는 “기뻐하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
 
  천사의 메시지는 어떻게 보면 마리아에게 현실에 적응할 것을 강요하는것 같기도 하다.
 
  “기뻐해라. 지금 주어진 삶을 하느님이 주신 것으로 믿고 감사하고 기뻐하며 살아라.”
 
  실제로 우리의 교회가 그렇게 설교했던 때가 있었다. 지금도 많은 곳에서 그 때는 끝나지 않은 상황이다. 이것은 우리가 수많은 좋은 사람들을 잃어버린 이유가 이 메시지 때문이기도 하다. 일본 제국의 통치하에 있던 조선에서, 세상을 좀 더 좋은 곳으로 만들고 싶었던 많은 사람들이 현실의 권세를 인정하고 복종하라는 선교사의 설교를 듣고 떠나갔다. 그들의 흔적은 이제 기독교 안에 있지 않고, 대종교와 원불교 안에 새겨져 있다. 천사는 마리아에게 벽안의 선교사들이 그랫던 것처럼 현실에 대한 수긍을 요구하고 있는걸까?
 
  앞서 천사의 방문을 받았던 다니엘의 이야기에서, 천사는 다니엘에게 놀라운 사실을 알려준다. ‘페르시아의 권세를 잡은 자와의 싸움에서 미카엘이 승리를 거두었다’ 라고. 그리고 천사는 다니엘에게 말한다. ‘세상의 권세는 하느님의 손에 있다’고. 천사는 하느님이 어떻게 세상의 권세잡은 자들을 멸하고 자신의 나라를 세상에 건설하실 지를 장황하게 설명한다. 이것이 천사가 다니엘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한 이유였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모든 현실을 수긍할 것을 요구하신 적이 없다. 사실은 반대이다. 우리 신앙의 조상들은 때때로 세상의 권력들을 철저히 부정해야 했다. 그들은 황제에게 절할 것을 거부했고, 제국의 군인이 되는 것을 거부했다. 또한 어떤 이들은 나치에 협력하는 것을 거부하다 죽음에 이르렀다. 어떤 사람은 신사에 참배하는 것을 거부하다 제국의 사법제도에 의해 목숨을 빼앗겼다.
 
  초대교회의 신자들은 다니엘보다 더한 것을 믿었다. 그들은 다니엘이 본 그 환상이 지금 자신들의 눈 앞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믿었다. 하느님께서 예수라는 사람을 일으키시어, 자신의 나라를 이미 건설하시 시작하셨다는 것이다. “예수” 이 이름이 기독교인의 기쁨의 근원이었다. 그 이름은 바로 지금 여기에서 시작된 하느님 나라의 다른 이름이었다. 이 기쁨은 우리를 좌절로부터 건져준다. 좌절은 세상의 권세가 우리를 통제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인것 같다. 스타크래프트에서 퀸에 의해 감염된 마린처럼 좌절에 감염된 어제의 용사는 제국의 가장 충실한 종이 된다. 70-80년대 더 좋은 세상이 ‘가능하다’고 믿었던 많은 젊은이들이 그랬다. 그들중 많은 사람들이 권세와 맞딱드려 좌절을 느끼는 순간 권세의 종이 되었다.
 
  “거 봐 어쩔 수 없어. 우리가 철이 없었던 거지.”
 
  그리고 우리에겐 여러 모로 그들의 때를 연상시키는 새로운 정권이 돌아왔다. 초대 기독교인들의 기쁨이 다시 우리에게 필요한 때이다.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는 희망이 주는 기쁨이 아닌, ‘하느님이 예수를 통해 이미 세상을 이기셨다. 그러므로 이미 그 나라가 임한 것처럼 기뻐하라’는 선언이 주는 그 기쁨 말이다. 그렇게 믿고 기뻐하는 이들 안에 실제로 그 나라가 임한다.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자처했던 사울이라는 이름의 기독교인은 칼도, 위협도, 죽음 마저도 그들을 막을 수 없다고 말했다.
 
  성모송의 두 번째 문장은 그 기쁨 안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바꾸기에 충분한 그 기쁨의 강으로 세상의 모든 교회가 함께 들어가 뛰어 놀 수는 없는걸까. 나는 그 날이 이미 시작되었다고 믿는다. 바로 ‘우리 주 그리스도’ 안에서.